[ 특집 ] 2001년11월21일 제385호 

뜨거운 감자 ‘이인제 대세론’

덥석 받아들이자니 미심쩍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확실한 대안이 마땅찮은…


사진/ 논산 시민건강달리기 대회에 참가한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

김대중 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로 본격화한 민주당의 차기주자 경쟁국면. 그 맨 앞에 이인제 상임고문이 달리고 있다. 당내 부동의 대중 지지도 1위, 현역의원 40여명에 달하는 지지세력. 차기주자 이 고문의 아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현실들이다. “내년 대선은 결국 이인제-이회창의 대결이 될 것이다. 당내 경선은 걱정하지 않는다. 대의원들도 국민지지가 가장 높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될 사람’을 후보로 뽑을 것이다.”(이 고문쪽 관계자)

‘당선가능성’이라는 화두

이 고문이 민주당의 전신 국민회의에 합류한 98년 9월 상황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당시 9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 고문의 국민회의행을 따랐던 현역의원은 이용삼, 원유철 등 6명. 사실상 혈혈단신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유일한 자산은 97년 대선에서 얻었던 500만표. “당시에는 모든 게 불투명했다. 다음 대선까지는 4년 반이나 남았다. 한국처럼 복병이 많은 정치판에서 차기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선패배로 곤궁에 빠진 이 고문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이 고문의 측근) 그렇지만 내년 대선을 1년 남짓 남긴 시점에서 이 고문은 민주당에서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고문의 대세론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은 9월7일 이 고문의 계파 모임. 현역의원 26명이 참여한 이 자리에 이훈평, 조재환 등 동교동계 구파 의원들이 함께했다. 동교동계 구파는 이처럼 내놓고 이 고문 캠프의 모임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동교동계 권노갑 전 최고위원의 대변인격인 이훈평 의원은 최근 “우리(동교동계 구파)는 이제 이인제로 정했다. 누가 뭐래도 이인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뛰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당내 최고의 대중지지도에 당내 최대지분 세력인 동교동계 구파의 전폭적인 지원, 그렇다면 이 최고의 대선가도는 쾌속항진일까. 그러나 아직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변수가 남아 있다는 게 민주당의 분위기다. 무엇보다 최근 크게 벌어진 이회창 총재과의 지지도 격차 때문이다. 이 고문과 이회창 총재의 양자대결을 가상해 벌인 <한겨레>의 10월28일 여론조사에서 이 고문은 11.6%포인트(34.6% 대 46.2%)나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달 전인 9월21일 조사에서 3.9%포인트 차이(34.5% 대 38.4%)를 보인 것과 견주기 어려울 만큼 큰 격차다.

차기 대선 승리가능성이야말로 ‘이인제 대세론’의 핵심논리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이 고문의 당선 가능성에 물음표를 달게 한 것이다. 당내 경선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는 한 의원은 “10·25 재·보선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 고문이 한나라당 이 총재에 10% 이상 뒤지고 지지표가 호남에 편중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요지부동이었던 이인제 대세론에 당내 의원들 사이에 동요가 심하다. 연초 이 총재에게 역전된 지지도를 반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상황 아니냐. 뭔가 변화가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많다”고 전했다.

이 고문이 당내 대세론을 형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지난해 4월 총선과 8월 전당대회였다. 이 고문은 99년 4월 미국에서 돌아온 뒤 그동안 여권 내 가장 유력한 주자로 꼽혔다. 귀국 뒤 현실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으나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가장 광범한 대중지지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10월6일 <경향신문>이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 이 고문은 22.6%를 얻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15.2%)마저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4월 총선과 8월 전당대회로 도약

그렇지만 이 고문은 여전히 잠재적 가능성에 머물렀다. 현실정치에서 아직 검증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문은 이듬해 선대위원장으로 정치전면에 나서 치른 4월 총선에서 국민회의 시절 고전을 면치 못했던 충청과 강원지역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현실정치에서도 가장 유력한 차기주자임을 입증해냈다.

이 고문이 얻은 성과는 우선 충청권의 영향력을 확인하며 지역기반을 다졌다는 점. 민주당은 선대위원장인 이 고문이 고향 충남 논산에 직접 출마하며 ‘이인제 바람’을 불러일으킨 데 힘입어 충청권 24석 가운데 3분의 1인 8석을 얻었다. “당시 일부에서는 ‘선대위원장이 무슨 지역구냐’며 전국구 출마를 권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지역기반이 없이 정치적 장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 지역기반이 불분명한 박찬종 전 의원의 경우 한때 신한국당에서 차기주자로 가장 높은 국민지지를 받았으나 어떻게 되었느냐. 지역기반이 없는 국민지지는 모래성이다. 이 때문에 ‘편한 길’을 마다하고 논산 출마를 결정했다.” 이 고문의 한 측근은 “이 고문의 대세론은 대중 지지도에 안주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처럼 현실 정치판에서 필요할 때마다 강력한 결단력과 돌파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8월 전당대회 출마는 이 고문의 적극적인 정치행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최고위원 경선전이 된 이 전당대회에서 이 고문 캠프는 이 고문의 출마여부를 놓고 논란을 겪었다. 일부에서 “경선전에 나가는 것 자체가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지금은 거의 유일한 차기주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경선에 나가면 ‘여러 차기주자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된다. 더욱이 당내 기반이 취약해 경선 1위가 불투명한데, 자칫 정치적 상처만 남길 우려가 있다”며 출마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고문은 출마를 강행했다. 이 고문은 비록 2위에 그쳤지만 경선과정을 통해 지지세력을 규합해내는 등 당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고문이 전당대회에 출마할 때만 해도 당내 지지기반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을 거치며 직접 대의원과 접촉하고 세력을 넓혀 이제 20∼30%는 확보하게 됐다. 스스로 당내기반을 만들어내며 ‘이인제 대세론’을 형성해낸 것이다.”(이 고문쪽 관계자)

영남은 물론이고 충청권 지지도 의문

여기에 당내 최대계파인 동교동계가 이 고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서며 ‘이인제 대세론‘은 순항했다.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 전 최고위원은 3월15일 이 고문의 후원회에 참석해 “이인제 선대위원장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창조적 지도자다. 이 위원장이 큰일을 하는 거목으로 성장하도록 성원을 부탁한다”며 차기 지도자로 한껏 추어올렸다. 실제 권 전 최고위원은 8월 전당대회에서 이 고문을 적극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경선주자들 사이에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고문이 대세론을 형성해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이인제 회의론’도 함께 낳았다. 우선 이 고문의 가능성을 높여준 지난해 4월 총선 결과는 동시에 이 고문의 한계도 보여줬다. 97년 대선 당시 이 고문의 영남 득표율은 부산 29.8% 62만표, 경남 31.3% 33만표, 울산 26.7% 14만표였다. 이른바 PK지역의 경우 전국득표율 19.2%보다 높았다. 그러나 이 고문이 선대위원장으로 선거전을 진두지휘한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은 단 한석도 건지지 못했다. 반DJ정서에 가로막힌 민주당의 한계였지만 이 고문에 대한 영남권의 거부정서로도 풀이될 만한 것이었다. 실제 한나라당은 총선 내내 “이인제의 경선불복 때문에 DJ가 됐다”는 이른바 ‘이인제 학습효과’를 퍼뜨리며 영남권 61석 가운데 60석을 석권했다.

이 고문의 영남권 득표력에 대한 불확실한 전망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그동안 여권 내부에서 내년 대선정국을 겨냥한 정계개편설, 영남후보론, 외부인사 영입설 등이 끊이지 않은 것도 이런 ‘이인제 회의론’의 다른 표현이다. 이 고문을 포함한 민주당 내 경선주자로는 이회창 총재를 이길 수 없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 이 고문을 적극 지원해온 권 전 최고위원이 당 안팎의 도전으로 상처를 받고 뒤로 물러선 것도 이인제 대세론에 흠집을 냈다. 권 전 최고위원은 지난해 12월 쇄신파동 때 정동영 최고위원의 직격탄을 맞고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데 이어 최근 당정쇄신의 소용돌이 속에서 쇄신파들로부터 사실상 은퇴를 강요받았다. 권 전 최고위원은 “정치를 계속 할 것”이라며 버티고 있지만, 그가 과거처럼 민주당 내 최대계파의 좌장다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10·25 재·보선 패배 이후 민주당에서는 “이 고문의 한계가 드러난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당 관계자는 “이 고문은 누구보다 10·25 재·보선에서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충청권표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한나라당은 김용환, 강창희 의원 영입 이후 충청권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고문의 충청권 영향력이 의문시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이 고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회창 총재에 뒤진 지지율을 뒤집을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내에서는 이런 흐름이 대선 때까지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고 전했다.

이 고문은 “국민의 지지가 높은 주자가 후보가 돼야 한다”며 당내에서 가장 높은 대중지지도를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이 고문의 성패는 이 고문이 이회창 총재에게 뒤진 지지율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느냐에 달렸다고 보고 있다. 특히 영남의 완고한 지역정서를 뚫고 들어갈 방안을 제시하느냐를 핵심 과제로 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는 이 고문의 영남지역 지지도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가 10월27∼28일 실시한 여론조사의 경우 이인제 대 이회창의 가상대결에서 이 고문은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에서 11.9% 대 68.4%, 14.4% 대 58.8%로 크게 뒤졌다. 당 관계자는 “이 고문의 경우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지역에서는 호남 출신인 한화갑 상임고문, 고건 시장 등보다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고문의 호남 득표력은 더이상 늘어날 여지가 적다는 뜻이다. 따라서 관건은 영남권인데 이 고문이 영남권을 공략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 고문에 대한 회의론은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내년 선거에선 지역주의 무너질 것”


사진/ 이인제 상임고문이 참여한 21세기산악회 모임. 이 고문이 대세론을 형성해가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이인제 회의론'도 함께 낳았다.


이에 대해 이 고문은 “내년 대선에서는 지역주의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대선에 DJ가 출마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남의 반DJ정서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나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이 반YS정서와 반DJ정서를 자극하기 전 60%가 넘는 지지를 오랫동안 확보하고 있었다. 이후 내가 YS에게 200억원을 받아먹었다는 흑색선전으로 1주일 만에 지지가 30%대로 떨어졌다가 대선에서 26% 득표를 하게 됐다. 내가 후보가 되면 그 지지는 순식간에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고문쪽의 주장이 민주당에서 크게 설득력을 얻고 있지는 못하다. 무엇보다 이 고문의 주장이 현실정치에서 검증되지 않은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이 고문의 대세론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속단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대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당에서는 노무현 고문 등이 ‘영남후보론’을 등에 업고 이 고문을 압박하고 있다. 당내에서도 이전보다 ‘영남후보론’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영남후보론도 현실정치에서 검증되지 않은 논리이기는 마찬가지다. 실제 영남후보 선두주자인 노 고문의 경우 아직 영남지역에서 이인제 고문보다 뚜렷한 우위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실제 10월27∼28일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노 고문은 이회창 총재와의 가상대결에서 18.2% 대 58.7%(대구·경북), 16.7% 대 60.0%(부산·경남)로 이 고문보다 조금 앞서고 있다.

덥석 받아들이자니 왠지 미심쩍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확실한 대안이 마땅찮은, ‘이인제 대세론’, 거기에 내년 대선을 바라보는 민주당의 고민이 모두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글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사진 이용호 기자 y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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