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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을 올려라, DJ는 떠났다 대통령 총재직 사퇴 뒤 ‘민주호’의 갈 길…당내 민주화·전당대회 방식·대의원 수 조정에 고심
11월8일 민주당 당무회의. 심재권 총재비서실장이 총재직 사퇴의사를 밝히는 김대중 대통령의 친서를 대신 읽어내려가자, 회의 분위기는 숙연하다 못해 침통했다. 김 대통령의 직계인 동교동계의 김옥두·설훈 의원과 추미애 의원 등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다고 하는데 아들이 그냥 있으면 되나. 막아야지.”(설훈 의원) “뜻밖이다. 대통령이 총재를 사퇴할 것은 예상 못했다.”(이인제 의원) “우리의 요구는 쇄신이지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사퇴하라는 것은 아니었다.”(이재정 의원)
정치적 불안정, 혹은 낡은 정치 해체
집권여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물러난 것은 한국정당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80년대 이후 과거 대통령들의 집권당 총재직 사퇴는 차기 대선후보가 결정된 뒤 이뤄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97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두달 남짓 지난 9월24일 총재직을 사퇴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92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자당 대선후보로 선출되고 석달 뒤인 8월25일 총재직을 넘겨줬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8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당 후보 확정 한달 반 뒤인 8월5일 총재직을 이양해 자연스러운 권력이양의 길을 밟았다. 김 대통령의 돌연한 당 총재직 사퇴는 그만큼 김 대통령의 권력기반이 취약한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대중 정부는 98년 정부 출범 때부터 소수 정권의 어려움을 겪어온데다 경제난과 몇몇 실정, 권력핵심부의 비리의혹 등이 겹치면서 정권기반을 침식당해왔다. 여기에 올 9월 DJP 공조 붕괴로 김 대통령의 정권기반은 결정적으로 축소됐다. 이런 정치적 한계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10·25 재·보선 참패였다. 김 대통령이 당 총재직 사퇴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0·25 재·보선 뒤 불거진 당내 쇄신파들의 국정개혁 요구와 이에 따른 당내 갈등격화다. 쇄신파들은 김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자제했다. 그러나 쇄신파의 행동은 당내에 팽배한 정치적 위기감의 뒷받침을 받았고, 그 핵심이 “더이상 김 대통령의 리더십으로는 어렵다”는 것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지지기반 붕괴라는 정치적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과 정치적 비전이 절실하다는 호소였던 것이다. 이런 인식이 쇄신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당내에 광범위한 것이었다. 애초 김 대통령의 직계인 동교동 구파쪽이 주장했던 ‘후보 조기가시화’도 결국 ‘새 인물로 국면을 돌파하자’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의 당 총재직 사퇴는 양면의 칼날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치적 불안정성을 높였다는 점에서는 자칫 후유증도 우려된다. 새로운 리더십 창출과정에서 불가피한 갈등과 불화가 자칫 격화돼 통제불능 상태에 빠질 경우 불똥이 한나라당으로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 전체가 다시 한번 ‘헤쳐모여’를 겪으면서 정국혼란을 부채질할 가능성도 있다. 정치발전의 기회도 제공한다. 김 대통령의 퇴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 이른바 ‘3김’의 정치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물론 ‘3김’의 정치적 영향력이 일거에 사라질 것으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3김’의 공생적 경쟁관계 구도는 해체를 위한 첫 걸음을 뗐다고 볼 수 있다. 30여년간 우리 정치권을 옭아매왔던 낡은 정치의 틀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게 된 것이다.
당내 민주화, 대선 경쟁과 맞물려
이들은 김 대통령의 당 통제력이 사라진 현 상황에서 그동안 정치문화를 지배해왔던 ‘1인 보스정치’, ‘계보정치’ 등 낡은 관행에 대해 수술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의 리더십이 더이상 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아래로부터 나오도록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쇄신파의 한 의원은 “이제 인적쇄신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대신 당 내부 시스템에 민주적 제도를 도입해야 하는데 힘을 모아 나가야 한다. 그 핵심은 보스정치, 계보정치의 탈피에 있다”고 말했다. 정동영 의원은 “기업개혁의 핵심이 ‘황제경영’ 체제의 혁파에 있듯이 정치개혁의 핵심은 ‘보스정치’와 ‘제왕적 총재’ 등으로 불리는 정치 지배구조의 개선에 있다. 공천제도를 상향식으로 바꾸고 투표권을 가진 당헌의 범위를 넓히며 유능한 정치신인의 참여를 확대하고 후보자 선택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내 분위기는 대체로 이들의 주장에 대해 큰 틀에서 공감하는 쪽이다. 또 향후 당 체제개편과 전당대회 개최문제 등 현안을 다룰 ‘당발전과쇄신을위한특별대책위원회’(위원장 조세형·이하 특대위)에도 임채정·천정배 의원 등 쇄신파 의원들이 참여하고 있어 당 쇄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식창구도 마련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의도대로 관철될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우선 대선주자들의 경쟁이 본격화함에 따라 당내 모든 논의가 계파별 이해관계에 따라 채색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 개혁연대 구성원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대선주자 캠프에 가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등 특정 사안에 대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운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개혁연대 내부에서도 “당의 개혁을 추동하기 위해 개혁세력이 특정 후보와 연대를 맺고 당권 도전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쪽과 “중도개혁포럼 등과 대립되는 또다른 세력화는 계보정치가 될 공산이 크다”며 반대하는 쪽이 대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내 민주화문제와 함께 민주당이 풀어야 할 현안은 대선주자들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문제. 특히 전당대회 시기를 놓고 ‘포스트 DJ’를 노리는 대선주자들간의 이해가 엇갈리고 있어 절충이 만만치 않다. 전당대회 시기문제가 논의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초반 승세를 굳히려는 이인제·노무현 등 선발주자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한화갑·김근태 등 후발주자간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2단계 전대론과 1단계 전대론
2단계 전대론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는 과도체제는 짧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우선 당을 정비해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6월 지방선거는 지역별로 대표성이 있는 주자들이 자기 권역에서 최대한 성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체제가 돼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한화갑 상임고문쪽 관계자) “1월 전당대회는 당헌·당규에 규정돼 있다. 이미 있는 규칙을 바꾸려면 논란과 혼란만 불러일으킨다.”(김근태 상임고문) 반면 3월 전당대회를 지지하는 쪽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당의 얼굴은 대선후보일 수밖에 없다. 당 정비도 후보 중심이어야 한다”는 논리다. “1월 전당대회는 정기국회와 지구당 개편대회 일정 등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무리이며, 내년은 선거의 해이기 때문에 당 체제정비와 민심수습은 후보 조기가시화를 통해서나 가능하다.”(이인제 상임고문쪽 관계자) “앞으로 당의 얼굴은 총재가 아니라 대선후보가 될 수밖에 없다. 당의 얼굴없이 6월 전당대회를 치를 경우 어렵게 된다.”(노무현 상임고문쪽 관계자) 전당대회 방식과 대의원 수도 논란을 빚고 있다. 이 문제를 적극 제기하는 쪽은 김근태·정동영 상임고문. 두 상임고문은 민의를 더욱 정확하게 반영하기 위해 현재 1만명선인 대의원을 10만명선으로 대폭 늘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 대의원의 호남 편중을 시정하기 위해 지역별·성별·연령별 인구분포에 따라 대의원을 재조정하고, 가능하다면 각주를 순회하며 예비선거를 펼치는 미국처럼 권역별 대의원대회를 치르자는 입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인제·노무현 상임고문쪽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실제 이인제 상임고문의 경우 그동안 ‘인구 1천명당 대의원 1명’의 구도를 제시하고 5만 대의원을 주장해왔다. 한화갑 상임고문쪽도 “대의원 증원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구당 대의원을 늘리기보다는 당의 외연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직능단체 대의원 증원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또 단순 인구 비례에 따른 증원보다 당원 수 비례에 따른 증원쪽을 선호하고 있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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