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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꺾은 손들의 축제! 한국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의 국제연대 첫걸음, 터키 반전단체 세미나 현장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황량한 벌판을 가리키며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최정민씨가 근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전운이 감도는 지구를 돌아 평화를 논의하러 가는 길. 평화운동가 최정민,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변호인단의 김수정, 오재창 변호사로 구성된 한국 참가단은 터키시각으로 9월26일 오후 8시, 12시간의 비행 끝에 반전 인터내셔널(WRI: War Resister’s International) 연례 세미나가 열리는 터키의 이즈미르에 도착했다. 어둑한 공항을 빠져 나오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총을 든 터키의 군인들이었다. 반전 인터내셔널에서 보낸 회의 안내문에 “방문목적을 물으면 절대 평화회의에 참석하러 왔다고 하지 마라. 여행하러 왔다고 대답하라”고 적힌 이유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절대 회의에 왔다고 하지 마라”
터키는 군부가 권력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고,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미군에 공군기지를 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은 세계적인 주목을 끌고 있다. 총을 메고 거리를 거니는 ‘징집당한’ 청년들은 터키가 ‘군사주의’사회임을 시위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상화된 군사주의는 이번 회의가 터키에서 열리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총을 멘 군인들 앞을 지나가는 한국 참가단의 가방에는 안대열(An Daeyeol)부터 양일준(Yang Iljun)까지, 알파벳순으로 정리된 1500여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고 기사에게 회의장 안내도를 보여주었다. 이즈미르시 중심가로 향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택시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길가에는 가로등 하나 켜져 있지 않았고 마주 오는 차 한대 없었다. 짙은 어둠이 깔린 야트막한 구릉을 넘고 또 넘어 도착한 이즈미르 교외의 사키라카호텔. 반전 인터내셔널 본부 활동가 안드레아스와 요크가 호텔 데스크로 뛰어와 한국 참가단을 맞이했다. 테러와 전쟁의 세계에 사는 평화운동가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한적한 시골에서 겨우 모일 수 있었다. 9월27일 오후 2시. 첫 번째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는 10여개국에서 도착한 참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비행기 탈 돈이 없어서” 40여 시간을 오직 버스만으로 달려온 마케도니아의 아나키스트, 지구를 반바퀴 돌아온 칠레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가, 폐허의 뉴욕에서 날아온 할머니 평화운동가, 경찰의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참가한 터키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런던의 반전 인터내셔널 본부에서 활동하는 독일 게이…. 피부색, 지역, 나이 모두 제각각이지만 오직 ‘비폭력 평화’를 중심으로 모인 100여명의 사람들이 회의장을 메웠다. 그들 앞에 전세계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의 상징이 된 ‘총을 꺾는 손’(Broken Rifle) 깃발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나라별 소개가 끝난 뒤,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독특한 인사가 이어졌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일어나 보세요.” 회의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일어나자 박수가 터졌다. “엄마, 아빠들!” 뜻밖에 10여명의 사람들만이 일어났다. “다음은 채식인들!” 다시 절반 가까운 참가자들이 일어났다. 유쾌한 소개 시간이 끝난 뒤, ‘뉴욕의 테러사태와 평화운동’을 주제로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1세계에서 온 참가자들은 “테러의 근본 원인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있지만, 폭력은 결코 저항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반해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참가자들은 테러를 유발한 신자유주의에 좀더 강조점을 두었다. 1세계와 3세계의 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느껴졌다. 미국의 할머니 평화운동가 비비안은 “뉴욕에 20년을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밤거리를 마음놓고 다녀본 적이 없다”며 “마치 미국 정부가 테러만을 폭력인 것처럼 비난하지만, 미국의 일상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2시간 가까이 계속된 회의는 “무고한 시민의 대량 희생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국의 폭격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채 끝났다.
터키에선 감옥에서조차 군사훈련 강요
둘쨋날과 셋쨋날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제로 한 워크숍이 이어졌다. 둘쨋날인 9월29일 열린 ‘세계 각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현황’ 세미나에는 한국 이외에 터키, 칠레, 유고슬라비아, 네덜란드, 스페인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가들이 참석했다. 이날 세미나는 처음으로 국제회의를 통해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현황을 알리는 자리였다. 가장 먼저 오스카가 칠레의 상황을 알렸다. 그에 따르면, 대체복무제가 없는 칠레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은 1997년에 시작되었다. 대부분 아나키스트인 20여명의 청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구속을 각오하고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서를 경찰에 제출하는 ‘직접 행동’을 결행했다. 하지만 아직 구속자는 없다. 칠레 정부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처벌하는 대신 징집을 유예시키며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아직 칠레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이 이슈로 떠오르지 못했다”면서 “무엇보다 칠레사회의 무관심이 가장 큰 벽”이라고 말했다. 현재 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가이아나, 파라과이 등 4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칠레에 이어 터키 상황이 발표되었다. 터키 발표자인 이브라힘에 따르면, 터키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한번 처벌받은 뒤에도 되풀이해 구속될 수 있다. 게다가 최고 무기형까지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감옥에서조차 군사훈련을 받도록 강요당한다. 이런 악조건에도 터키에서는 92년 최초로 공개적인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자가 나왔고, 다음해에는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98년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집단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해 현재 수감돼 있는 상황이다. 이들의 병역거부 선언을 보도한 방송사 PD와 카메라맨이 군사재판을 받을 만큼 터키의 ‘군사주의’는 강력하다. 90년대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도 주목을 끌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세치코에 따르면, 전쟁기간중 징집을 피해 해외로 떠난 청년들은 3만명에 이른다. 전쟁 당시 병역거부자는 잡히는 즉시 총살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치코는 “발칸반도의 형제들을 죽일 수 없어서 많은 청년들이 징집을 기피했다”고 돌이켰다. 세치코도 스페인으로 넘어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다행히 전쟁을 주도했던 밀로셰비치 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대체복무 법안이 통과되었다.
“80년대 한국에선 왜 없었나요?”
“지금껏 양심적 병역거부자 모두가 여호와의 증인입니까?” “예. 99% 그렇습니다.” “그토록 격렬한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80년대 한국에서 학생운동가 중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없었단 말입니까?” 반전 인터내셔널 관계자들은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혹은 무언가 미처 알지 못하는 진실이 있을 것이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우글거리던’ 80년대 한국의 캠퍼스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설사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서 군 입대를 피하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병역의무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군사주의가 강력했던 거지요.” 한국 참가단의 대답이 끝난 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상황 설명이 이어졌다. 이미 네덜란드에서는 징병제가 폐지되었고, 스페인은 2002년 징병제 폐지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두 나라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의 역사만이 간략히 언급되었다. 3시간 넘게 이어진 세미나는 일정을 늘려 저녁 식사 뒤 다시 계속됐다. 자정 가까이 이어진 회의는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가들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제안으로 매듭지어졌다. 셋쨋날인 9월29일 오후 2시, ‘유엔 인권위원회를 통한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확보’를 주제로 세미나가 이어졌다. 이날 언급된 내용에 따르면 유엔 인권위는 87년 최초로 결의안 46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사상·양심·종교적 자유의 정당한 행사’로 규정했다. 98년 유엔 인권위가 결의한 88호는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결정사항이다. 유엔 인권위는 이 결의안에서 각국 정부에 △병역거부로 투옥이나 반복된 징계를 받지 않도록 조처할 것 △양심적 병역거부의 취지에 합당한 대체복부제를 마련할 것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난민으로 보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한국 상황, 주요이슈로 언급되다
마지막날 종합 토론을 끝으로 3박4일 동안의 세미나는 끝났다. 종합 토론에서도 한국 상황은 주요한 이슈로 언급되었다. 반전 인터내셔널 관계자들은 “우리는 한국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활발하게 접촉하며 힘이 닿는 데까지 돕고 싶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문제가 한반도를 넘어 ‘국제연대’ 차원으로 발전해나가는 첫걸음은 이미 시작됐다.
터키 이즈미르=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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