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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자민련, 가시밭 헤맨다 DJP공조 붕괴로 위태로운 생존현실 절감… 양당체제 가속화로 ‘캐스팅 보트’도 난망
“끓어오르는 분노와 의지를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짖는 개’보다는 ‘무는 개’가 되기로 했다.” 변웅전 자민련 대변인은 지난 9월6일 이한동 총리가 자민련 총재로 복귀하지 않고 국무총리로 남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열린 확대당직자회의 결과를 이렇게 발표했다. 의원들도 이 총리에 대한 막말들을 쏟아냈다. 정진석 의원은 “그러고도 자식 볼 낯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댔고, 이재선 의원은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퍼부었다. 지난 3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이후 자민련은 숨돌릴 틈조차 없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자민련의 의지대로 해임안을 관철시켰건만, 결과는 자민련의 처절한 위상추락뿐이었다. 정국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체제’로 흐르고 있다. 물론 자민련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다. 공황상태를 방불케 하는 자민련의 흉흉한 분위기도 현실이 애초 기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지게 진행되는 데 따른 당혹스러움의 표출이다.
상처뿐인 자존심의 ‘정치적 공황’
자민련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 총리의 변심이 자민련의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며 “교섭단체 붕괴는 내핍을 통해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지만 총재마저 등진 당의 현주소가 더욱 큰 자괴감을 느끼게 만든다”고 털어놨다. 자민련에서는 이 총리의 이탈이 ‘탈 JP의 서곡’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나돌고 있다. 지난 7일 개각에서 정우택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장관직에 끝까지 미련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일보>는 개각 당일까지도 정 의원의 장관직 유임을 점치기도 했다. JP가 신속하게 이 총리를 제명시킨 것도 당내 동요를 다잡기 위한 의도다. JP는 공조의 대가로 누렸던 ‘국민의 정부 공동소유주’로서의 권세도 상실했다. 장관직 4자리와 국영기업체 임직원에 대한 사실상의 인사권을 잃게 된 셈이다. 그만큼 JP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당 차원에서도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교섭단체 붕괴로 자민련은 3·4분기(9월15일 지급) 국고보조금을 8억원이 줄어든 5억9천여만원밖에 받지 못하게 된다. 자민련 사무처 요원들이 “의원 4명이 2주일만 늦게 탈당했더라면 14억1200만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시한 것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래저래 죽을 맛인 셈이다. 변웅전 대변인은 “마른 수건에서 물 짜내듯 당을 운영하기로 결의했다”고 당의 절박한 상황을 전했다. 공조 파기에 따라 이른바 ‘JP대망론’도 한갓 백일몽으로 끝나게 될 공산이 높아졌다. “애초의 계획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JP대망론이 ‘범여권 단일후론’을 근거로 해서 성립된 이론인데, 이젠 전략수정이 불가피하다.” 자민련에서 공식 발표한 JP대망론이라는 문건을 작성한 한 당직자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과의 공조는 파기됐고, 한나라당에는 이회창 총재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독자출마 이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는 JP대망론은 더이상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될 게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해임안 가결과 공조 파기로 자민련이 얻은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변 대변인은 “자민련 인터넷 홈페이지와 전화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수호해줘서 고맙다’는 격려가 쇄도하고 있다”며 “공조 파기 다음날 120여통의 전화가 왔는데 100여통 정도가 격려전화였다”고 전했다. 보수세력의 지지를 넓히고 반DJ정서를 흡수하는 데는 성과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보수세력과 반DJ층이 자민련에 지속적인 지지를 보낼지는 미지수다. 그들에겐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이 있기 때문이다.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보수정당의 ‘투톱체제’가 한나라당에 유리할 게 없다”는 정세분석을 내린 바 있다. 경쟁세력인 자민련을 도와줘서 좋을 게 없다는 분석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속뜻은 국회법 개정불가를 천명하고, 자민련이 거론된 이 총리 해임건의안을 일축한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정치권 새판짜기로 내분 가능성 대두
이런 상황에서 자민련 내부에서는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른 데 대한 책임론으로 웅성거리고 있다. 정우택 의원은 “일부 강경파들이 사태를 엉뚱하게 이끌었다”며 이완구 원내총무 등을 향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이양희 의원도 “강경파들이 너무 상황을 앞질러나가는 바람에 퇴로가 막혔다”고 가세했다. 강경파로 지목되고 있는 정진석 의원은 “내부적으로 강온기류가 교차했지만 JP가 가장 강경했다”며 “투표 당일까지도 임 장관이 사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점은 정세판단의 오류였지만 ‘유턴’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자민련은 생존을 고민하는 지경이 됐다. 당 안에서는 ‘민주당과의 관계 개선론’과 ‘한나라당과의 선택적 협조론’으로 엇갈리고 있다. 이양희 사무총장은 “깨진 쪽박이라고 버릴 게 아니라 꿰매어 쓰면 된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민주당과의 관계 회복을 주장한다. 온건파들도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반면 강경파를 대표하는 이완구 총무는 “국회에서 현 정부의 대북문제에 대해 강력한 제동을 걸겠다”며 “당 차원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감대가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보조를 맞추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총장은 “이 총무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자민련 내부의 이런 엇나가는 기류들이 일정한 잠복기를 거친 뒤 장차 내분사태로 비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대선국면이 가까워지면서 본격화될 정치권의 새판짜기가 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쪽 벽돌이 허물어진 자민련의 구심력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민련 내부에선 벌써부터 특정 의원들의 이름까지 거명하며 탈당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흔들리고 있는 자민련호의 키를 쥔 김종필 명예총재는 어떤 묘수를 동원해 난파를 막을 것인가. “의원 15명이 똘똘 뭉쳐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면서 나갈 겁니다. 내겐요, 내년 대선의 결과가 훤히 보입니다. (대선 결과를) 보니까 자민련은 없어지지 않아요. 염려하지 마세요.” JP는 지난 7일 안양에서 열린 여성당원연수에서 당원들을 다독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JP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녹록해보이진 않는다. 내부적으론 총재는 없고 명예총재와 총재대행만 있는 기형적 지도체제의 정비가 일차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전당대회를 열어 JP가 총재로 복귀하면 내부 결속력은 강화되겠지만 외부인사 영입 등엔 장애가 된다는 점이 고민이다. 외부적으로는 정치권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체제로 급속히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민련을 지켜내는 일이다. “지금은 생존이 중요한 시기다. 그러나 보수층의 지지와 충청권의 기반 등 JP가 지닌 ‘기본식량’은 있으므로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올 것이다.” 자민련의 한 당직자는 “JP는 대선국면에서 정계에 대폭풍이 불고 결국 정치권이 파편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지금은 허황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국내 정치판의 역동성으로 볼 때 JP가 결정적인 변수가 될 상황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믿는 건 오직 지역정서에 기댄 충청표
정국이 급속히 양당제체로 전개되는 현실에서 과연 JP와 자민련은 생존할 수 있을까. JP는 요즘 단 5명의 의원을 끌고 YS의 그늘에서 벗어나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휩쓸었던 지난 95년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을지 모른다. 당시 JP의 전략은 자신이 YS로부터 ‘팽’당했다는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지역정서에 호소하는 방법이었다. JP가 요즘 이한동 총리에 대해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라며 사무치는 ‘원한’을 표출하는 까닭도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충청권에 기댄 그의 생존법이 또다시 효력을 발휘할까? 아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임석규 기자/ 한겨레 정치부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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