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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키워온 절망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빚을 빚으로 갚는 국가재정, 정치마저 휘청
아르헨티나는 7월19일(현지시각) 하룻동안 산업활동을 멈췄다. 공무원 임금과 연금의 13% 삭감을 뼈대로 하는 정부의 초긴축정책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때문이다. 공공기관의 서비스는 물론, 버스 철도 항공기의 운항도 중단돼 나라 전체가 마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르헨티나 최대노동단체인 노동총연맹(CGT) 주도로 이뤄진 이번 총파업은 비주류 노동자들까지 합세해 파업참여율이 아주 높다. 노총은 19일 하룻동안 1300만 노동자 가운데 95% 이상이 출근을 거부했다고 발표했다.
고급인력은 국외로 국외로
실물경제는 더욱 말이 아니다. 90년대 초 메넴 정권 시절부터 추진해온 금융개방과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 장기간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고 실업률은 두 자릿수를 넘어서고 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공식실업률은 16.4%로 사상 최고수준이다. 전국적으로 450여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떠돌고 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93만9천명이 실직상태이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야말로 살얼음판 위의 삶을 살고 있다. 당장 내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굶어죽거나 아니면 빚을 내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찾고 싶지만 교통비조차 없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 나라에서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학교 졸업증으로 직업을 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대학졸업자도 상당수가 실업자로 전락한다.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얼굴에서는 암담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이곳의 교육수준은 남미에서 아주 높은 수준이다. 특히 수학, 물리학, 화학 등 기초과학 교육환경과 이 분야의 배출인력들은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 분야에서 배출되는 인력들은 외국에 나가 일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아르헨티나에서는 과학·기술인력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고 일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아드리안이라는 아르헨티나 과학자가 에이즈와 암을 퇴치하는 약을 개발했는데 이 사람은 이미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경제침몰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 중반부터이다. 89년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 살인적이고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퇴치하려고 공기업 민영화, 금융개방, 노동시장 유연화 등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을 폈고, 그 후유증이 94년 멕시코 통화위기와 맞물리면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넴 정권의 경제개혁 조처는 자립적인 경제발전의 토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뿌리내리려고 엄격한 고정환율제(1페소/1달러)를 채택해 페소화의 과대평가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함으로써 수출산업을 붕괴시키고 결국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초래했다. 고정된 페소환율을 유지하고 외국자본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고금리 긴축기조를 불가피하게 했으며, 이는 곧바로 만성적인 경기침체에다 세수부족에 따른 재정적자를 초래했다. 91년 이후 장기간 경기침체로 제조업 기반마저 완전히 무너져 아르헨티나는 지금 농산물과 원자재 등 1차상품 중심의 산업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국민들이 먹고살 산업이 없는 것이다.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는 결국 정부가 보유한 공기업 주식을 헐값에 팔아치우거나 외채로 보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의 진앙지는 메넴
이번에 단행한 긴축정책은 공무원과 연금생활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월임금이 1천페소(약 130만원) 이상 받는 공무원들에게 최고 30%까지 임금을 삭감하고 매달 300페소 이상의 연금수령자들을 대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게 해 연간 5억페소를 절약한다는 대책이다. 공공서비스 관련 기업에 대한 퇴출위주의 구조조정과 재정지원 중단조처도 단행됐다. 얼마 전 아르헨티나의 최대 항공사가 파업을 했는데, 이유는 이 항공사의 지속적인 적자로 파산신청을 하려다 생긴 일이다. 파산신청을 하게 되면 여기에 일하던 사람 중 500명 정도가 실직을 하게된다.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실직하면 굶어죽으란 말이냐며 퇴출대상 노동자들은 즉각 항의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지금 퇴출되는 노동자들은 곧바로 생계위협에 놓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발하는 또다른 이유는 위기극복의 고통을 서민과 노동자들에게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총연맹은 “정부가 15억달러에 이르는 재정긴축안을 단행하면 가뜩이나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노동자와 연금생활자들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국제금융자본의 수입기반을 보장해주려고 외채위기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에게만 고통을 전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지 언론들도 재정긴축 방안에 국회의원들이나 법원 판사의 연봉조정은 포함되지 않았고, 부유층에 대한 과세강화 방안이 없는 데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언제나 책임은 서민에게 돌아온다
이런 것들이 당장의 경제적 궁핍 이상으로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서로에 대한 불신감과 무력감을 심어주고 있다. 국민들의 이런 정서야말로 아르헨티나가 경제위기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일지 모른다. 특히 미래를 짊어져야 할 20대층의 무분별한 생활 속에서 가정파괴와 사회파괴의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뼈빠지게 일했는데 자식이 제멋대로 살고 있다”는 한탄을 많이 내뱉는다. 수많은 청년들은 가계를 짊어질 자신이 없는 탓인지 가정을 꾸리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에 드는 상대자가 나타나면 잠깐 동거생활을 하며 돈은 들어오는 대로 다 써버린다. 지난해 한 라디오방송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사랑하는 애인과 헤어지는 비율이 90%를 넘는다고 한다. 가계경제라는 게 형성될 여지가 전혀 없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경제심리는 이미 ‘위축단계’를 벗어나 ‘절망적 상태’에 빠져 있다.
실제로 정부가 마련한 긴축안의 성공여부는 노동계의 반발보다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의회로부터 동의를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가 더 큰 관건이다. 경제위기의 치료법을 내놓긴 했지만 실천에 옮기기까지 정치적 걸림돌이 만만치 않다. 어쨌든 아르헨티나는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신대 전창환 교수(국제경제학)는 “과도한 외채나 재정수지 적자 해소의 실적을 단기간에 내놓지 않으면 통화주권, 즉 화폐발행을 통한 국가경제 통제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달러를 자국의 공식화폐로 어쩔 수 없이 채택하게 될 수도 있다”며 “이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서 가장 극단적인 종속국가의 또다른 형태를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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