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릴레이 더위가 시작됐다

5월 봄더위에 6월 무더위, 7월엔 불볕더위… 뜨겁고 긴 여름은 온난화의 숙명

‘뜨거운 것이 좋다’고 한 건 마릴린 먼로와 잭 레먼 주연의 50년대 할리우드 코미디였던가? 아니 예로부터 농부들도 이글거리는 한여름 햇볕을 풍성한 수확을 위해 치러야 할 기쁜 고행으로 감내해왔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서 섭씨 30도를 넘나드는 5월의 때이른 더위를 대하노라면, 뜨거운 것에 대한 이런 유의 칭송은 아주 쉽게 증발해버린다. 한낮의 열기 아래 줄줄 흐르는 땀방울을 수건과 맨손으로 연신 훔쳐내던 약간 비만기의 한 점잖은 중년신사는 급기야 울컥 치솟는 짜증과 신경질을 “더워서 못살겠다”는 단말마의 비명으로 내지르고 만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봄의 대표주자 5월이 채 저물기도 전에 한반도는 어느새 훌쩍 기나긴 여름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 5월15일 강원도 강릉시의 최고기온은 35도에 육박했다. 서울, 부산, 대구 가릴 것 없이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든 건 이미 여러 차례라, 5월 날씨는 일찌감치 한여름의 절정을 방불케 하고 있다. 도심의 분수들은 일제히 물을 뿜어올리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배꼽티와 반바지, 샌들을 꺼내 입고 신고 신나는 원색의 여름 패션쇼를 선보이는 도시 선남선녀들의 몸짓도 물론 찾아볼 수 있다. 음료수며 빙과류, 에어컨과 선풍기 등 치솟는 상품 판매량에 대박을 꿈꾸는 여름 장사꾼들의 환호성도 들려온다. 하지만 더많은 사람들은 그늘과 에어컨을 찾아 늘어진 몸을 구겨던지며 힘겹게 묻는다. “도대체 봄은 어디로 간 거지?”

6월에도 전국적인 고온현상

안타깝게도 돌아갈 대답은 그리 시원한 게 못된다. 전문가들은 올 여름이 유난히 길고, 덥고, 짜증나는 한철이 되리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기상청은 지난 5월23일 발표한 2001년 여름철 예보에서 5월에 이어 6월에도 전국적으로 고온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장마 무더위와 8월 불볕더위도 예년보다 더 기승을 부릴 것으로 기상청은 내다봤다. 기상청 박정규 기후예측과장은 “6월 초 일시적으로 기온이 잠깐 내려가겠지만, 전반적으론 한여름 더위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는 이렇다. 먼저 여름 같은 5월 봄더위는 중국내륙과 몽골쪽의 뜨겁고 건조한 대륙성기단의 영향 때문이다. 한반도 기후는 여름 6개월은 북태평양기단의, 겨울 6개월은 대륙성기단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올 겨울과 봄 사이 중국내륙과 몽골에서 발달한 대륙성기단은 매우 고온건조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반도엔 지금 그 뜨겁고 메마른 대륙성고기압이 강하게 몰아치고 있다는 것이다. 대륙성고기압의 영향이 약해질 6월 이후로도 한여름 더위는 가시지 않는다. 이번엔 고온다습한 북태평양기단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기상청은 “이 기단이 대륙성기단이나 한랭다습한 오호츠크해기단 등과 부딪쳐 금년엔 강한 장마전선이 형성될 것”이라며 “장마 속 무더위가 6월부터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결국 이번 더위는 5월 봄더위에서 시작해 6월의 무더위를 거쳐 7월 중순 이후 불볕더위까지, 주자를 바꿔가며 쉼없이 쭈욱 계속되리라는 전망이다. 박 과장은 “무척 덥고 짜증나는 여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과 더위의 함수관계

이처럼 뜨겁고 긴 여름은, 그러나 올해에만 나타난 특이현상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박 과장은 “기후는 60년 주기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올해는 기온상승기조의 극한에 다다른 느낌”이라고 말했다. 세계 기온은 70년대 중반 이래 급상승해, 한국만 해도 연평균기온이 지난 30년간 평균 1.6도가 높아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60년대까지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한강은 썰매타고 팽이치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강 결빙은 신문과 방송의 뉴스거리가 될 만큼 희귀한 일이 됐다. 기온은 90년대 이후 한층 가파르게 올라가는 추세다. 박 과장은 “중국의 대륙성기단이 90년대 들면서 한층 고온건조해져 중국에선 가뭄이 심각해졌고, 우리나라도 덩달아 따뜻한 겨울과 뜨거운 봄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고온화 추이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선 찬반논란이 많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앞으로 100년 안에 지구온도가 최소 1도에서 최대 3.5도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이른바 ‘지구온난화’ 가설에 따른 것이다. 지속적인 삼림파괴와 화력원료의 사용 증가 등으로 이산화탄소와 메탄 및 이산화질소와 같은 온실기체가 증가함에 따라 전 지구적으로 기온이 올라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국가간기후변화협의회(IPCC)는 지난 95년 보고서에서 온실기체의 지속적인 증가에 따라 평균기온 상승은 물론 해수면도 2100년까지 대략 15∼95cm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그린하우스위원회는 뉴질랜드 빙하 크기가 19세기 중반 이래 30%가량이나 줄어들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물론 이런 상승경향은 일직선으로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며, 30년마다 상승과 하강곡선을 그리며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가령 최근 30년 동안의 기온상승은 1.6도 정도지만, 최근 100년으로 기간을 늘릴 경우 상승 정도는 0.6도로 뚝 떨어진다. 전반적인 상승기조 속에서도 올라갔다 내려가는 변화곡선이 되풀이됐음을 알 수 있다.

아직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우려를 잠시 접는다 해도, 우리네 삶의 환경이 갈수록 더위와 한데 묶이게 될 것임을 말해주는 구체적 징후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밀집한 거주지, 도시의 여름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 ‘도시열섬효과’ 현상 탓이다.

도시열섬효과는 도시화에 따른 녹지감소와 도로 포장률의 증가, 도시하천의 변화에 스모그와 먼지, 자동차 배기가스와 냉·난방 등의 현상이 얽혀 도시의 기온이 국지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을 말한다. 전반적인 지구온난화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사람들의 여름나기를 규정하는 주요한 기상현상으로 부각되고 있다. 도시열섬효과는 이른바 ‘열대야’현상에서 가장 쉽게 드러난다. 하루 중 가장 낮은 기온이 25도를 웃도는 후덥지근한 열대의 밤은 주로 대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출몰하고 있다. 1971∼2000년 사이 열대야의 평균일수는 서울 6.1일, 대구 8.8일, 부산 10.2일 등이었다. 기상청 기상연구소 오성남 박사팀의 지난 99년 연구는 도시열섬효과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입증해냈다. 오 박사 팀은 서울의 24개 지점과 서울근교 5개 지점에 자동기상관측장치를 설치해 계절 및 시간별로 온도를 분석했다. 녹지로 덮인 서울 북동부 외곽지역과 비교할 때 영등포와 마포, 강남 등 도심의 최저기온은 많게는 7도까지 더 높았다. 수백만 시민을 잠 못 이루게 한 열대야라는 불청객이 다름아닌 열섬효과의 부산물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영등포, 도시열섬효과 가장 커

열섬효과는 빽빽한 건물입지와 녹지 부족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같은 도심이라도 산이 자리잡고 있는 종로나 성북 등은 열섬효과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적었다. 오 박사는 “산과 녹지가 거의 없는 영등포에서 도심열섬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난 반면, 북한산과 남산 주변 도심지는 높은 도로 포장률에도 불구하고 산바람 덕택에 자연스레 열기를 배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또한 도심의 열기를 실어나르는 거대한 바람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강남과 마포 등은 병풍처럼 세워진 고층아파트들이 한강의 바람길을 가로막아 열섬효과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형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선 강남은 건물 냉·난방 때 발생하는 인공열에 의한 열섬효과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오 박사는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나 미국, 뉴욕 등에선 도시계획 단계부터 넓은 녹지와 가로수를 조성하고 산과 강 등의 바람길을 고려해 건물을 세우도록 하고 있지만, 우리 도시들은 자연적으로 갖춰진 산과 강의 바람길조차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뜨겁고도 긴 여름, 에어컨 인공바람 아래로 숨어들기에 앞서 자연의 바람길을 되살리고 트는 것이 조금은 더 세상을 시원하게 만드는 방법일 것도 같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