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보수 납신다, 개혁 물렀거라민주당 개혁정책에 비판 일자 ‘보수궐기론’ 등장… 한나라당 내 보수세력 ‘물 만난 고기’
보수 기득권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집권 민주당이 4·26 지방보궐선거에서 한석도 건지지 못하는 등 여당의 개혁정책에 대한 민심이반 현상이 뚜렷해지는데다, DJ정권이 집권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는 상황, 여기에 보수적인 부시 정부의 등장에 따른 남북관계 경색 등이 맞물리면서 보수세력들의 결집이 가시화하고 있다.
보수언론 지원사격
보수세력들의 목소리가 집약된 것은 자유기업원 민병균 원장이 지난 5월4일 언론계 등 각계에 이메일로 보낸 ‘시장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 민 원장은 이 글에서 “지금 정부는 참여연대, 전교조, 민노총 등과 합세하여 한국사회를 국정파탄의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른바 ‘민중’의 입장에서는 이런 것이 개혁일는지 몰라도 이는 분명 자본주의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 변혁적인 것이다. 이러다가는 경제가 파탄나고 정치가 정지되며 도덕이 소멸할 것이 분명하다. 어찌하다가 우리가 좌경화의 길로 들어섰는가. 지금이라도 국정파탄을 규탄하는 국민궐기가 필요하다. 좌익이 더이상 국정을 농단치 못하게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우익궐기론’인 셈이다. 정치권도 때맞춰 보수적 색채가 담긴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13일 재벌정책과 관련해 사외이사제도 강화, 집단소송제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 결합재무제표의 내실화 등을 전제로 출자총액제한 폐지, 부채비율 제한 자율화, 30대 그룹 지정제도의 축소, 지주회사 요건 완화 등 재벌들의 규제완화 요구를 반영한 정책을 발표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대북정책, 교육정책 등 각종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왔으나 재벌정책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했었다. 그러나 재벌규제 완화정책 발표를 시발점으로 교육, 건강보험과 관련해 사보험제도 도입을 허용하고, 사학재단의 자율적 학생선발권 및 등록금 책정권 보장 등 본격적으로 보수성이 뚜렷한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한나라당 내 보수 드라이브를 거는 세력들의 움직임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보수파인 김용갑 의원은 5월17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이회창 총재의 ‘개혁적 보수론’을 겨냥해 “이제 개혁이라는 소리만 해도 표가 떨어진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마당에 총재가 왜 굳이 보수 앞에 개혁을 내세워야 하는지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다”며 “이념적 안정성을 갖춘 보수정당임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고 ‘보수강화’를 주장했다. 김 의원은 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우리 보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눈치를 봐왔지만 이제 목소리를 낸다. 보수세력이 목소리를 낼 여지가 넓어진 만큼 곧 뜻을 함께하는 의원 30여명을 모아 확실한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이런 흐름에 보수언론도 빠지지 않았다. 자유기업원 민병균 원장의 글이 발표되자 보수언론은 지원사격에 나섰다. “민 원장의 성명은 그동안 우리 사회 저류에서 꾸준히 논란돼오던 국정기조의 이념적 성향문제를 최초로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 사회의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조선일보 5월9일치 사설) “이 시기에 왜 그런 주장이 나와야만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가 주장하는 대로 기업활동을 방해하는 좌익의 공격이 존재하는 것인지 또 경영자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정부가 반시장적 철학을 갖고 있는지는 당사자를 포함해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따져볼 일이다.”(동아일보 5월8일치 사설) 색깔논쟁을 부각시켜 보수세력의 궐기를 부추기고 나선 것이다.
여당도 ‘개혁마무리론’ 등장
이른바 보수세력이 ‘우익 총궐기론’을 소리높여 외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88년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원 교수가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이 고조되자 ‘우익은 죽었는가. 우익이여 궐기하라’를 외치며 보수세력의 결집을 주장했었다. 94년에는 사망한 김일성 전 북한주석의 조문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격심한 이념논쟁을 겪은 데 이어 박홍 신부가 ‘민주화세력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주장하며 진보진영을 좌익세력으로 몰아붙였다. DJ정권 들어서도 지난해 11월 김용갑 의원이 민주당을 겨냥해 ‘노동당 2중대’라고 주장하는 등 색깔논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럼 최근 상황은 어떻게 봐야 할까.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말한다. “우리 사회는 크게 범개혁세력과 개혁저항세력이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또 범개혁세력은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 진보적 개혁세력으로 나뉜다. DJ 정부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해왔다. 그러나 DJ 정부의 개혁은 신자유주의의 노골화로 나타난데다 최근 대우자동차 노조에 대한 경찰폭력 등으로 진보적 개혁세력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 최근 범개혁세력 내부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자 이 틈새를 보수세력이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DJ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되면서 진보세력과 노동세력의 이반현상이 분명해지자 보수세력이 내년 권력교체기를 겨냥해 그동안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공세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현 상황을 1918년 독일의 1차대전 패망 이후부터 히틀러 집권 이전까지 존속했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정국과 비교했다. “민주세력이 집권했지만 자본에 포위된 상황에서 집권했다. 그래서 기층세력의 기반도 취약하고 스스로 나갈 힘도 없다. 기득권세력과 일부 손잡고 타개책을 모색하지만 좌우에서 포위된 상황이다.” 김 교수는 이런 상황에 덧붙여서 보수세력이 국내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의 반DJ정서를 등에 업고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보수적 분위기는 여당 내에서도 개혁 마무리론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여권은 일부에서 주장한 개혁 마무리론이 개혁포기로 비쳐지자, 청와대가 직접 ‘개혁지속’을 강조하며 교통정리에 나서 일단 봉합한 상태다. 그러나 개혁 마무리론이 제기된 상황이 변화되지 않은 실정에서는, 미봉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게 당 안팎의 시각이다. 실제 당내 개혁적인 소장파 의원들은 이런 보수화 흐름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 수도권의 한 초선의원은 “정권이 후반기로 들어가면서 힘도 서서히 빠져가고 또 그동안 개혁정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혼란만 일으키고 이런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보수세력들이 집결하는 것 같다”며 “5월말에 시민단체쪽 사람들과 만나 의정활동도 뒤돌아보고 향후 과제들도 점검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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