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섹션 : 특집 | 등록 2001.05.02(수) 제3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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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폭력에 취해 남성에 갇혔다 영화 <친구>를 말하는 여성들의 시각… 억눌린 여성 캐릭터 답습해 온전한 소통 거부
영화 <친구>는 “추억의 섬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그 가족들에게 바친다”로 시작된다. 의리가 유일한 삶의 원리로 작동하는 그 섬의 주인은 남자들이다. 그리고 그 섬에는 여자들이 ‘없다’. <친구>는 단 몇 장면에만 여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친구>를 상영하는 영화관 앞에는 여성들이 늘어서 있다. <친구>의 홍보대행사 ‘영화방’에 따르면, 관객의 절반가량이 여성이라고 한다. 무려 200만명 이상의 여성들이 이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친구>가 남성영화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그만큼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들이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뜻밖의 현상이다.
남자들 의리의 수단으로 전락한 여성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 캐릭터는 진숙이다. 준석, 상택, 동수, 중호 네명의 친구들은 여고 축제에서 진숙을 만난다. 7인조 여성 보컬그룹 ‘레인보우’의 리드싱어인 진숙을 보는 순간, 중호를 제외한 세명은 한꺼번에 ‘뻑간다’. 이 순간 카메라는 진숙을 응시하는 준석, 상택, 동수를 번갈아 훑는다. 이들의 인연은 며칠 뒤 이어진다. 준석의 방에서 네명의 친구들은 진숙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준석은 상택에게 진숙을 ‘건넨다’. 하지만 이미 준석의 여자친구이면서도 상택에게 건네지는 진숙의 심리적 갈등은 전혀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는다. 그저 상택을 보고 “너 순진하다”며 첫 키스를 선사하는 발칙한 10대 소녀로 그려질 뿐이다. 준석과 상택 사이에서 갈등할 만한 진숙의 고민은 이 영화의 관심 밖이다. 여성 캐릭터 진숙은 생명력을 잃은 채 남자들 사이의 결속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몇해가 흐른 뒤 진숙은 준석의 아내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어머니가 죽은 뒤 마약중독자가 된 준석을 대학생이 된 상택과 중호가 찾아온다.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느새 준석의 아내가 된 진숙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들 앞에서 준석은 느닷없이 “저년이 빠구리를 억수로 잘해가 내가 댈꼬 산다”는 폭언을 퍼붓는다. 하지만 진숙은 악다구니 쓰지 않는다. 발칙한 10대 소녀 진숙은 어느덧 순종적인 아내로 변한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하는 진숙의 뒤통수에 “저 씨발년이 째려봐? 보지를 확 찢어뿔라”와 같은 상스러운 말들이 꽂힌다. 남자친구들의 방문을 더없이 반가워하던 준석의 얼굴이 여성을 향할 때는 폭력적인 남성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여성을 전형적으로 성적대상화하는 이런 장면들은 어머니, 누이를 제외한 여성들에 대한 모멸을 정당화하는 듯 보인다. 영화평론가 김소희씨는 “한국영화는 항상 여성을 남성적 시선에서 봐왔다”면서 “여성을 매혹적이면서 위협적인 요부 아니면, 한없이 무기력하고 순종적인 아내로 그려온 한국영화의 관습을 <친구>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비하된 여성 캐릭터는 미화된 남성 캐릭터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은 의리의 소중함에 줄곧 압도된다. 이처럼 영화는 여성 이미지를 왜곡하지만 뜻밖에 <친구>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여성관객의 반응은 엇갈린다. “여자가 봐도 너무 재미있는 영화!”(또보까) “동건 오빠 넘 귀엽다. 사투리 쓰는 게.”(깜순이) 인터넷영화사이트 ‘무비스트’(www.movist.co.kr)에 올라온 영화평들이다. 영화를 본 상당수 여성들은 “재미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들이 느끼는 재미는 “멋있는 동건 오빠”라든가 “끝내주는 연기를 한 배우 유오성”으로 요약된다. 영화의 주제인 남성적 의리에는 깊은 공감을 못하거나 관심 밖이지만 영화의 볼거리로서 배우의 연기력만은 높이 살 만하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많은 남성들처럼 <친구>를 의미심장한 메시지의 영화로 해석하지 않는다. 다른 상업영화를 볼 때와 비슷하게 오락거리로 <친구>를 본 셈이다. 대개 젊은 여성관객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
“여성의 자의식마저 마비시켰다”
이에 비해 64년생으로 나오는 <친구>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들은 남성적 세계와 좀더 심리적으로 가깝다. 단순히 재미를 느끼는 것을 넘어 남성들의 의리에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4월26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친구>를 보고 나온 정길순(38·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씨는 “죽을 때까지 서로를 믿어주는 남자들의 끈끈한 의리가 눈물겹다”고 이야기한다.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정씨의 친구들도 “역시 화끈하고 의리있는 남자가 최고”, “여자들도 저런 의리를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한마디씩 거든다. 이처럼 여성들이 자신의 체험 바깥에 있는 이 영화에 대해 공감하는 이유는 뭘까.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여성들이 이 영화에 대해 공감하는 심리적 원형은 ‘미녀와 야수’”라며 “거칠고 강한 남성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정으로 포장된 남성 판타지가 여성의 자의식마저 마비시킬 만큼 위력적이란 지적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은 오히려 그 환상을 증폭시킨다. 물론 자신의 체험과는 상이하고 폭력성 짙은 영화 <친구>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여성도 적지 않다. 독립영화 스탭으로 일하는 강희진(27)씨는 “우정으로 미화되고 있지만 영화의 저변에 깔린 정서는 굉장히 폭력적”이라며 “소독차, 문방구 같은 아련한 회상을 불러일으키는 사실적 장치들로 이런 폭력성을 무마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강씨의 말처럼 <친구>에서 폭력은 남성적 의리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인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며 네 친구의 우정은 점점 견고해져 간다. 준석의 지시에 따라, 동수가 칼에 찔려 죽는 장면은 폭력성이 비장미로 포장된 대표적인 사례다. 세상이 갈라놓은 우정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킬러는 회칼을 서른번 이상 동수의 몸에 ‘담근다’. 이런 과도한 폭력성은 “남자다움을 빙자한 폭력, 더티함, 추악한 터프함”(무비스트 게시판)이란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 영화를 본 여성관객 중 일부는 인터넷에 그 폭력성을 지적하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감상평은 영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로 공격받기 일쑤다. <친구> 신드롬은 일부 여성들에게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이 영화를 봤다는 김은정(30·경기도 군포시)씨는 “이런 영화가 수백만명의 관객을 모은다는 것은 아직 한국사회가 폭력마저 미화하는 남성중심주의 사회라는 사실의 방증”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친구>가 남성영화라는 전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폭력성이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폭력성은 남성적 의리와 겹쳐지며 미화된다.
왜 남성의 우정에 열광해야 하는가
남성영화를 표방한 영화 <친구>에 여성이 적게 등장한다고 비판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의 절반인 여성이 최소한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는 영화를 바라는 건 당연한 요구가 아닐까. <안토니아스 라인>이나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같은 여성영화들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에는 악역도 있고 선한 인물도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여성과 ‘관계’를 만들어나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친구>에는 그런 소통의 가능성이 닫혀 있다. 친구를 위해서라면 폭력도 살인도 눈감아줄 수 있다는 남성적 우정에 환호하는 최근 <친구> 신드롬 현상의 한축은 여성이다. 이 사회는 여성마저 남성적인 의리를 선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들의 우정을 다룬 영화가 수백만명을 동원하며 신드롬을 일으킬 날이 과연 올까.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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