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1년05월22일 제360호 

개혁 실패, 보수가 파고든 틈새

느슨한 재벌개혁, 흐지부지된 인권법, 경제정의의 붕괴 등이 보수의 궐기를 자초



우리 사회가 완연히 반개혁의 기류 속에 빨려드는 조짐이다. 이번의 반동세는 여권 핵심부에서 촉발된 탓에 되돌리기 어려운 게 특징이다. 국민들의 개혁피로증을 이유로 개혁마무리론이 득세한 민주당 최고위원회 회의가 시발점이었다. 정권 실세들의 개혁피곤증을 감지한 기득권세력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당장 우익총궐기를 호소하는 자유기업원 원장 명의의 시대착오적인 격문이 나돌았다. 전경련과 ‘우익’ 학자들은 벌떼같이 재벌개혁 기타 개혁중단 요구를 내놓으며 화답했다. 조선, 중앙, 동아를 위시한 보수언론도 거들었다. 청와대가 진화작업을 서둘러 겉으로는 불길이 잡혔지만 이미 천기가 누설된 탓에 향후 개혁은 불귀의 객으로 떠돌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십년 동안 간신히 대세를 형성해온 개혁이 자칫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한 것이다.

누구를 위한 구조조정이었나


사진/ 한나라당은 5월9일 김만제 정책위의장 취임 이후 본격적으로 보수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이용호 기자)


원인과 경위에 대한 진단은 분분하지만, 이 시점에서 누구도 부인 못할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지난 3년여간 그토록 외쳐온 경제구조조정의 산물이 고작 국제금융자본에 대한 종속,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급증, 그리고 분배구조의 악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런 체감현상을 ‘개혁성과’로 반길 중산층과 서민은 없다. 보수반동의 본격적인 움직임은 이런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외국자본보다는 그래도 국내자본이 낫고, 소수에게 억대연봉을 주기보다는 봉급이 적더라도 다수에게 안정된 일거리를 주는 게 낫다는 게 절대다수의 건전한 상식이다. 어떤 이론과 변명으로 둘러대도 이런 상식에 반하는 결과가 개혁일 수는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김대중 정부마저 개혁에 실패한 정권으로 규정될 것이고 민주화와 개혁은 더이상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빠졌으며, 코앞까지 다가온 보수반동의 시대를 피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평범한 국민의 기대와 상식에 충실해야 한다. 애써 재벌개혁을 했다지만 체감할 길이 없다. 빅딜은 실패로 돌아갔고 계열사는 늘어났다. 4대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날로 심해진다. 사외이사니 소액주주니 떠들지만 정몽헌도, 이재용도, 최태원도 건재하다. 무엇이 다르냐는 항변이 절로 나온다. 재벌개혁의 초점은 총수 일가와 계열사들의 반시장적 특권을 배제하는 데 있다. 총수일가가 누려온 특권 중 압권은 계열사들의 주식이나 재산을 헐값에 넘겨받아 경영권을 세습하는 것이었다. 회사 재산을 총수 자녀에게 실질 증여하는 행위는 총수 이하 경영진의 명백한 배임범죄다. 따라서 재벌개혁은 삼성 이재용 사안을 엄히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다. 나아가서 30대 재벌들의 유사한 배임증여 및 편법상속 실태를 조사해서 확실하게 바로잡고 재발방지책을 세웠다면 개혁이 체감되었을 것이다. 단언하지만 지금도 이것만 붙잡고 늘어지면 재벌은 절대 큰소리치지 못한다.

이른바 인권법만 해도 그렇다. 검찰과 경찰 등 법집행기관에 대한 불신이 워낙 높기 때문에 국민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는 개혁 호재였다. 수사기관이나 교도소 등 국가기관 종사자들은 웬만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처벌을 두려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려왔다. 검찰과 경찰, 법원 등이 한통속으로 이들의 인권침해를 눈감아준 탓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신설하여 이런 잘못된 현상을 개혁하겠다는 것이 인권법의 제정취지였다. 잘만 하면 개혁 중의 개혁이었다. 그런데 이 작업을 검찰업무를 관장해온 법무부에 맡겼다. 그 결과 인권단체와 언론으로부터 3년간 동네북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지난 4월30일 가까스로 입법에 성공했지만 갈채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수사종결 사안에 대한 조사금지, 서면조사 우선주의, 허위진술 불처벌 등으로 말미암아 검경 기타 권력기관의 특권을 치기에는 너무 많은 허점과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끝없는 심화


사진/ 이번의 반동세는 개혁마무리론이 득세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가 시발점이었다.(이용호 기자)


개혁의 체감과 확산을 위해서는 노동현장, 곧 직장 내부가 변하는 게 제일이다. 사용자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을 어겨도 상응하는 제재를 받지 않는 특권에 길들여져왔다. 예컨대 부당하게 정리해고를 감행하고 마구잡이로 비정규직으로 전환해도 끄떡없고, 노조결성을 방해하고 노조파괴를 획책해도 건재했다. 따라서 근로감독관을 대폭 증원하고 경찰력이 노사관계를 대신해준 잘못된 관행을 혁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무원노조문제만 해도 국민정서상 안 된다고 변명할 것이 아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최근 지적한 대로 적어도 개혁정부의 역할은 잘못된 국민정서에 편승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비정규직 비율을 자랑한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 공세 아래서 결국 취업근로자의 60%가 고용불안과 임금차별에 마냥 떨게 된 데 대해 김대중 정부는 무서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개혁의 가장 확실한 성과는 경제정의의 실현으로 나타난다. 경제정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세제개혁과 소유구조개혁이다. 세제상 특권은 재벌일가를 위시한 자본가들, 고소득 전문직, 그리고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누려왔다. 그렇다면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강화하고 재산보유세와 상속증여세제를 대폭 증액하며 개업 전문직과 자영업자의 과세형평성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국민연금 확대적용 파동을 통해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문제가 불거졌지만, 이마저 흐지부지된 상태다. 우리 사회의 모든 통계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알려준다. 경제정의에 역행하는 것은 반개혁이지 개혁일 수 없다. 경제정의의 토대는 결국 소유구조다. IMF가 강제한 과도한 경제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상장주식에 대한 외국인소유지분이 30%를 넘는다. 이들은 투자수익율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공기업 민영화 정책도 소유집중이 심화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종업원, 고객, 대리점, 부품업체, 지역주민 등 기업에 대해 좀더 가까이 있는 이해관계인들의 주식소유를 정책적, 제도적으로 진작시킬 획기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하는데 ‘개혁정부’는 무관심하다.

교육분야에서는 서울대학교의 특권과 사학설립자의 특권이 가장 큰 문제다. 교육개혁은 이것을 놓아둔 채 늙은 교사들의 작은 특권을 문제삼아 정년을 단축해서 딜레마를 자초했다. 본격적인 정치개혁과 검찰개혁은 여차하면 개혁의 칼끝이 제 목을 향하고 제 수족을 내리칠 것이 두려워 착수조차 못했다. 그 밖에도 핵심 개혁과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무엇보다도 공포와 억지에 기반해서 불필요한 금기를 부과해온 국가보안법을 개폐하고 실효성 있는 부패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렇다. 너무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한 것도,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것도, 치밀한 전략이 결여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치개혁과 검찰개혁을 외면하고 언론개혁을 실기했으며 재벌개혁과 세제개혁에 미흡하고 노동개혁과 소유개혁에 실패함으로써 개혁열기를 창출하고 개혁기반을 강화하지 못한 게 결정적 오류다. 개혁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비관은 금물이다. 국민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고강도개혁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특권지배사회로 파악하고 있다. 진정한 개혁을 원하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다만 개혁의 제단에 내 목부터 내놓을 굳은 각오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기대와 상식으로 돌아가서 핵심 특권부터 내리쳐야 한다. 특히 국내적 특권을 방치한 채로는 국제금융자본의 특권과 미국의 특권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국민통합을 이룰 길이 없다. 말할 것도 없이 소수의 특권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과 평화에 암적 존재다. 너나할 것 없이 자신의 특권을 돌아보고 내려놓는 적극적인 자세로 진정한 개혁을 요구할 때다.

곽노현/ 방송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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