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1년05월02일 제357호 

친구를 감싸는 ‘불온한 의리’

영화 <친구>의 광기로 범벅된 우정에 환호하는 우리 사회의 집단최면



“내가 니 시다바리가?”, “쪽팔리서”.

요즘 서울 한복판은 억양 강한 부산 사투리 유행어로 도배되고 있다. 서울뿐 아니라 광주에서도, 대전에서도 부산 사투리가 갑자기 지역 사투리만큼이나 친숙해졌다. 영화 <친구> 열풍 때문이다. 지난 3월31일 개봉된 <친구>는 불과 23일 만에 전국 관객 400만명을 돌파했다. 이것은 지난해 <공동경비구역 JSA>가 같은 수의 관객을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을 보름이나 단축시킨 기록이다. 이 추세라면 <쉬리>(578만명)와 <공동경비구역 JSA>(580만명)가 세운 관객동원 기록을 훨씬 앞지르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흥행기록을 쓸 가능성도 크다.

충무로 흥행공식 뒤집은 사회적 신드롬

이미 대한민국 성인 다섯 가운데 하나가 등장인물의 대사를 따라할 준비가 된 <친구>의 인기는 이제 대박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이 영화는 개봉 전 인터넷을 통한 일부 장면 공개와 시사회의 좋은 입소문에 힘입어 어느 정도 성공이 예견됐던 작품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작영화인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기록에 도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대규모화되는 영화제작의 흐름에 비한다면 초라하기조차 한 제작규모(순제작비 18억원, 마케팅비 10억원)와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30대 이상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와 부산영화라는 강한 지역성으로 여느 영화보다 겨냥하는 관객층이 좁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대작영화가 흥행의 지형도를 만드는 할리우드와 비슷해진 최근 충무로의 흥행공식을 완전히 뒤엎었다.



물론 <친구>의 성공요인에서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와 감각적인 영상미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관객의 탄성에는 볼거리에 대한 즐거움보다 메시지에 대한 감동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친구> 사이트의 게시판에는 “친구란 영화, 정말 친구의 의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부산촌놈), “나에게 친구는 누구였었나? 오래두고 가까이 한 그 사람은 누구였나 생각했었다”(까만 악마) 등의 정색을 한 우정론이 쏟아지고 있다. 이처럼 이 영화가 신드롬이 되는 이유는 관객석을 메우는 머릿수가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뒤 소주 한잔을 놓고 펼치는, 까까머리 시절 나의 곤경을 기꺼이 막아주던 그녀석에 대한 열띤 이야기에 있다.

재미있는 것은 <친구>가 제시한 순수한 우정이 회고와 반성을 넘어 관객에게 집단최면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준석이 동수의 살인을 교사하는 복선이 등장하고,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준석이가 시켰다”고 못을 박았지만 여전히 게시판에는 “조직 내부의 쿠데타였다”는 등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해 준석이를 혐의에서 벗겨보려는 다양한 변론들이 등장한다. “5학년 때, 내 입술이 빨간 거는 우리 아버지가 죽은 사람 간을 많이 묵이서 그렇다고 놀린” 중학생 멍길이와 한판 붙은 우정의 현신(現身) 준석이가 우정을 배신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관객의 반응이다. 영화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오독할 만큼 <친구>의 “우리는 친구 아이가”론이 관객에게 우정의 정답안, 또는 늙어버린 현실에서 불가능해진 우정의 이데아로 읽히는 것이다.

한국적 우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진/ <친구>는 학창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홍보전략으로 관객동원에 성공했다. 주말마다 서울 시내 중심 극장가에는 70년대 교복을 입은 홍보맨들이 모여 관객 이벤트를 벌인다.(이용호 기자)


그러나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퇴학도 불사한 패싸움을 하고,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른 친구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우정은 기실 남성적이고 폭력적인 우정이다. 어쩌면 ‘친구’라는 단어가 프렌드라는 영어단어와 상치되기 힘들듯, 지극히 한국(남성)적인 우정이나 의리일 수도 있다.

물론 우정은 죄가 없다. 문학평론가 고미숙씨는 “네덜란드의 근세 철학자 스피노자가 우정의 코뮌주의라는 걸 주장했고, 조선시대 실학자 박지원도 우정을 강조했듯이 우정이란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고 우정 옹호론을 펴면서도 한국적 우정은 일반적 우정론과 거리를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에서 우정은 고정되고, 형이상학적 규정성을 두기 때문에 오히려 말 그대로의 우정과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선생과 학생이, 부모와 자식이 허심탄회한 우정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종적관계가 횡적인 인간관계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단 조폭사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기본적으로 형님아우 집단이다. 만약 미팅 상대가 아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첫 질문으로 나비를 좋아하는가, 겨울산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식의 무안한 반응을 얻기 십상이다.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 첫장처럼 우리의 인사말 수순은 정해져 있다. 나이가 몇이냐, 어느 학교 나왔냐(다니냐), 고향은 어디냐. 이 세 가지 질문의 변주에 따라 복잡다단한 위계가 정해지는 것으로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가 결정된다. 연배와 출신성분에 따라 친구의 여부가 결정되는 한국사회에서의 우정은 그 내부에서도 일종의 위계질서를 가진다. <친구>에서 배신하기 직전까지 준석의 시다바리 역할에 충실해야 했던 동수와 준석의 관계처럼 말이다. 여자친구까지 선뜻 내주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양아치로부터 끊임없이 상택을 보호하며 존경하는 준석과 상택 역시 온전히 횡적인 관계라고 보기는 힘들다. 친구를 위해 희생하면서도 그 안에 위계가 깔려 있는 모습은 차라리 가부장적 가족과 흡사하다. 정신과 의사 김현수씨는 “한국 남성들에게 친구관계란 유사가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관객이 ‘피보다 진한 우정’에 감동하는 것은 “가족, 직장 할 것 없이 느슨해지는 인간적 유대 속에서 가족의 확장을 통해 강렬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그리워하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피보다 진한 우정 vs 피도 눈물도 없는 의리


사진/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는 남성들의 의리를 그린 <친구>는 한국사회의 집단주의적 정서를 자극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이용호 기자)


<친구>는 유난히 가슴에 꽂히는 대사가 많은 영화다. 그중 하나는 준석과 상택이 한번씩 던지는 “친구끼리 미안한 게 어딨노?”다. 이 말은 영화에서 “우리는 친구 아이가”라는 대사와 함께 반복되는 말이고 많은 관객에게 ‘우정’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준 영화의 화두이기도 하다. 준석이가 여러 번 내뱉는 “우리는 친구 아이가”는 한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던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영남 사람들을 하나의 울타리로 묶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였던 “우리가 남이가”와 네명의 검정교복 까까머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포스터 위에 써 있는 카피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는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의견이 아닌 의리로 뭉치는 집단주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대전대 권혁범 교수(정치학)는 “친구를 위해 죽거나 친구라면 살인까지도 감싸는 것을 진정한 의리처럼 환호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각성없는 집단주의를 보여주는 예”라고 비판했다. 권씨에 의하면 개인적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면서 형성된 “미성숙한 자아”는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으면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듯 집단주의 정서에 기댄 우정은 결국 폭력마저도 ‘의리’로 순치시키게 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친구>신드롬이 결국 “깡패들의 의리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폭력과 죽음과 희생의 은폐에 눈감는 집단적 동의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휴머니즘과 바꿔치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깡패들의 유혹에 대한 대중적인 굴복”이라고 신랄하게 평을 했다. 그 의리는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고 (남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작동하지 않는 공적 커뮤니케이션 반영



문학평론가 이성욱씨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이기적 집단주의의 얼굴로 드러나는 의리를 최고의 가치로 높이는 것은 “믿을 것은 친구밖에 없다는 견고한 체험적 믿음 때문”이라고 평했다. “공적 시스템이 한 개인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믿지 못하고 사적 관계에만 기댄다”는 것이다. 이는 주류사회에서 일탈한 깡패들한테 세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수없이 부딪히는 고단한 문제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의 한 30대 관객은 “직장에서 구성원들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으니 문제가 생겨도 공적인 장에서 풀 수 없고 술자리에서 사적인 관계를 엮어가며 풀어야 한다”고 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오작동을 비판했다. 이어 “공조직에서도 고향이나 출신학교 같은 사적인 관계들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결국 동문회나 하다못해 조기축구회라도 들어가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화평론가 이효인씨는 우리 사회의 퇴행적 징후를 반영한다는 면에서 남성영화인 <친구>의 열기는 일견 대척점에 놓여 있는 90년대 멜로드라마 붐과 다르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믿음’이나 ‘의리’ 따위는 사랑하려는 본능이기도 하지만 끼리끼리 울타리를 치고 보호받으려는 본능”이라고 지적한 이씨는 “막혀 있거나 예측불가능한 사회에서 지극히 비현실적인 허상이 신화의 탈을 쓰듯이, <친구>가 그리는 목숨 바치는 우정에 대한 선망은 모든 관계가 탈각된 채 둘만의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부르짖는 멜로드라마의 집단최면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밀고 당겨주는 연줄 만능주의의 단면

그러나 비틀어 생각해보면 “친구끼리 미안한 거 없다”는 구호는 소시민 남성들의 판타지만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현실이 된다. 우리는 자주 신문에서 “함께 있을 때 두렵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옷로비 사건, 군면제 비리, 대기업 탈세 등으로 등장했다가 유유히 집으로 돌아간 ㄱ씨와 ㄴ씨가 그들이다. 기득권이라는 “피보다 진한 연줄”로 묶인 그들은 “우리는 친구 아이가”하며 밀어주고 당겨주는 의리의 사내들이다. 영화 <친구>를 보며 외운 유오성의 멋진 대사를 따라하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목숨 바치는 의리에 매혹되는 나 자신이 의리로 뭉친 ‘그들’의 영원한 시다바리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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