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군과 일본군의 기묘한 일치

일본군 퇴역자의 죄의식을 추적한 노다 마사야키, 한국에서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을 만나다

“망각과 경제교류만으로는 타민족과의 신뢰를 쌓아갈 수 없다. 상처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사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노력만이 (새로운) 21세기 동아시아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베트남전쟁 진상규명 움직임은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인들의 중국인 학살 현장체험 조사보고서격인 <전쟁과 죄책>(한글판 제목 <전쟁과 인간>)에서 2차대전 뒤 고도성장을 거친 일본인들의 ‘행복증’(유포리아)이 끔찍했던 전쟁범죄의 은폐와 망각 위에 구축된 허상임을 고발한 교토여자대학 노다 마사야키 교수(비교문화정신의학)가 이번에는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베트남전 죄책 규명에 나선 한국’. 지난해 12월 한국을 찾은 노다 교수는 명동에서 열린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 재조명 토론회’를 참관한 뒤 3명의 참전군인들을 찾아나선다. 그 현장조사 결과를 이와나미(암파)서점 월간지 <세카이>(세계) 4월호에 12쪽짜리 보고서로 정리했다.

완전히 무시당한 유족들의 슬픔

토론회는 그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긴박감이 넘치는 토론을 듣고 흥미깊었던 것은 한국군인의 주장과 (일본 내) 일본 침략전쟁 부인세력의 주장간의 기묘한 일치였다.” 채명신 전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민간인을 보호하려 한 군대는 역사상 우리뿐이었다. 우리는 베트남인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 모내기도 해주었다. 집을 세우고 아이들을 위한 파티도 열었다. 6명의 베트콩을 처형한 소대장을 사형시키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양심적인 군대였다.”

일본인인 그가 보기에 그런 유의 발언은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인프라를 정비했다고 강변하는 일본 보수파와 꼭같은 논리”였으며 거기에는 “‘우리’가 있을 뿐 관계를 맺을 타자가 없었고, 학살당한 베트남인들과 그 유족들의 슬픔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전쟁과 죄책>에서 그는 중국인들을 별다른 죄의식도 없이 대량학살한 일본군 퇴역자들의 끔찍한 증언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전쟁범죄자들 중 죄의식과 슬픔을 깨달은 자들만이 인간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채 사령관의 주장은 사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아침에 동굴 속에서 젊은 남자 21명을 찾아냈다. 무기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베트콩으로 간주하고 폭탄이 떨어진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였다.… 보고도 하지 않았다.”(67년 파월 해병대 중대장이었던 김씨)

“스물몇명의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을 15m 정도의 폭탄구덩이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까넣고 사격까지 했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녀가 울부짖고 있었다. 얼굴이 보였다. 총을 쏘았다.… 밤에 잠이 깨어 바깥을 보니 그 소녀가 서 있었다. 무표정했다. 눈을 부비면 사라졌다가 또다시 나타났다.” “몇십 차례나 마을사람들을 죽였던가. 5∼6명씩도 죽이고 2명도 죽였다. 얼마나 죽였는지 모르겠다.”(66년 파월. 해병대 ‘킬러5중대’ 대원 정씨)

“결국 머리를 쏘았다. 3m쯤에서 쏘았기 때문에 피보다는 허연 뇌가 튀었다. 아무 생각없이 돌아와 점심을 먹는데 소대장이 ‘옷갈아 입어’라고 말했다. 피가 튀어 옷에 묻었는데도 몰랐던 것이다.… 그날 저녁 보초가 ‘노파가 와서 울고 있다. 몇번이나 가라고 해도 가지 않는다’고 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가봤다. 자그마한 노파가 ‘한국군이 데려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움찔하며 ‘아침에 헬기로 수용소에 보냈다’고 하자 노파는 ‘오늘은 비 때문에 헬기가 날지 않는다’고 손짓몸짓으로 항변했다. 잠시 뒤 이번에는 나뭇잎에 싼 죽 같은 것을 들고 와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난처해서 일단 받긴 했지만 다른 곳에 버렸다. 노파가 다시 칠팔세 돼보이는 아이 2명을 데리고 와 쏟아지는 빗속에서 울고 있었다. 빈 그릇을 보여주자 노파는 신음하듯 울었다. 배고픈 아들이 죽을 남겨둘 리가 없는데 그 그릇에는 찌꺼기들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도 노파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가라’는 소리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계속 울고 서 있었다.”(66년 해병대 청룡여단 중포중대 제2소대원 김씨)

노다 교수가 만났을 때 정신적 긴장이 역력했던 정씨의 귀국 뒤 생활은 황폐했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으로 세월을 보냈다. “국가의 명령이었다”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던 중대장 김씨도 “(베트콩인지)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죽여서는 안 됐다”고 고백했다. 소대원 김씨는 슬피 울던 노파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 책임규명운동에 참가해 피해자 유족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면서 ‘죽은 자의 슬픔’을 비로소 깨달았다. 베트남에 가서 그때 죽인 남자의 무덤을 찾아 노파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로 가는 길

그들은 모두 ‘침입성 외상체험’을 가진 ‘전쟁후신경증 환자’들이었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10∼20년 사회문제가 됐던 베트남전쟁후신경증이 한국에서는 30년이 다 돼 가도록 은폐돼왔다. 같이 싸운 필리핀, 타이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회는 결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노다 교수는 동아시아 전역의 전쟁범죄를 밝혀내고 국가간 보상과는 별도로 피해자 개개인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 하며 앞으로 그 문제가 국가간 보상문제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내다본다. 그것 없이는 진정한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일본에서 “300만명의 자국(일본) 전몰자에 대한 (우선적인) 애도를 통해 아시아 2천만명의 피해자에게 사죄하자”는 논리의 <패전후론>을 펴내 화제가 됐던 문예평론가 가토 노리히로류의 주장을 공박한다. “그런 주장 어디에도 전쟁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전후 아시아인들의 실상에 대한 관심이 없다. 교육도 ‘전쟁은 비참하다’는 나태한 언설만 흘릴 뿐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대해, 그리고 그뒤 반세기에 걸친 분쟁에 대해서도 실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한승동 기자/ 한겨레 국제부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