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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육과정엔 물샐 틈도 없다? 교과서의 창의성 짓밟는 꽉 짜인 교육과정…단어와 예시문까지 제약, 교사의 재편성권 무시
서울 북서울중학교 이경옥 교사의 말은 현장 교사들이 나름대로의 연구를 통해 교과서를 재구성해 가르칠 때 드러나는 한계를 보여준다. 교육부는 지난해 교과서 이외의 도서는 수업중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51조를 삭제했다. 그러나 <우리말 우리글> 같은 ‘대안 교과서’를 정식 교과서로 쓸 수는 없다. 다만 보충학습자료로 쓸 수 있도록 허용했을 뿐이다.
대안교과서는 주교재 될 수 없나
교과서는 국가가 정한 교과목별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제작된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것만 제시하고 있을 뿐 교육과정에 근거하되 교과서 제작과정에서 얼마든지 융통성이나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육의 목표와 내용, 방법의 뼈대만 제시할 뿐 실제 집을 짓는 건 저작자나 출판사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꽉 짜인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규제하고 있어서 교육과정 재구성이나 독창성은 선언에 불과할 뿐 실제로 적용되지는 못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교육부가 지침으로 제시한 ‘집필상의 유의점’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데다 걸핏하면 내려오는 검정심의회의 수정지시 때문에, 독창성과 창의성을 발휘한 개성있는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애초 의지도 끝내 흐지부지되고 만다는 것이다. 수학 교과서의 경우 종류는 10여종에 이르지만 사실상 배열순서 등에서 한 교과서나 매한가지인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교과서를 둘러싼 문제의 핵심은 ‘교육과정’인 셈이다. 전교조 소속 정사열 교사는 “국정이 아닌 검정 교과서들이 다들 딱딱한 티를 못 벗는 이유는 교육과정 자체가 잘못된 탓이 크다”며 “교육과정부터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다. 교과서 쪽수는 한정돼 있는데 교육과정에서 제시된 필요한 내용은 다 담아야 검정심사에서 탈락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교과서가 지식요약형으로 획일화하고 잡다한 지식만 구겨넣고 마는 것이다. 특히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게 대부분 교훈적인 글이다보니 학생들이 생각하고 판단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된다. 정 교사는 “외국도 교육과정이 있긴 하지만 우리처럼 세세하게 규정하지는 않는다”며 “규제가 많으면 당연히 창의적인 교과서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어 교과서의 경우 기계프로그램을 돌려서 어휘를 제한하는가 하면 ‘How are you’ 같은 구체적인 예시문까지 제시된다. 그러다보니 집필자들은 집필상의 유의점과 교육과정 해설서에 나오는 이런 예시자료와 성취기준을 ‘안전한’ 모범으로 삼아 베끼기 일쑤고 이것이 재미없고 딱딱한 교과서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특정단원에 들어가는 단어와 예시문까지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글감의 좋고 나쁜 것을 떠나 필수단어를 끼워맞추기위해 급급해하는데 그치고 만다. 교육과정 개발작업에 현장 교사들도 참여하긴 하지만 대부분 몇몇 교수들을 중심으로 마련되는 게 현실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 조장희 사무국장은 “교육과정에서 제시되는 언어가 국어학 지식을 나열식으로 집약한 데 그칠 뿐 살아 있는 언어가 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재미있고 흥미로운 교과서를 만들려면 교육과정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교사 개개인이 교육과정을 조직하고 교과서를 재구성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만큼 여러 교사들이 모여서 교육과정을 아예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이를 위해 외국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아이들이 어떤 어휘를 쓰는지에 대한 어휘 기초조사도 벌이고 있다. 교육과정이라는 근본적인 틀 안에서 교과서를 고민해야 흥미있고 재미있는 교과서가 나올 수 있다는 인식은 교과서를 발간하는 출판사들도 마찬가지다. ㄱ출판사 관계자는 “교육과정 틀에 얽매이면 비슷한 교과서만 양산될 것”이라며 “교육과정의 문제점이 해결된 뒤라야 거기에 발맞춰 독창적이고 좋은 교과서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교육과정이 교과서에 끼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느끼는 교과는 아무래도 국사다.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근현대사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역사교사모임은 지나치게 상고사나 전근대사에 치중하는 현행 교육과정과 달리 근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새롭게 교육과정을 짜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역사교사모임은 이 새 교육과정을 토대로 내년 새학기에 ‘대안 국사 교과서’를 선보일 예정이다. 하지만 엄연히 국정 국사 교과서가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교과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고민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정용택 교사(수원농생명과학고)는 “새 교과서 제작은 부교재로서가 아니라 교과서 자체를 아예 바꿔보자는 시도”라며 “우선 시판을 통해 아이들이 많이 보게 하고, 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수업이 어려우면 국사 교과서를 바꾸자는 공감대 형성을 위한 작업을 벌여나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교과서 과정에 의지하는 입시부터 문제
재미있는 자료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등 교사가 창의적으로 교육과정을 재편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당국의 말은 교육과정 탓에 수사에 그치고 만다. 전교조는 “7차 교육과정의 핵심인 수준별 교육이 우열을 제도화하는 것이라며 많은 교사들이 비판하고 있는 마당인데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교과서 내용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서로 모순되는 수준별 교육과 공동체 정신을 현행 7차 교육과정이 함께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교조 정사열 교사는 “교사들이 교과서에만 목매달지 않고 자율적인 교육과정 중심의 수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국가수준의 평가와 입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상적인 교과서 과정만 이수하면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입시가 존재하는 한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교과서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며 “교육과정이 변화해야 재미있는 교과서 수업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말 우리글>을 펴내는 데 참여한 경상대 김수업 교수(국어교육학)도 “7차 교육과정에 충실하면 도저히 우리가 생각하는 교과서를 만들 수 없어서 아예 새 교육과정을 짜는 모험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딱딱한 교육과정은 역시 딱딱하고 획일적인 교과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교과서는 교육과정이 유연화되고 교사의 교육과정 재편성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만들어질 수 있다. 교사들이 자신의 교육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한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칠 때, 말뿐이 아닌 진정으로, 우리 교육이 교과서 중심에서 교육과정 중심으로 바뀔 수 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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