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1년03월27일 제352호 

[특집] 정치판의 유령 ‘킹메이커’

대선정국 앞두고 정치적 영향력 확대 몸부림… 누가 그들에게 대통령을 만들라 했나


사진/킹메이커는 지역정서에 힘입어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근 킹메이커 논쟁을 일으킨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킹메이커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누가 그들을 킹메이커라 하는가. 차기 대선정국이 한발씩 다가오면서 정치권에서는 킹메이커 논쟁이 한창이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3월16일 “여태껏 직간접적으로 내 도움 안 받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느냐. (될 후보를 위해) 서드샷(세 번째 샷)까지 들어갈 것”이라며 킹메이커를 자임하고 나서자, 사흘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의원은 “현재의 정치구도상 김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지 않고서는 대권을 잡기 어렵다는 게 정치권의 일치된 견해 아니냐”며 진짜 킹메이커는 YS가 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대해 과거 옛 여권에서 킹메이커를 자임해왔던 김윤환 민국당 대표는 23일 “YS와 JP가 킹메이커로 나서면 나는 그분들을 도와야겠지”라면서도 “고토다 마사하루 전 일본 자민당 부총리는 ‘정치의 본질에는 권력을 잡거나 권력을 잡도록 만들어주는 두 역할이 있다’고 했다. 나도 공감한다”며 자신도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JP가 불 지피자 YS가 기름 끼얹어

킹메이커는 말 그대로 ‘왕(대통령)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학술 개념이라기보다는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저널리즘 용어라는 게 정치학자들의 설명이다.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킹메이커를 자신의 지분을 갖고 대통령 당내경선과 대선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정치인 내지 막후 실력자로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대선후보의 당선을 위해 선거전략을 짜고 기획하는 선거전략가, 선거매니저, 선거참모와는 다른 셈이다. “정치권 내부의 세력관계를 중재하고 그 역학관계를 이용해 대선과정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박상병 한국정당정치연구소 정책연구실장), 또는 “일정 정도 표를 동원할 수 있는 정치인이 이념과 원칙보다는 향후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나 유지를 목적으로 야합과 흥정을 수단으로 대선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김영명 한림대 교수)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치현실에서 나오는 현상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특히 지역구도에 주목한다. 윤순각 경북대 교수는 “킹메이커는 한국정치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지역을 볼모로 하는 정치현실에서 봉건영주처럼 ‘내가 우리 지역을 대표하니까 표를 얻으려면 나한테 잘보여야 한다’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현표 한서대 교수는 “우리 정치지형이 지역구도로 분할돼 있고, 또 한 지역만으로는 정권을 장악하기 어렵게 돼 있기 때문에 차기를 노리는 사람들은 각 지역 맹주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구도에서 킹메이커라는 게 가능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만큼 킹메이커론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대통령을 몇 사람 소수가 결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박재창 숙명여대 교수)라는 지적에서부터 “봉건적 냄새가 난다.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조경근 경성대 교수)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조금 색다른 설명도 있다. 킹메이커라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이런 용어는 일정 정도 정치발전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킹메이커가 권위주의가 끝나가고 민주사회로 이행하면서 과도기적으로 나오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킹메이커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누가 킹 앞에서 킹메이커를 자임할 수 있었겠나. 봉건적이라기보다는 과도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민주주의가 완성되면 사라질 말이다. 그때는 누가 누구를 만든다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번이 킹메이커를 운운하는 마지막 단계로 본다. 아직은 이른바 ‘어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원조 킹메이커’라 불리우는 김윤환


사진/92년 대선에서 YS 대통령 만들기에 상당한 역할을 한 김윤환 민국당 대표.(이용호 기자)


애초 킹메이커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등장하게 된 중심에는 김윤환씨가 서 있다. 그는 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내 민정계 세력을 YS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힘을 쓴 데 이어, 97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후보 지명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자칭타칭 킹메이커로 불렸던 것이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은 막판 1주일을 남겨놓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해 허주(김 대표의 아호)를 세 차례나 불렀다. 그때마다 허주가 노 대통령을 설득해 YS를 대통령후보로 만들었다. 이회창 총재가 후보될 때도 현직 대통령이었던 YS와 맞서 ‘나라를위한모임’을 결성해 이 총재를 후보로 만들었다.”(김 대표쪽 관계자) 당시만 해도 ‘여당후보=대통령’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상황이었으니까, 여당후보 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김 대표는 곧바로 킹메이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킹메이커 구도는 97년 정권교체를 계기로 깨지게 된다. 우선 DJ와 JP가 손을 잡으면서 옛 여권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호남 대 비호남의 대결구도가 무너지고, 영남, 호남과 충청권이 정립된 새로운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킹메이커의 조건도 변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여권 내 대선후보 결정과정뿐 아니라 본격적인 대선에서 지역의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지역맹주가 큰소리치게 된 것이다. “확연한 지역구도에서 특정지역 하나만으로 대선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사정에다 더욱이 지금 차기대선 예비주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3김처럼 확고한 지역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지역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3김으로서는 ‘내 허락없이 누가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 하고 대놓고 얘기할 수 있는 구도가 된 것이다.”(여권의 한 관계자) 김윤환 대표쪽 사정을 잘 아는 야권 인사도 “상황이 변했다. 허주는 지역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막강한 킹메이커로 활동하기는 힘이 달린다. 3당 정책연합 등을 추진하는 것도 그림을 크게 그려 추동력을 얻겠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킹메이커론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일까. 현 구도에서는 YS, JP, 허주가 언급하는 킹메이커론의 내용은 반이회창 연대쪽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한 최고위원쪽 관계자는 “한나라당의 후보는 사실상 결정된 상태다. 반면 여권후보는 아직 유동적이다. 따라서 아직은 어떤 형태가 될지 판단하는 게 이르지만, 민주·자민·민국당의 3당 정책연합이 논의되고 있고, JP가 YS와 접촉하며 움직이는 상황 등 큰 그림이 반이회창 구도를 겨냥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여권주자에 대해서는 충성경쟁을 요구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나라당쪽에서도 JP가 DJP회동을 마친 뒤 킹메이커론을 들고 나온 점을 들어 JP를 매개로 신3김연대를 추진해 이회창을 포위하겠다는 전략으로 보고 경계하는 분위기다.

사실 JP와 김윤환 대표의 경우 최근 DJP공조 복원, 3당 정책연합 추진 등의 정국흐름상 사실상 범여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선전략을 구사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JP의 경우 이 총재를 ‘바가야로’라고 표현하는 등 대립각을 세워왔고, 김윤환 대표도 지난해 한나라당 공천탈락 이후 이 총재를 겨냥해 “인간도 아니다”며 인간적 배신감을 토로하는 등 이회창 총재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 김 대표는 23일 “정국구도상 차기 대선에서는 3당이 공동후보를 내는 것이 앞으로 큰 흐름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속내를 드러냈다.

YS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조금은 자유로운 처지다. YS의 대변인격인 박종웅 의원은 “JP나 허주는 모두 킹메이커 이야기할 때는 여권후보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야를 통틀어 폭넓게 우리 입장을 밝히겠다는 것이다”고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의 대선후보가 이회창 총재가 아닌 제3자로 결정되지 않는 한 YS가 한나라당의 후견인으로 나서기는 쉽지 않다는 게 정치권의 지배적 시각이다. 이 총재에 대한 YS의 불신이 상당하고, 또 이 총재쪽에 서더라도 향후 얻을 게 별로 없다는 점 등 때문이다.

그렇다면 킹메이커들의 실제 위력은 얼마나 될까. 정치권에서는 대체로 이들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YS, JP 등이 옛날만은 못해도 아직은 지역정서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 차기 대선이 박빙의 승부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이들의 움직임은 당락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특히 이들이 힘을 모아 한 후보를 집중적으로 밀게 되면 대선승부의 결정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민주당 관계자) 민주당 차기 주자들이 대부분 킹메이커론과 관련해 말을 아끼는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민주주의 원칙 흔들 건가


사진/일본의 다나카식 정치의 계승자 가네마루 신 의원이 북한 대표단을 공항에서 영접하고 있다.(연합)


그러나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우리 정치현실이 지역구도로 움직인다는 것과 YS, JP 등이 킹메이커라는 것은 별개”라고 말했다. “YS가 지난해 총선에서 이회창 총재에 대한 극도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반 이회창 기치를 높이 든 민국당을 공개 지지하지 못한 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지역정서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 아니겠느냐. 자칫 권위에 상처만 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봐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도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 자민련의 한 관계자도 “JP가 충청권의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은 JP에 뭔가를 기대할 수 있을 때다. 지난해 총선의 실례를 보더라도 충청권에서 대통령 후보도 아닌 JP를 믿고 JP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모아줄지는 의문”이라고 전망했다. 이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로 지역정서를 움직여 표몰이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대포장됐다는 것이다.

지역구도에 넌더리치면서도 지역정서에 옭매여온 게 우리 국민의 투표성향이다. 킹메이커론은 이런 정치환경을 파고들고 있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부정하는 킹메이커론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깨어 있는 국민의식일 것이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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