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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변방의 북소리 중심을 울리다 지방의 생활공동체 운동을 이끄는 전사들…“내 고장 지키는 게 세상을 지키는 것”
“생각은 지구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 서울공화국을 혁파해나가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민물매운탕, 순두부집 등이 줄줄이 늘어선 경기도 포천 3·8선 휴게소 근처. 행정구역상으로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인 이곳은 포천과 연천, 철원 등 3개 군이 꼭지점을 이루며 만나는 곳이다. 양문리의 한 건물 2층에 이 지역 주민모임인 한탄강네트워크가 둥지를 틀고 있다. “편의대로 나눈 행정경계가 아니라 한탄강 유역에서 대대로 만들어진 생활공동체, 문화공동체를 따라 모임을 구성했다”는 게 한탄강네트워크 이철우(42)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한탄강네트워크…새 시대 준비하는 지역공동체
이씨가 고향인 포천으로 온 것은 96년, 떠날 때는 혼자였지만 올 때는 부인과 딸과 함께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90년대 초반까지 시국사건에 연루될 정도로 골수 운동권이었던 그가 귀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분들은 제2의 브나로드운동이라고도 표현하던데, 제 생각은 단순합니다. 20세기까지의 관계가 피라미드식이었다면 이제는 그물망식 관계가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됐고, 그 출발은 지방이라는 거죠. 게다가 한탄강 유역은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휴전선과 DMZ가 있는 곳 아닙니까. 이곳에서 평화·환경·통일 운동을 벌이는 게 가장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향집에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1만여평의 땅이 있었다. 농사를 지으며 그는 주민네트워크를 꾸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벌인 일은 ‘작은학교살리기운동’. 이제는 6학년이 된 딸 일환이가 다니는 전교생 70여명의 중리초등학교는 그의 모교이기도 하다. ‘작은학교통폐합’이 전국적으로 벌어질 때 그의 딸 일환이는 교육부 장관 앞으로 공개항의서까지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이웃들도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해 이제 중리초등학교는 서울에서 유학을 올 정도로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났다.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두 서울로 몰리고, 심지어는 시민운동마저도 서울 중심입니다. 지방의 생활공동체는 자꾸 위협받죠. 내 고장을 지키는 게 결국 세상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씨는 소식지 <한탄강>의 발간에도 공을 들였다. 10호째 나온 <한탄강>은 한탄강 유역에 사는 주민들의 정보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한다. 또한 인터넷 홈페이지 한타넷(www.hantanet.com)은 공무원들이 출근하자마자 반드시 접속할 만큼 영향력 있는 매체로 자리잡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해 12월16일 주민 35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탄강네트워크 창립식을 치를 수 있었다. 흔히 보수적으로 분류되는 이장들이 현판을 마련해줄 정도로 활동의 저변도 넓혔다. 이씨와 한탄강네트워크 170여명의 회원들은 요즘 한탄강댐 건설문제로 수자원공사와 싸우고 있다. 물론 이씨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한탄강의 수질오염은 서울의 중랑천보다 더 심각하다. 수도권에서 밀려난 소규모 염색공장들이 난립하고, 행정관청이 오랫동안 무원칙하게 일을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할 여유없이 물질적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다.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청소년 문화이다. 지난해 서울 강남의 한 성당에서 청소년 농활대가 도착했을 때 이씨는 내심 놀랐다고 한다. 깔끔한 복장에 여유있는 아이들 표정.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 아이들이라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이씨는 순간 점점 슬럼화해가는 한탄강 지역 청소년들의 생활모습이 떠올라 씁쓸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욱 알차고 특색있는 한탄강 문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게 이씨의 다짐이다.
조선바보…옥천의 ‘영상운동’
지난 1월13일에 열린 ‘조선일보반대 옥천행동의 날’ 행사에는 김동민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공동대표와 성유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등 60여명의 언론운동가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사실 서울에서 세미나나 토론회가 있어 초대를 받아도 옥천의 ‘조선바보’ 활동가들은 나들이를 잘 안 한다. ‘조선바보’의 전정표(48) 대표는 “자꾸 밖으로 돌면 이름 내는 데 신경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 고장 옥천에서 해야 할 일을 소홀하기 쉽다”며 ‘외유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옥천의 조선일보바로보기운동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계획을 갖고 있는 세종대 황철민 교수는 이들의 운동을 한마디로 ‘영상적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핵심을 강렬하게, 그리고 대중적으로 짚어낸다는 것이다. 옥천 ‘조선바보’ 활동가들은 조선일보의 극우성이나 시장독과점 문제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전 대표는 “과거의 친일행각 하나만으로도 다 설명된다”고 말한다. “그러고도 반성은커녕, 일등신문이니 민족신문이니 포장을 하죠. 그런 오만한 자세가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그게 조선일보의 본질이라는 거죠.” 현재 ‘조선바보’에 가입한 단체 대표들의 면면을 보면 이들의 대중적인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옥천군의회 의장과 의원들을 비롯해 충북남부민예총, 옥천농민회, 전교조 옥천지회는 물론 옥천재향군인회, 옥천상이군경회, 옥천체육회까지 진보와 보수가 망라돼 있다. 이들은 또한 “<조선일보>를 제대로 알고,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독을 중지하는 데로 연결하는 것까지” 운동을 연결한다. 이미 100여명의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공개적으로 끊었다고 한다. 조선바보쪽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가지로 팔리는 <조선일보>가 1천부가량 된다고 하니, 10% 가까운 운동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옥천의 조선바보 운동은 인터넷사이트 물총닷컴(www.mulchong.com)에서 잘 볼 수 있다. “<조선일보>가 미사일이라면 우리는 물총이다”는 구호를 내걸고 운영하기 시작한 사이트이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구호는 이제 상식이 됐다. 문제는 그것을 한 지역에서 어떻게 실천적으로, 효과적으로 이뤄내느냐이다. 대구에서 진행되는 대구라운드는 가장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에서부터 풀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대구라운드…국채보상운동의 뒤를 이어
대구라운드는 98년 2월 경북대 경제학과 김영호 교수가 주창한 프로젝트. 김 교수는 “지금과 같은 일방통행형 국제금융질서는 채권·채무국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전세계 시민사회가 연대해 쌍방통행형 질서로 국제금융질서를 개혁하자”고 호소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진 대구에서 외채문제를 풀어가자고 제안한 것은 참신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외채와 투기자본에 대한 시민사회의 모니터링 시스템과 개혁프로그램을 강조하며 출발한 대구라운드는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까지 꾸준히 건전한 국제외채상환질서를 모색해나갈 예정이다. 지나친 서울중심주의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탄강네트워크 이철우 사무국장은 “각 지방의 다양한 생활공동체 운동들은 아직 맹아적 수준이지만 멀리 보면 시대의 흐름을 타는 운동”이라며 상황을 낙관적으로 풀이했다. “서울은 지나치게 포화돼 있고, 지나치게 낡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각 지방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람을 낚는 어부’를 자처하며 운동하는 이들이 있기에 아직 희망은 있다.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린다는 말이 맞다면 지방은 더이상 변방이 아닐 것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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