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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록이 없는 ‘망각의 제국’ 너무나 한심한 정부기관 기록물관리 현주소… 기록·정리·보존 시스템 총체적 마비 상태
이번 사건으로 지난 99년 1월 외환위기 책임규명을 위한 경제청문회에서 삼성자동차 인허가 관련 기록이 대부분 파기된 사실이 밝혀진 뒤 2년 만에 다시 공문서 파기의혹이 불거지게 됐다. 당시 삼성자동차가 정부에 제출한 각서와 국회보고서 말고는 모두 폐기된 것으로 밝혀졌었다. 특히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했던 담당자들은 “장관이 출장 가기 전 문서를 잘 정리해 놓으라고 한 말을 파기하라는 지시로 잘못 파악했다”고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기록 남기지 않아 책임 벗어나겠다?
실제 정부의 기록물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지난해 12월26일 경제장관간담회는 최근 구조조정의 후퇴와 현대계열사 특혜논란을 빚고 있는 산업은행의 부실 회사채 인수방침이 결정된 중요한 회의였다. 이날 결정으로 최대 10조원가량의 부실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떠안게 돼 산업은행의 부실 회사채 인수는 사실상 국민이 부담해야 할 공적 자금이 됐다. 그런데 이 간담회도 회의록이 없다. 재정경제부는 “비정기적이고 비공식적인 간담회 성격이어서 회의록을 만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뿐이 아니다. 국정의 최고 의결기관인 국무회의도 여전히 회의록이 없다. 의결내용을 중심으로 실무적으로 필요한 사항만을 간단하게 요약해놓을 뿐이다. 이 때문에 국무회의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국무회의 주무부서인 행정자치부의 관계자는 “회의록을 만들면 소신행정에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중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누가 어떤 발언을 했고, 누가 찬성했고 반대했는지 알게 되면 곤란하다. 관련 이해당사자가 한둘이겠느냐. 또 국회 국정감사법에 따라 국회에서 회의록을 자료로 제출하라고 요구하면 거부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신있게 발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정부·여당간 정책협의를 위한 당정협의회도 회의록을 남기지 않는 게 관례처럼 굳어져 있다. 당정협의회는 집권당 정책위의장과 관련부처 장관이 참석하는 사실상 핵심적인 정책결정과정이기 때문에 이 회의결과에 따라 국가정책의 향방이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주당 정책위 관계자는 “회의에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회의 뒤 정부쪽 실무자들과 협의해서 회의 결과보고서를 만드는 게 전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필요한 부분은 메모를 하지만 개인적인 메모일 뿐이고 필요없으면 파기해버리기 때문에 보존할 기록으로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회의록 작성하지 않고 보고서만 남겨
그러나 정부의 이런 태도는 과거 IMF 당시 정책결정과정을 밝혀줄 기록물이 없어 책임자 규명을 하지 못했던 역사적 교훈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공개될 경우 폐해가 우려되면 외국처럼 30년 뒤에 공개하도록 한다든지, 비공개로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해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개의 폐해 때문에 기록조차 안 남긴다는 것은 지나치게 행정편의적 발상이다. 현대사 연구가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물이 풍성했던 조선조 연구보다 더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김익환 교수) 사실 이처럼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는 것은 행정의 투명성 확보와 역사적 가치를 언급하기 앞서 실정법 위반이다. 정부는 그동안 기록물의 부실관리에 따른 논란 등을 개선하기 위해 99년 12월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해 시행해오고 있다. 이 공공기록물관리법 시행령은 주요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기록작성을 의무화하고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회의 △주요 정책의 심의 또는 의견조정을 목적으로 차관급 이상의 주요 직위자를 구성원으로 하여 운영되는 회의 △차관급 이상의 주요 직위자가 참석하는 정당과의 업무협의를 위한 회의 등은 반드시 회의록을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어겼을 때 처벌할 징계조항은 마련돼 있지 않다. 회의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행정부처뿐이 아니다. 입법기관인 국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회관계자는 “지난해 2월 소위원회에서도 속기록을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도록 국회법을 개정했으나 아직 소위원회에서 속기록을 남기는 경우는 30%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소위원회의 속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실질적인 법안 심사 등 의정활동의 핵심적인 내용이 소위원회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정활동의 투명성 보장을 위해 소위원회의 회의내용 공개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임위 의결로 비공개 회의를 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악용해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록물 작성은 그렇다치더라도 그럼 보존 관리는 제대로 이뤄지는 것일까. 정부기관의 기록물 보존관리는 97년 옛 총무처에서 만든 ‘공문서 분류 및 보존에 관한 규칙’(총리령)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이 규칙은 기록물을 1년, 3년, 5년, 10년, 20년, 준영구, 영구 등 7가지 기준으로 분류해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준영구보존 기록물과 영구보존 기록물의 경우 해당 부처에서 9년간 보관된 뒤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된다. 이 가운데 준영구보존 기록물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30년 동안 보관하다 영구보존 여부를 재평가받게 된다.
문서고에서 쓰레기 취급당하는 정부 문서들
그러나 각 행정기관이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하지 않고 자체 보관하고 있는 기록물은 모두 480만권에 이르는 것으로 정부기록보존소는 추산하고 있다. 이들 문서들은 모두 각 부처의 문서고에서 잠자고 있거나 분실 또는 파기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부기록보존소는 구체적인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지 않고 각 해당부처에서 처리하는 기록물도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각 부처에서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20년 이하 보존 기록물들은 해당부서에서 2년간 보관한 뒤 부처 문서담당자에게 보내져 각 기관 서고에서 관리되다가 보존기간이 끝나면 폐기처분된다. 문제는 각 기관에서 운영하는 문서고가 대부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한 관계자는 문서고 관리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최근 1992년 발생한 노동운동가 박태순씨의 사망사건과 관련해 서울의 한 구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담당직원에게 ‘행려사망자처리부’를 보여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기록 보존연한이 5년인 것 같은데 아마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속는 셈치고 문서고를 뒤졌는데 기록을 보관하는 문서고에는 난로, 소파, 폐자재 등이 함께 있었다. 한마디로 창고였다. 문서마다 먼지를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고 연도별·분야별 분류도 돼 있지 않았다. 담당 직원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정부기록보존소의 관계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인정했다. “각 기관의 문서담당자는 대부분 전문지식이 없는 하위직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각종 다른 업무를 하면서 문서담당을 곁다리로 맡고 있다. 따라서 체계적인 관리에는 한계가 있다.”
공공기관에 문서 관리 전문인력이 없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99년 12월 제정된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은 기관마다 자료관을 따로 설치해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석사학위 이상의 기록관리전문요원이 표준화된 문서관리 방식에 따라 기록물을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제 법에 따라 자료관이 설치된 곳은 전국에서 경기도 교육청 단 한곳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어떤 기록을 공문서로 볼 것이냐’와 관련된 공무원들의 판단기준이다. 대부분의 행정기관은 결제받은 문서만 공문서이고 따라서 보존대상도 결제서류에 국한한다. 재경부의 한 서기관은 “통상 업무를 추진할 때 관련 사항에 대해 보고도 하고 내부회의도 몇 차례씩 하게 된다. 이때 보고자료나 회의자료는 거의 필수다. 그렇지만 이들 자료를 모두 보관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업무추진 내용이 최종 결정되면 그때 공문서를 따로 기안해서 결재받고, 결재받은 문서만 문서등록대장에 기록하고 보관하게 된다.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한다”고 말했다. 결재받은 서류만 공문서라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공문서를 이처럼 좁게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행정편의적 사고방식이라는 반박도 많다. 외환위기 당시의 정책결정과정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도 정책결정과정에서 작성된 문서가 결제받은 문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당사자들 마음대로 폐기했기 때문이었다. “결재받은 공문서뿐 아니라 의사결정에 이르기는 과정에서 나온 조사서, 보고서, 회의록 등 공공업무와 관련해 만들어진 일체의 기록물을 보존 등록해야 한다.”(한국국가기록연구원 이원규 사무국장) “미국의 경우 업무와 관련된 것이면 메모지까지 다 보존하고 있다. 그래야만 어떤 정책이 나오게 된 배경 등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박찬승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정책결정과정 전체가 분명히 보여질 수 있도록 모든 서류는 함께 등록되고 관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은 보존해야 할 기록물에 대해 “공공기관이 업무와 관련하여 생산 또는 접수한 문서·도서·대장·카드·도면·시청각물·전자문서 등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자료를 말한다”고 결제받은 문서로 제한하고 있지는 않다.
이제라도 기록관리법 강력하게 시행해야
그러나 공무원들의 일반적인 기록기피증과 달리 성실한 기록으로 덕을 본 경우도 있다. 지난 99년 6월 화성 씨랜드 화재참사 당시 화성군 여성복지계장 이장덕씨는 업무일지를 꼼꼼히 작성해 화를 면한 경우다. 이씨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인허가 과정에서 상사로부터 부당한 압력과 압박을 받은 과정을 적어 놓아 무혐의처분을 받은 것이다. 이씨는 97년 씨랜드 인·허가 당시 주무계장으로 “진입도로가 확보되지 않아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버텼으나 당시 상관인 강아무개 과장으로부터 “왜 허가를 내주지 않느냐”는 등 압력을 받아 결국 허가를 내주고 만다. 그러나 경찰수사에서 이씨는 당시 강 과장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과정과 당시의 심경 등을 적은 업무일지를 제출해 혐의를 벗었다. 정부의 기록물 관련 정책은 후퇴하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정부는 지난 1월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 시행령을 고쳐 애초 전체발언록을 싣도록 했던 회의록을 요지만 적도록 개정하고 기록물의 전산등록 의무화를 기술적인 이유로 3년 유예해 한국국가기록연구원 등 기록전문기관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샀다. 한상완 기록관리학회장은 “정부의 정책의지가 의심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정책기관부터 기록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익환 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교수는 “기록물의 등록시스템 개선이야 말로 공공기관기록물관리법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예한 것은 이 법을 사실상 실시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가개혁 차원에서 제정된 공공기관기록관리법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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