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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일상의 자취를 꼼꼼히 챙기는 기록의 대가들… 기록매체도 비디오.CD 등 다양화
“100년이 흘러도 기록에 책임지련다”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의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1987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하는 노인대학 강의를 들은 그는 강의필기록을 책으로 만들어냈다. 책은 강의를 등록할 때 받은 접수증 복사본에서부터 동기생들의 주소록, 동창회장의 인사말 요약, 강의요약에 이르기까지 강의와 관련한 모든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고적답사를 한 날에는 박물관으로 출발한 시간에서부터 비가 내린 날씨 등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20여평 남짓한 그의 집 지하에는 한국전쟁 전후부터의 국내 일간지들을 빼곡이 모아놓았다.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려운 <인민일보>까지 있을 정도다. 서울 남산초등학교 특기적성교육 글짓기반 강사인 전태수(61)씨는 20년 동안의 담임교사 생활을 ‘학급운영일지’를 통해 기록했다. 또 그동안 제자들, 학부모들과 주고받은 편지 2천여통도 보관중이다. 2월23일 오후 4시 학교에서 만난 전씨는 기자에게 명함을 주며 명함위에 ‘010223 금 16시’라고 적었다. 2001년 2월23일 오후 4시에 건넸다는 표시를 한 것으로, 몸에 밴 기록습관을 엿볼 수 있었다. 전씨는 “내가 기록에 힘쓴 것은 완전히 의도적인 것이었다”며 “마흔이라는 나이에 뒤늦게 교직에 뛰어들었는데 이 직업에서 우리 식구 밥벌이나 하면서 단순한 봉급생활자로서 살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결심은 교사생활 전체를 기록해 1년에 한권씩의 책을 반드시 내겠다는 것이었다. 결심대로 그는 지금까지 14권의 책을 냈고, 앞으로 계획한 6권의 책을 마저 더 낼 생각이다. 결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기록 덕분이었다. 학급운영일지 기록은 그의 교사생활 하루하루가 어땠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즉 무슨 숙제를 내줬으며, 준비물은 무엇이었는지, 훈화시간에는 어떤 얘기를 들려줬는지, 누가 누구의 안경을 깼는지, 누구 어머니한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등이 모두 적혀 있다. 편지내용까지 남아 있는 건 원본을 부치기 전에 복사본을 남겨두는 그의 독특한 기록철학 덕분이다. 전씨는 “내 기록을 인수할 곳이 나타난다면 기증을 해서라도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특히 후배 교사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와 길을 걸을 때, 그리고 잠자기 전 베개 위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을 모아 기록한 <가짜≒마약, 공짜≒독약, 이 두놈이야말로…>라는 책을 집필중이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 결실을 맺은 셈이다.
개인 기록물 출판 활발… 생활 길잡이 구실
특히 이 행사에 초청된 김안제 서울대 교수의 생애기록집 ‘한 한국인의 삶과 발자취’는 그가 왜 ‘기록의 명인’으로 불렸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그는 1996년 회갑을 맞아 평생의 기록을 136항목으로 나눠 836쪽에 이르는 기록집을 완성했다. 김 교수는 기록을 하게 되면 생활에 질서가 잡히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게 된다고 강조한다.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의 박미자 연구원도 “기록의 즐거움을 알게 되면 기록을 위해 생활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며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며 평생의 계획을 세우는 데에도 유용하다”고 말했다.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확산되고 있는 ‘아빠가 쓰는 임신일기·육아일기’는 지금까지 여성의 의무로만 여겨져왔던 임신→출산→육아의 전 과정에 남성이 전면적으로 참여하는 데 기록문화가 긍정적인 구실을 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가족일기, 가족신문의 확산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 구로구 독산동 전업주부 이현임(35)씨는 지난해 초부터 ‘사이버 가계부’를 쓰고 있다. 이씨는 “아직 종이가계부를 버릴 수 없어 동시에 이중으로 기록하고 있다”며 “사이버 가계부는 따로 계산을 하지 않아도 월급날을 기준으로 지출규모를 알 수 있어 씀씀이를 조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이버 가계부에는 일기장도 있어 중요한 일은 반드시 여기에 기록한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김채현(46) 교수는 비디오를 통해 가정생활을 기록해놓는다. 김 교수는 비디오카메라로 큰아들 욱태(11)와 작은아들 승태(4)의 성장과정을 40시간 분량으로 찍어놓았다. 김 교수는 이것말고도 가족이 해외여행을 갈 경우 외국의 음식문화에서 시장풍경까지 비디오에 담아오는가 하면, 20세기가 끝나던 날 하루의 일상생활 전체를 기록해두는 등 비디오기록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김 교수가 가장 자랑하는 비디오기록물은 10년 동안 찍은 2500여편의 작품 공연 모습이다. 50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 봐야 겨우 볼 수 있을 만큼 방대한 분량의 공연장면 비디오기록은 ‘모든 춤 창작물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겠다’는 김 교수의 고집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이 기록들을 함께 나눌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록문화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 필요
한남대 기록관리학과 대학원생 차창민(31)씨는 이전 세대에 비해 전자기록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젊은이들의 기록문화 세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CD에 자기소개서를 담아서 그것을 자기소개로 대신하는 대학생들도 있어요. CD 안에는 성장과정을 담은 사진과 목소리를 담은 음성기록까지 들어 있는 게 보통입니다.” 최근에는 아예 생애 전체를 한권의 책으로 기록할 수 있도록 ‘기록용 책’이 나오는 등 기록문화가 상업적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의 한 관계자는 “개인 기록문화의 발전과 함께 최근 몇년 동안 몇몇 대학원에 생겨난 ‘기록관리학과’와 기록관리 전문가들인 ‘아키비스트’의 존재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도 기록문화가 비약적으로 발달할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에서도 기록문화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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