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경제를 이끌 색을 찾아라!소비자에게 제품 성능보다 강렬한 인상 심어… 세계 시장 공략할 색채 전략은 있는가
괴테는 독일의 대문호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문학이 아닌 또다른 학문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작가인 동시에 빛깔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간의 감성과 색깔의 관계를 연구했던 색채학자였다. 이 괴테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색채를 과학적으로 관리하지 않는 것은 어린아이가 악보없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200여년 전 괴테가 남긴 말은 바로 지금 이 시대의 화두가 됐다. 이제 선진국과 후진국을 색을 매우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관리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색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과학적으로 색을 연구하는 나라가 세계를 이끌어가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뒤쳐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색은 이제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산업사회 모든 제품의 경쟁력 그 자체로 작용한다.
색을 과학적으로 관리해야 경쟁력 확보
사회가 복잡해지고 변화가 점점 빨라지면서 색채가 끼치는 영향과 범위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색은 이제 예전처럼 단순히 어떤 제품의 상업적 성패에 영향을 끼치는 수준을 넘어 주변 제품들과 연관분야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주변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한 제품의 색이 다른 제품의 색과 디자인까지 바꾸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애플사의 히트상품 ‘아이맥’ 시리즈다. 지난 98년 처음 선보인 아이맥은 둥글둥글한 유선형 몸체에 화려하면서도 산뜻하고 다양한 색으로 디자인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컴퓨터는 베이지색 상자 모양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와 90년대 이후 디자인사의 첫머리에 기록될 정도이다. 이제는 아이맥 특유의 디자인, 즉 반투명 재질에 강렬한 색상을 입히는 디자인이 아이맥과 함께 쓰이는 컴퓨터 주변기기는 물론 다른 가전제품과 가구, 주방용품으로까지 번져가고 있다. 2000밀라노살롱 등 올해 세계 주요 디자인대회에는 이처럼 아이맥 색상에 맞춘 가구들과 아이맥풍의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90년대 이전에도 색은 여러 산업에 걸치는 중요한 디자인적 연결고리로서 작용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속도와 범위는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강력해지고 넓어졌다. 산업전반에서 가장 색깔에 민감한 색채 선도업종은 화장품, 자동차, 가전제품 등의 생활용품 산업들. 이들 가운데 색의 유행과 개발에 가장 민감하고 변화주기가 빠른 업종은 화장품이다. 그래서 어떤 색깔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첫 번째 단계가 화장품인 경우가 많다. 화장품에서 먼저 ‘뜬’ 색깔은 그 색조 화장에 어울리는 옷을 만들게 해 패션으로 번져가고, 이 유행색은 다시 여기에 잘 어울리는 가전제품 등의 생활용품으로, 그 다음 인테리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의 색깔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준다. 또한 이런 다른 연관분야들이 다시 화장품 색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최근 국내에서 머리 염색이 붐을 이루면서 검은 머리색이 아니라 갈색조 머리색에 어울리는 색깔의 옷들이 잘 팔리는 것도 이런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제 이런 영향관계에 따른 색깔의 유행전파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자동차의 색깔이 거의 인테리어와 동시에 이전 단계인 가전제품 등 생활용품 색깔의 영향을 받고 있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이맥과 뉴비틀의 선풍적 인기의 비결
때문에 자동차업계는 예전처럼 단순히 다른 자동차회사들의 색상 추이에만 관심을 가져오던 것에서 벗어나 자동차색에 영향을 끼치는 연관분야의 색변화를 민감하게 주시하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부터 1년에 두 차례씩 ‘컬러 브랜드 쇼’를 열고 있다. 이 모임은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공급하는 모든 분야의 부품업체들을 불러 함께 일관된 컬러전략으로 신상품을 준비하기 위해 기획된 모임이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19일 열린 올해 두 번째 행사에는 하청업체들뿐만 아니라 화장품회사의 디자이너들과 국내 색채연구인력, 각 대학교 색채디자인 관련 인력 등으로 범위를 넓혀 다양한 색채 관련자들을 불렀다. 그만큼 색깔의 상호영향관계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색이 복잡한 연관관계 속에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작용을 하면서 요즘 세계 경제계는 같은 업종은 물론 다른 업종끼리도 색에 대한 정보와 예측을 공유하고 교환하는 네트워크 체제를 활발하게 구축·활용하고 있다. 세계적인 색깔 경향과 정보를 얼마나 정확하게 수집하고 분석해 경쟁력 있는 색채전략을 수립하느냐가 기업의 존폐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능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색 선택에 따른 제품의 위험 부담이 커지면서 위험도를 줄이는 방안으로 각자가 예측하고 분석한 색 추이를 종합하는 네트워크를 이용하고 있다. 문구부터 자동차회사까지 전세계 1600여개의 기업들이 참가하는 미국의 컬러마케팅그룹(CMG) 같은 거대하고 오래된 모임부터 업종별 색담당자들의 작은 모임까지 이런 공동의 네트워크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물론 어떤 특정한 색이 유행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색경향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계열의 색상이 어떤 재료와 어울리면서 어떤 분위기로 인기를 얻을 것이라는 식의 다소 포괄적인 제안을 낸다. 그리고 회원사나 이들이 제안하는 정보를 사는 관련업체들은 이런 흐름분석을 토대로 각 업체의 생산품에 비슷한 색조를 적용하는 식으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색이 제품 판매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패션산업계는 특히 오래 전부터 이런 업체들끼리의 협동체제를 갖추고 정보와 분석을 공유해왔다.
업계의 공동 대책 수립 “미래를 제안한다”
패션산업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도 유행이 변하고 새로운 스타일이 뜨고 지는 것 같지만 사실 한 가지 유행이 만들어지는 데는 최소 2년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따라서 이런 유행색의 예측도 최소 2년 전에 조사되고 추정되는 구조로 이뤄진다. 어떤 색상이 옷에 적용되려면 그 이전에 직물을 짜는 실을 염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처럼 2년이란 앞선 시점에서의 예측이 틀릴 경우 기업이 입는 타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정확한 색깔 예측으로 이 시간을 활용할 경우 그 이점은 엄청나다. 그래서 세계 거대 패션업체들은 더욱 이런 정보공유 시스템이 제안하는 색 경향에 민감하다. 처음 패션업체들의 협력체제로 시작된 이런 모임들은 아예 전문회사나 전문기관 형태로 운영되면서 유행색을 제안하고 있다. 프로모스틸, 트렌드 유니언 등의 기관이나 회사들은 베르사체나 아르마니 같은 고급브랜드들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다른 업계끼리는 물론 같은 업종 회사들끼리도 이런 정보와 예측의 공유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아무래도 색의 선택에 있어서는 외국의 경향을 뒤쫓아가기 바쁜 형편이다. 때문에 색채 전문가들은 원래부터 격차가 있었던 색분야에서 우리가 세계적 흐름에 뒤쳐질 경우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지적하며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함을 강조한다. 90년대 들어 패션업계부터 이런 국제적 교류모임에 국내 기업들이 하나둘씩 참가해 한국의 색동향을 제시하고 외국의 경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교환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색채정보 제공회사 출현… 국가적 전략 미흡
그래서 아예 이런 색채정보만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회사도 나왔다. 국내 유일의 색채정보분석·제공업체인 IRI디자인이 바로 이런 정보기관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사업화한 회사다. 이 회사는 자동차, 가전제품, 인테리어, 패션, 화장품 등 색채 선도 업체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제품 색깔 경향을 종합해 회원사들에게 돈을 받고 보내준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같은 업종 경쟁기업들의 제품에 대해서는 파악하지만 영향을 주고받는 연관 업종이나 다른 업종의 제품까지 파악하기는 어려운 점에 착안해 다양한 업종 제품들의 색채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추려주는 것이다. 회원들의 정보이용료는 연 30만원으로 현재 400여개 업체가 회원으로 가입해 이 회사가 제공하는 색채정보를 받아보고 있다. 비록 국내 다양한 기업들이 색채의 중요성을 과거에 비해 많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색채전략 수립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그 수준은 외국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편이다. 색채전문가들은 선진국들과의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과 함께 교육과정 자체에서 감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100여년 전, 일본은 70여년 전에 이미 색채연구소를 설립해 체계적으로 색을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민간 색채연구소가 등장한 것은 불과 5∼6년 안팎이다. 그나마도 이화여대의 색채디자인연구소(소장 김길홍)와 한국색채연구소(소장 한동수) 두곳에 불과하고 전문연구자도 태부족한 상황이다. 특히 매스컴과 통신매체의 발달로 선진국의 신제품 정보나 동향을 실시간에 접하는 요즘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는 만큼 국내 기업들이 제대로 색을 활용하지 못하면 경쟁력 상실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전문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지금부터라도 색에 대한 과학적 연구, 투자와 함께 색채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시에 한국적 색 개발도 중요한 관건으로 꼽힌다. 색깔이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체계화돼 다른 색깔과 어울려 특정한 이미지를 발휘할 때 제대로 힘을 발휘한다. 한국이란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런 색채배합과 체계를 연구하고 개발하자는 이야기다. 이미 100여년 가까이 외국이 활용해온 색깔로는 경쟁이 어려운 만큼 개성있는 한국적 색깔을 개발하는 것만이 승부수가 된다는 분석이다. 이화여대 색채디자인연구소 소장 김길홍 교수는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과정에서 10가지 색을 배우지만 일본은 84가지를 배운다”며 “논리와 이성을 강조하는 패러다임만을 고집하지 말고 감성적 측면의 교육을 강화해야만 색채를 비롯한 문화전분야에서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길이를 잴 때는 미터 단위로 무게를 잴 때는 킬로그램 단위로 재듯 색도 정확한 표준에 따라 정량화해 인식하는 사회적 경제적 의식 변화도 중요한 과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색을 단순한 상징이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닌 가장 중요한 자원이자 수단으로 여겨야만 치열한 경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눈대중 수준으로만 색을 대해왔기 때문에 엄격한 색관리를 하는 외국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인 태극기 태극의 빨강색과 파랑색에 대해서도 지난 98년에야 국가적 기준을 정했을 정도이다. 그 이전에는 태극기를 만드는 업체마다, 태극기를 다루는 책마다 태극기 색깔이 제각각이었던 실정이었다. 반면 일본은 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일찌감치 일본 국기의 색깔을 법으로 정했다.
빛의 나라, 시대의 빛깔을 만들어야 한다
머나먼 옛날,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황량한 몽골의 초원과 비교되는 아름다운 색깔이 어우러지는 고려의 자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고려 즉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쓰이는 몽골말이 바로 ‘솔롱고스’다. ‘무지개’를 뜻하는 몽골말 ‘솔롱고’를 변형한 말이다. 뜻 그대로 무지갯빛처럼 아름다운 ‘빛의 나라’로 불렀던 것이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는 ‘빛’을 되찾아야 하는 시대를 만났다. 그리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개발로 새로운 시대의 빛깔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명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고 중요하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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