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공부한다, 고로 나는 짜릿하다테크노에서 바흐까지, 오로지 흥미에 이끌려 무언가를 미친듯이 탐구하는 사람들
한의사 김병열(31)씨도 퇴근할 무렵이면 다른 여늬 직장인처럼 몸이 녹초가 된다. 환자들을 만나 증상을 듣고, 진료하고 처방하기를 계속하다보면 어느새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김씨는 책상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든다. 의학책은 아니다. 직업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철학책이다. 한 단어, 한 문장 술술 읽어 넘기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읽다보면 어느새 피곤함은 까맣게 잊게 된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다시 읽고 뜻을 곱씹고, 모르겠으면 밑줄을 치고…, 그렇게 김씨는 하루를 마무리한다. 김씨는 대학공부를 마친 지 벌써 몇년이 지났는데도 요즘 학교에 다니고 있다. 대학원은 아니다. 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철학과 교수가 운영하는 철학교실이다. “어느날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왜 하필 이 위치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겼어요. 그게 철학의 문제라는 걸 깨달았고, 철학을 공부해보자는 생각에 철학교실을 찾아갔습니다.” 철학과를 나오지도 않았고, 철학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지만 4년째 다니면서 이제 김씨는 철학과 대학생 못잖은 철학도가 됐다. 어렵고 애매해 처음엔 말장난 같기도 했던 철학의 다양한 모습을 배우고 복습하고, 다시 자기 나름으로 생각하고 정리해가면서 김씨는 서서히 자신의 고민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과연 부족한 시간에 이렇게 딴 공부를 해도 되나 싶었고, 철학은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공부의 재미는 그걸 뛰어넘게 해줬다. 특히 윤리학을 공부할 때 자기 윤리관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한의사인 그에겐 더할나위없는 수확이었다. 특히 수업이 끝난 뒤 다른 수강생들과 생맥주집에서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토론하는 분위기는 너무나 좋다고 한다. 이제 김씨는 행여 강의를 듣지 못하면 녹음테이프로 보충할 정도로 열성적인 ‘아마추어 철학연구자’가 됐다.
문과가 이과공부, 이과가 문과공부
전통적으로 직장인들의 공부라고 하면 으레 영어나 일본어, 컴퓨터 등 실용적인 것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직장생활과 관련이 없어도,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더라도, 과감하게 새로운 분야의 공부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특정한 한 가지의 주제를 잡아 강의를 듣고,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면서 ‘연구’ 수준으로 심도있게 파고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배우고 생각하는 공부와 연구의 맛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다. 문과를 공부한 사람이 이과 분야를 연구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있다. 기존 전공과는 훌쩍 벗어나는 공부의 즐거움이 이들의 낙이다. 요즘에는 인터넷이 퍼지면서 이들 아마추어 연구자들이 전문서적, 외국서적 등의 자료를 찾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도 부쩍 늘어났다. 변리사사무소 직원인 정한섭(33)씨의 연구분야는 별, 바로 ‘천문학’이다. 정씨는 서울천문동호회 회원인 아마추어 천문관측가다. 해마다 100만원 가량의 천문학 서적을 살 정도로 열성이다. 이제 책장만으로는 책 보관이 어려워 그의 방에는 사과상자에이 그득그득 쌓여있을 정도다. 직장생활이야 남들과 마찬가지여서 시간이 빠듯하지만 결국은 하기 나름. 정씨는 주말이면 친구나 애인을 만나는 시간을 줄여가며 서울 근교 휴양림에 들어가 350만원짜리 ‘보물 1호’ 망원경을 꺼내들고 배율을 맞춘다. 어두운 밤, 숲속에서 행여 이상한 소리라도 들리면 오싹해지기도 하지만, 지난 주 보지 못했던 새 별을 볼 때 그런 무서움은 금세 사라져버린다.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로부터 망원경을 선물받으면서 별 관측에 빠져들었던 정씨는 비록 생업은 천문학과 멀어졌지만 그 때의 감정을 요즘 다시 하늘을 보며 새록새록 다시 느끼고 있다. 법률포털사이트를 만드는 인터넷회사에 다니는 김기태(38)씨도 정씨처럼 주말과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자기 연구에 투자하는 직장인이다. 그의 연구분야는 ‘자동차’.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매력적인 이 탈것을 뜯어보고 공부하는 시간만큼 김씨에게 즐거운 시간은 없다. 자동차 회사들이 신차를 발표하고 시승식을 연다는 소식만 들으면 쫓아가 시승기회를 따낸다. 그렇게 축적한 자동차 지식과 정보를 김씨는 꼼꼼히 기록하고 분석해 자동차에 대한 글 연습에 매진한다. 언젠가는 자동차에 대한 책을 낸다는 꿈을 꾸면서.
'테크노 교주'가 된 연구원
즐기기 위해서 시작한 공부가 깊어져서 본업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일하는 유재현(35)씨는 직장에선 월드컵에 대비해 서울거리를 보다 매력적인 관광상품으로 꾸미는 방안을 연구하지만, 퇴근하고 나면 ‘테크노 음악’을 연구한다. 요즘에는
아예 아주 독특한 틈새를 파고들어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는 고영범(26)씨의 연구대상은 매우 독특하다. 얼굴만봐도 웃기는 중국의 영화배우 ‘주성치’가 그의 연구주제. 남들은 주성치를 코믹하고 희한한 B급영화 배우쯤으로 넘겨버리지만, 그는 기발하고 독특한 주성치의 영화세계가 진정한 평가를 받기를 원해 주성치 공부를 시작했다. 주성치 관련기사를 모두 스크랩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웹사이트로 만들어가며 자기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연월차를 남김없이 쓰면서 국내의 모든 영화제에 참가해 세계 각국의 감독 인터뷰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가 물어본 질문은 딱 두 가지. “주성치를 아시나요?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를 보셨나요?” 그가 그러는 이유는 아시아 최고의 감독이자 배우인 주성치를 세계 감독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듣고 싶기 때문이다.
강좌까지 여는 마니아들
아마추어 연구자로 출발해 이제는 직접 강의를 할 정도로 전문가가 되는 이들도 상당하다.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의 주인 양현호(45)씨는 음대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클래식 음악이 좋아 꾸준히 공부하다 음악평론가 못잖은 ‘고수’가 됐다. 클래식 음악 가운데에서도 그의 주특기는 ‘음악의 아버지’ 바흐다. 수많은 클래식 음악을 들어오면서 그가 찾은 종착역이었다. “서양음악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다”고 양씨는 설명했다. 그리고 그 뒤로 바흐의 음악이 다른 음악과 다른 점은 뭘까, 어떤 것이 과연 바흐의 음악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바흐 곡의 음악적 구조와 의미, 그리고 후대 음악가에 미친 영향에 골몰하면서 그는 바흐에 관련된 자료라면 뭐든지 찾아 모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다시 꺼내 읽고, 행여 예전 생각과 바뀐 느낌이 들거나 새로운 발견이 있으면 꼼꼼히 적어놓으며 자료를 만들어왔다.
양씨는 그렇게 모은 CD 1만장, LP 5천장을 가득 채워 지난해 르네상스를 차렸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바흐강좌를 열고 있다. 물론 양씨가 직접 강의한다. 매주 월·수요일 오후 1시에서 3시까지, 목·금요일 오후 8시에서 10시까지 열리는 이 강좌는 바흐 서거 250주년을 기념해 만든 것인데 이제 국내 바흐마니아들의 사랑방이 됐다. 이 강좌에 참가한 의사 최진(49)씨는 “두 시간이 길 것 같지만 일단 들어보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며 주변사람들에게도 권해주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 그냥 바흐를 듣는 것이 아니고 어떤 멜로디가 어떻게 반복되는지,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좋은지를 철저히 분석하며 듣는 연구원 수준의 수강생들이 대부분이다. 수업을 듣기 위해 지방에서 오는 이들도 있다.
이런 아마추어 연구강좌들은 예비전문가를 키워내기도 한다. 사단법인 숲해설가협회가 마련하고 있는 ‘숲을 연구하는 모임’은 숲에 관한한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 매주 화요일은 서울 종로5가에 있는 강의실에서, 토요일은 정오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직접 홍릉수목원이나 우이동계곡 등 현장을 걸으며 수업을 받는다. 수업내용은 숲의 생태계 구성, 숲의 변천과정, 숲 가꾸는 방법 등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보로 가득하다. “집 근처 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경기도 양평에서 오는 사람부터, 환경 문제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온다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이 강의에 참석한 중학교 도덕 교사 안영미(35)씨는 “여기 오면서부터 환경운동에 대해서 막연하게 갖고 있던 관념을 현장실습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깨닫게 됐다”고 만족해했다.
진정한 ‘공부의 세계’를 향하여
아마추어로 연구를 시작해 최고 전문가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모든 아마추어 연구자들의 가슴에 들어있는 꿈이다. 꼭 연구 수준이 높고 엄청나지는 않아도 그 자체로 족하지만 그래도 한번 전문가가 되보고 싶다는 꿈은 이들의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자극제이자 원동력이다. 그리고 실제 그런 경지에 오른 아마추어들도 있다. 지난 8일 늪에 대해 공부하는 ‘습지와 새들의 친구’를 발족한 ‘늪 연구가’ 이인식(김해 매동중학교 사회과 교사)씨도 그냥 좋아서 시작한 연구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권위자가 된 경우이다. 언론기관에서도 늪에 관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늪에 관한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면 이씨를 출연시킬 정도다. 그리고 이젠 그 공부를 바탕으로 자기가 연구하는 늪을 지키고자 하는 환경전사로 나섰다.
이 교사가 늪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난 91년, 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유출 사건으로 받는 충격 때문이었다. “경남은 사행천인 낙동강이 있어서 내륙습지가 많은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습지가 너무나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었어요. 처음엔 그냥 너무 안타까웠는데 그 다음엔 한번 이 문제를 제대로 공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자료를 찾게 되고 점점 자료가 쌓이게 되었죠.”
이제 그는 늪 공부를 넘어서 늪 보존운동까지 펼치는 환경문제를 새로운 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습지와 새들의 친구’는 늪 공부와 함께 늪 보존을 위한 환경운동도 함께 펼친다. 참가자들도 모두 이씨처럼 아마추어들이다. 어린이 자연교육을 위해 자녀들을 동행하는 학부모도 적지 않다. 전체 회원은 200명 정도로, 대부분이 직장인이다. 개인적으로 축적한 지식이 모임을 통해 재배포되어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경우다.
사람을 조직의 부속으로 만들어가며 각박하게 몰아치는 이 경쟁사회 속에서 이들의 이런 연구는 마치 달관한 것처럼, 또는 어리석게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평소 마음속 품고 있던 욕망, 일상의 논리에서 떠나 어린 시절, 또는 학창시절 해보고 싶었던 “진짜 해보고 싶었던 공부”의 욕망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선각자들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자신의 그런 즐거움을 예찬한다. 물론 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는 즐거움이다. 생활한복회사에 다니면서 일본 록음악을 연구하고 있는 강은진(28·여)씨는 “직장생활과 별개로 존재하는 자기세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거 아니에요?”라고 반문한다.
셰익스피어 연구에 재미를 붙여 원어 희곡전집을 독파했다는 벤처기업 직원 이민영(25)씨는 자신의 뒤늦은 공부를 “잠들어 있던 뇌세포가 깨어나는 짜릿함”이라고 표현한다. 학창 시절 기계적으로 주입되었던 공부와는 달리 자신의 흥미에 이끌려, 아무 이해타산 없이 공부하는 것은 또다른 쾌감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이들의 이런 도락을 진짜 본업에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소일거리쯤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 업무에 도움을 주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쉬다 갈 수 있는 정신의 공간을 짓는 사람들의 욕구는 꺾이지 않는다. 이들이야말로 공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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