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담론을 벗어나 내면 속으로…기나긴 모색기 통과한 시의 새로운 경향… 낮은 메아리의 허전함은 무엇으로 메울건가
최근의 시적 경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90년대 후반의 쟁점적인 문제제기와 화두 중심의 시 담론도 한풀 꺾이고 난 뒤, 요즘에는 아주 낮은 메아리가 가끔씩 들려오고 있다고 할까. 아니면 “2000년대는 단순히 시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담론을 생산하는 시, 창조적인 정신을 일깨우는 시에 관한 탐구가 좀더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시인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시적 자아의 내면성’을 바라보는 ‘자기 해부’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최근의 시적 경향은 담론 중심에서 탈피해 이제 시인들 각자가 훨씬 다양한 개성과 새로운 목소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성시인들의 새로운 상상력 도드라져
특히 올 초부터 발간된 시집 가운데에서 김선우, 정복여, 조용미 등 여성시인들의 섬세한 시적 언어와 숨결, 그리고 정서는 단연 올해 시단의 풍요로운 성취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이들의 시가 담론과 화두 중심의 건조함과 딱딱함으로부터 벗어나 내면화된 미학과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90년대 시단의 긴 모색기를 통과하고 나온 첫 결과물로 새로운 시적 징후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또 남성시인으로는 송찬호의 <붉은 눈> <동백>과 최영철의 <일광욕하는 가구>, 이윤학의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태준의 <수런거리는 뒤안>, 송종찬의 <그리운 막차> 등의 시집이 90년대 후반의 문제의식을 꾸준히 밀고나가면서 새로운 시적 영역을 개척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송찬호 시인의 미학적인 문제의식과 장인정신이나 최영철, 이윤학, 문태준, 송종찬 등의 뚝심은 한마디로 시적인 ‘정면돌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잃어버린 한국 시의 출구에 대해 이들 시집은 상징적인 ‘비상구’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많은 수의 독자를 지향하는 시 쓰기의 문제점을 의식함으로써 오히려 시적 품위와 깊이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독자의 눈치를 보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주체성 없는 유행담론에 편승하는 시가 아니라 저마다의 고유한 목소리를 고수하면서도 존재의 깊이와 섬세한 파동을 엮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올해 상반기 시단의 성취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아주 낮은 메아리’ 속에 담긴 허전함과 상실감 혹은 슬픔의 여운을 감출 수는 없다. 아마도 이런 기분은 시적 위로와 치유에 대한 기대 또는 현실과 일상을 지배하는 ‘도구주의’를 견제하는 시적 저항에 대한 확신이 그만큼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와 시인 사이의 불화와 불신, 그리고 심정적인 거리감을 인정하면서 쓴 시들은 ‘은둔’과 ‘정신적 귀족주의’로 대변되는 새로운 엘리트주의와 댄디이즘을 피할 수는 없다.
대중성은 시인의 정신 위협하는 적
이런 함정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정면돌파’를 선택한 시인들의 선택은 그런 점에서 또한 문제적이다. 왜? 그것은 아마도 그것이 유일한 비상구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인 스스로의 진정성의 확보와 자기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성이 그들을 내면과 자기의식의 심해 속으로 잠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겉으로는 ‘문학주의’를 고수하는 고집스러운 태도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문학의 심연과 깊이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시’는 너무 많은 외풍(外風)에 흔들려왔고 그 대가로 부유하는 유행을 따라 춤추며 변덕스러운 독자들의 박수를 구걸해야 했다. 이 점에서 현란한 죽음의 도시 안에서 지금, 대중성은 여전히 ‘시인의 정신’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다. 김춘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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