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마음에 안기는 시의 울림능동적인 독자로 시를 읽기 위하여… 시인이 공들인 낮은 목소리에 감각 집중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국어책 바깥에서는 시를 읽어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들일 겁니다. 국어책에 실린 시들을 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참고서가 일러주는 대로 밑줄 치고 외우고 시험보고 하면서 우리는 시에 대한 첫인상을 망쳤습니다. 한편의 시에는 우리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배경과 원리가 있고,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시를 읽지 못하는 ‘의존적인 독자’가 양산된 것입니다. 이 대목이야말로 우리 교육이 학생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의 중요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읽는이가 시 속으로 깊숙이 젖어들어야
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읽는 사람 스스로가 깊숙이 젖어들어야 맛볼 수 있는 열매입니다. 마음을 열고 시인의 아주 작은 목소리에 귀기울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한갓 종잇장 위의 검정 얼룩에 지나지 않지요. 만인이 명시라고 입을 모아 칭송해도, 내 눈에 들지 않고 내 귀를 울리지 않으면 하찮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바로 당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시가 어렵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 드물게 있는 값어치 있는 것들은 다 조금씩 어려운 법이 아니냐고 묻고 싶습니다. 좋은 것은 쉽게 얻기 어렵습니다. 시는, 신문에 실린 이런저런 글을 읽는 눈길로 한번 훑어 읽어서 온전히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혼선은, 시가 우리 모두 능숙하게 사용하는 말과 글이라는 도구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비록 같은 도구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시에서 쓰이는 말과 글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그것과 많이 다릅니다.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시에서 쓰인 낱말은 가장 공들여 선택한 결과입니다.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시인들은 마음속에서 아주 긴 글을 씁니다. 그러니까 좋은 시 한줄은 한 문단의 산문과 맞먹는 얘깃거리를 등뒤에 숨기고 있는 때가 많습니다. 시인들은 직설적으로 풀어 말하는 일을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까지 생각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곡절도 세상에는 많으니까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심사를 굳이 말로 하려는 사람이 시인이고 그러다보니 어렵게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얼마간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준비할 대가는 마음의 집중입니다. 세상에는 그냥 큰소리로 웃으며 들을 이야기가 있고, 심각하게 들을 이야기도 있습니다. 시는 시인이 오래 고민한 끝에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시는 그 고민과 조심스러움이 우리에게 옮아와 자신의 삶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둘러보게 해줍니다. 새로운 것은 늘 조금은 난감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바람직한 조건에서 이는 우리의 건강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스스로 이 난관을 통과하도록 애쓰게 만듭니다.
삶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
이 과정을 지난 ‘나’는 ‘예전의 나’와 달라집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내면의 성장이겠지요. 지금 내 수준에 꼭맞는 것은 나에게 위로는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성장으로 이끌기는 어렵습니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친구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분발하게 하는 친구도 필요합니다. 시도 꼭 그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시를 써본다고 합니다. 이를 혼자 간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한 사람도 있겠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시의 힘을 빌린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놀랐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불심(佛心)을 가지고 있다는 말처럼, 애초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시심(詩心)은 깃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결혼에 성공하고 나서, 시인의 마음을 덮어버리고 더 관심을 쏟는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되지만, 시인들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시인의 마음에 아주 단단히 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평생 시를 쓰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게중에는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시 쓰는 일뿐인 사람도 있고, 시인이라는 ‘멋진’ 명패를 가슴에 달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인의 마음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땅에는 1만명이 넘는 시인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멋진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시인다운’ 특이한 언행을 일삼는 별난 사람들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따로 생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평범한 많은 사람들처럼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귀한 시간을 쪼개어 시를 쓰고 발표하고 몇년에 한번씩 시집을 냅니다. 사람들이 외국어 학습서와 처세술에 관한 책을 고르거나, 나른한 일상이 싫어 신문광고에 난 소설책을 구하러 들른 서점 한 구석에 시집들이 꽂혀 있습니다. 화려한 베스트셀러들 너머 눈길 닿지 않는 구석에서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사람들의 입에 두루 오르내릴 기회를 얻지 못한 좋은 시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손 닿는 대로 몇권을 권합니다. 기호와 취향이 다르므로 누구에게나 좋은 시집은 아주 드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집들이 모든 독자들의 입맛에 맞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참고로 시집들마다 간단한 소개를 덧붙입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제가 좋게 본 풍경에 전혀 공감하지 않을 수도, 전혀 다른 매력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앞서 썼다시피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누구의 안내도 도움도 없이 시에 이르는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토론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토론은 좋은 시가 우리를 이끌고가는 가장 값진 만남의 자리이며, 가장 고양된 자리입니다. 소개하는 시집 가운데 적어도 한권 정도는 이 가을, 시를 다시 만나는 독자의 책상위에서 또 그의 호주머니속에서 제몫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웃의 시인을 만나고, 마침내 자신의 마음속에 숨죽이고 있던 시인의 마음을 만나고, 시를 사랑하는 동지들을 만나기를 또한 바랍니다.
이희중 시인이 권하는 시집 5권
백석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년) 유랑자의 시. 외로운 사람, 시를 통해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합니다. 백석은, 기성세대는 교과서에서 배울 기회가 없었던 시인입니다. 1980년대 후반 월북 문인 해금조처 이후 가장 크게 부각된 서정시인입니다. 요즘의 학생들은 국어책에서 이 시인의 시를 배웁니다. 저는 이 시인의 시가 식민지시대 우리 시의 가장 높은 성취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했던 젊은 시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삶, 사랑, 가족, 고향, 추억의 아름답고 슬픈 모양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장석남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년) 잘생긴 한량의 시. 낡지 않은, 가볍거나 유치하지 않은 서정적인 말들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장석남 시인은 빼어난 감각을 가진 젊은 서정시인입니다. 제목에 쓰인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는 구절은, 이 시인이 어떤 방법으로 몇 마디 말 속에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송두리째 숨기는가를 보여줍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아주 드문 순간을 빼고는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일 테지요. 그 무수한 그리움을 지나치지 않은 말로 다스리는 시인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이동재 <민통선 망둥어낚시>(하늘연못, 1999년) 전직 문학교수의 시. 유머의 효용을 잃지 않은 채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젊은 정신이 돋보이는 시집입니다. 이동재 시인은 입바른 소리하다가 지난 봄 자신이 다섯해 동안 학생을 가르치던 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개성적인 목소리 뒤로 흐르는, 이른바 386세대가 세상을 보는 눈길을 살피는 일이 독자의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과 불가피하게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을 요모조모 살피면서 웃음과 울음,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감성과 이성, 안주와 탈출을 아우르는 사람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 길은 민통선에서 지리산 자락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마종기 <마종기시전집>(문학과지성사, 1999년) 정 많은 의사의 시. 너무 정이 많아서 살아가기가 녹녹지 않은 사람에게 권합니다. 젊은 날 마종기 시인이 쓴 시들은 사랑의 일로 상처받은 사람에게 특히 위로가 됩니다. 먼 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인은 고국의 여러 곳에 묻어 있는 자신의 어린날과 젊은 날, 그리고 크고작은 인연들을 담담하게 반추하면서, 일상의 계기들 가운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큰 삶과 작은 삶의 접점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청년부터 장년까지 그의 시가 그린 궤적을 좇아 읽으며 지적이면서 동시에 서정적인 한 인격의 고뇌와 성장을 살필 수 있습니다.
김선우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년) 처녀이면서 주부인 여성의 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고달픔을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집입니다. 김선우 시인은 세상의 모든 암컷들은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젊은 여성의 영혼 속에서 지속하고 명멸하는 육체적 궤적의 신비에, 여성 독자는 깊이 공감할 수도, 남성 독자들은 많이 놀랄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특유의 과감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이 세상과 삶을 투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몸으로 드러난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집에서 자주 눈에 띄는 선정적인 언어들조차 성스럽다고 느끼게 합니다.
이희중/ 시인·문학평론가·전주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ntee@jeon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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