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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삶의 고비에 길이 있었다 청춘이 머물고 추억이 엉켜있는 그 길… 혹독한 시련도 감싸주던 길을 떠올리며
경춘가도… 하고 혼자 가만히 불러볼 때가 있다. 그때 내 안의 어딘가에서 둔중한 현 하나가 슬프고 아름답게 울리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강원도 춘천과 서울을 잇고 있는 이 길은 내 청춘의 길이었다. 내 청춘의 기쁨과 좌절이 녹아 있는 길이었다. 이 길을 기차를 타고 영화 <벤허>를 보러 올라왔었다. 고교 시절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버린 종묘 앞 숲을 오래 거닐었던 기억이 어제처럼 남아 있다.
아직도 가슴에 울리는 경춘가도
대성리, 청평, 가평으로 이어져서 춘천에 와 닿는 이 경춘가도에는 얼마나 많은 내 청춘의 족적이 남아 있는가. 아니 그 길가에서 나와 함께했던 햇살과 바람과 물결은 얼마나 깊이 내 청춘에 새겨져 있는가. 봄철 아카시아꽃이 지기 시작하면 이 길에는 눈발처럼 꽃잎이 흩날렸다. 어느 핸가의 봄 밤에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이 꽃잎들을 바라보던 날의 말없는 행복이여. 너는 경춘가도와 함께 나를 부축해준 마음의 원풍경이었다. 춘천 외곽의 방죽에 서서 경춘선 완행열차가, 그 마지막 밤차가 어둠의 강 저쪽을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밤열차를 신의 허리띠라고 불러보았었다. 창마다 불을 켜고 어둠의 바다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 빛의 고리들을 바라보며 ‘신의 허리띠’라고 속삭였던 청년도 네가 길러준 내 청춘의 초상이었다. 첫여자를 만나 들끓는 사랑에 빠져든 것도 경춘가도가 만들어준 내 젊은 날이었다. 우리는 이 길 위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견딤과 이겨냄의 갑옷을 하나씩 입어 나갔다. 그 청년은 더 자라서 작가가 되었고, 그와 함께했던 첫사랑의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딘가 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극장의 마지막 입장시간도 끝난 그런 시간에 아내와 나는 문득 무엇에 끌리듯 경춘가도 그 밤길을 나설 때가 있다. 작은 읍내와 마을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야산 밑의 농가가 우리 곁을 스쳐간다. 그때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말을 꺼낸다. “그때 저기에서….” 수없이 많은 추억의 실타래를 우리는 이 길에 묻었던 것이다. 경춘가도 그 길이 나에게 매어준 저 수많은 ‘빛의 허리띠’여. 제주에서 3년을 살았다. 그리고 제주를 떠나올 때 길 하나를 가슴에 묻었다. 한라산을 넘는 길은 둘이 있다.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최단거리인 이 길은 흔히 ‘5·16도로’와 ‘제2횡단로’로 불린다. 5·16도로는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씨가 구악에 물든 사회를 정화한다는 이름으로 대도시의 폭력배들을 체포 구금한 뒤 이곳에 감금해, 그 험난함 때문에 정부에서도 놓지 못하고 있던 한라산을 넘는 길을 뚫는 공사판의 노역자로 쓰면서 붙은 이름이었다. 깡패가 닦은 길인 것이다. 그 길이 이제는 드넓게 단장되어 제주도의 물류유통과 관광산업에 한몫을 하고 있다.
불타는 유채꽃에 위로받던 제주도의 길
제주에서 1100고지까지의 가파른 이 길은 그 무렵 나에게 무위(無爲)를 가르치는 도정이었다. 아내와 어린 딸 하나. 우리 가족은 살아가는 일의 덧없음이 몸을 휘감을 때면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이 길로 나섰다. 길 중간쯤에 천왕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때 겨우 말을 배우던 딸아이까지, “아빠. 천왕사 가자” 하고 조르곤 했으니, 덧없음은 오히려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봄에 이 길을 내려오자면 북제주의 들판은 노오란 유채꽃으로 불타고 있곤 했다. 여름밤에 이 길을 내려오자면 바다에는 무슨 그리움의 실체처럼 오징어배들이 줄지어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가을이면 이 길은 억새들의 땅이 되었다. 늙어도 삶은 아름다우리라는 계시처럼 흰 억새꽃들이 무리지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은 처연했다. 겨울에 이 길은 눈꽃의 황홀함으로 빛났다. 그것은 신이 희디흰 스프레이를 들어 한라산을 칠해 놓으면 저럴까 싶은 모습이었다. 세칭 ‘한수산 필화사건’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단 한줄의 글도 쓰지 못하던 그 무렵, 얼마나 많이 이 길을 올랐던가. “아빠. 천왕사 가자” 하는 어린 딸아이와 함께 그 절에 올라 샘물도 먹고, 부처님도 뵙고, 그리곤 우리는 길가 숲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이는 음료수와 과자를, 나는 술을 마시거나, 나뭇잎을 따 배도 접고, 인형도 만들고, 모자도 만들었다. 아이가 품안에서 잠이 들고, 바람소리에 섞이는 새소리뿐인 이 길에서 나는 무엇을 잊으려고 했던가. 무엇을 용서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렸던가.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저는 결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볼에 눈물이 흐르곤 했던가. 잠이 든 아이를 데리고 이 길을 내려오느라면 바다에는 띄엄띄엄 고깃배의 불빛이 떠 있었다. 가없는 어둠의 바다에 떠 있는 몇개의 불빛…. 그것은 절망의 증표였다. 허무의 자궁이었다. 그러나 그런 폐허에 가까운 정서는 차라리 얼마나 많은 힘으로 그때의 나를 쓰다듬어 주었던가, 그 길 위에서.
6번 국도를 오가며 느끼는 단상들
서울과 양평을 잇는 6번 국도. 이제 내가 ‘마감’을 향해 가야 할 길을, 오늘도 오간다. 2000년을 보내면서 나는 남한강 이포나루가 바라보이는 양평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 창문 가득 강물이 밀려들어오고, 아침이면 안개가 집 전체를 둘러싸는 집이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영하당(迎河堂)이다. 흔히 부르듯 이름하자면 작업실이 되는 셈이다. 매일 오가거나 혹은 일주일에 나흘을 그곳에서 보내려 한다. 써야 할 글들을 거기서 써내면서, 해야 할 일들을 거기서 마감하려 한다. 남한강을 옆에 끼고 가는 이 길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요염하다. 서울을 지나자마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안개 속에 서면 우리는 모두 혼자다’라고 한 H. 헤세를 떠올리며 안개에 파묻힌 길을 어느 날은 오갔다. 이 길에서 만나는 비는 마치 무슨 소식을 기다리듯이 내린다. 이 길은 강 건너편에서 쉬임없이 변하는 한국의 네 계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땅에 태어남을 다행으로 여기게 한다. 이제 내가 가고 있는, 그리고 가야 할 길이다. 서울과 양평을 잇는 6번 국도. 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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