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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주를 새긴 한국의 색깔 오방정색 중심의 우리 민족 색채관념… 자연을 닮은 전통염색의 깊은 맛
색은 흔히 상징체계로 쓰인다. 교통신호에서 빨강, 파랑, 노랑은 정지, 진행 또는 주의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이런 색들은 또한 나라별로 저마다의 상징을 지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중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색깔은 붉은색이다. 길조와 행운을 나타낸다는 이 색은 옛적부터 중국인이 선호해온 대표적인 색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모든 선전 광고에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빨간색을 죽음의 색으로 보는 나라나 민족도 얼마든지 있다. 색의 이런 상징과 기호 기능은 논리의 틀을 가지고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한다.
우리 민족은 정말로 백의민족이었나
흔히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난 홍색·청색·황색·녹색 등 갖가지 색깔의 옷을 입은 생활풍속도나 백제에서 16품위의 관위를 색대로 표시한 제도, 신라에서도 품계에 따라 자색·비색·청색·황색의 옷을 입게 했던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우리 민족도 갖가지 색깔을 염색하는 기술이 발달해 있었고 다양한 색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우리 민족의 색채관념은 음향오행의 우주관과 방위관념에서 나온 오방정색(五方正色)이 핵심이다. 이 오방정색, 오방색은 좌청룡인 청색, 우백호인 백색, 남주작인 붉은색, 북현무인 검은색, 그리고 그 중간인 황색이다. 이 다섯 가지 색깔을 기본으로 사이 색인 홍(紅)·벽(碧)·녹(綠)·주황(朱黃)·자색(紫色)이 더해졌다.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색들은 오행사상에 의해 또다시 많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파랑색(靑)은 오행 가운데 나무(木)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봄, 방위로는 동쪽이다. 파랑은 하늘의 빛, 바다의 빛, 그리고 물의 빛으로서 우리 신화의 우주론에서 큰몫을 차지하고 있다. 파랑이 동쪽이므로 해돋이, 밝음, 맑음 등과 연관되는 것이다. 신생(新生)과 약동하는 힘을 파랑이 상징하는 것도 천지개벽, 천지창조의 첫 순간의 빛을 상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광대 가면극 놀이에 나오는 청제장군은 오행설에서 봄을 맡은 신이다. 동시에 파랑은 소생, 기쁨, 어짊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태어날 때 엉덩이의 푸른 반점에서처럼 파랑은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빨강색은 오행 중에는 불(火)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여름, 방위로는 남쪽이다. 옛 사람들은 붉은색이 잡귀를 쫓는 색깔이라고 믿었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문짝에 뿌려 액운을 막던 것이라든지 붉은 모래나 붉은 부적 등을 귀신 쫓는데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붉은색의 상징에 따른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이 봉선화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도, 왕의 정복인 곤룡포를 붉은 비단으로 지은 것도 바로 이 붉은색이 역시 벽사와 길상을 표상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파랑과 빨강은 물과 불처럼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했지만 악귀를 쫓거나 예방하는 의식에 함께 사용되는 색이기도 했다. 동쪽의 색인 파랑과 만물이 무성하는 남방의 색인 빨강이 모두 양색(陽色)으로서 음기(陰氣)인 악귀를 쫓는 색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색을 벽사의 색이라고 한다. 아이가 출생하면 문전에 솔잎의 푸른 가지와 붉은 고추를 꽂고, 금침의 잇색으로 남색과 홍색을 쓰며, 사주보는 청색과 홍색 비단으로 한다. 또 서낭당을 지나 갈 때에는 돌이 푸른나무가지와 붉은 천을 꽂아 길하기를 바란다. 모두 파랑과 빨강은 벽사의 색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황색은 오행 중에는 흙(土)에 해당되고, 방위로는 중앙이고 서울을 상징한는 색깔이며, 풍요를 나타냈다. 노랑색은 삶에 대한 조명, 직관, 사물들을 포용하는 힘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색깔 속에 세계관을 닮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흰색은 단순한 고적의 이미지가 아니라 고결한 아름다움이 내면에 서려 있는 고적이다. 존대의 고적이며, 절개의 고적이다. 마지막 검은색은 사신도의 현무에 해당되며 오행 중에는 물(水)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겨울, 방위로는 북쪽이다. 검은 빛은 밤, 공포, 불행, 파멸,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검은 상장이나 조기는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으면 지하에 묻혀 빛이 없는 영원한 암흑의 세계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색은 동시에 정직과 명예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법관의 법복은 검은색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오방정색의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은 전통적 색감체계를 이뤘다. 그리고 이 색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바로 천연염색이었다. 자연의 재료로 물들인 옷을 입는 그 자체가 자연을 입는 것이었다. 전통 염색에 쓰이는 식물 염료는 단순히 물감의 의미만이 아니라 병의 치료약이기도 했다. 전통 생활 색깔은 또한 색상 자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염색 천의 특징적인 재질감을 십분 살려준다. 그리고 섬유를 더욱 질기게 하며 좀벌레나 악취 등을 막아주기도 했다. 전통 염색 소재가 대부분 한약 의약재인 점으로 볼 때 이런 전통염색법은 건강까지 생각하는 지혜의 소산이었다. 쪽 역시 살균성이 있고, 염색재인 잇꽃과 치자는 위장병 치료 및 피부병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다.
식물 염료는 병의 치료약으로도 쓰여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전통염색 옷들은 튀는 법이 없이 다른 색깔과도 잘 어울리는 색감이 있어서 지금의 화학염료가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화학 염료로 물들인 옷은 빛깔이 좀 곱다 싶으면 서로 잘난 체하고 다른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튄다. 그러나 자연의 빛깔은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어 결코 촐랑거리지 않으며 자기색깔을 유지하고 다른 색깔과 어울린다. 그래서 화학염료로 치장된 옷들은 눈을 따갑게 하지만 천연염료가 만들어내는 빛깔은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화학염료는 햇볕을 받아 퇴색하기 시작하면 마치 퇴기(退妓)처럼 추해지게 마련인데 자연 염료의 빛깔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단아하고 깊어지는 것도 뛰어난 장점이다. 그래서 천연염료로 염색한 옷을 해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와 입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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