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11월08일 제333호 

[특집] 남성 주부, 그 험난한 여정

아빠의 육아 참여를 가로막는 후진적 제도… 직장문화와 사회적 편견도 걸림돌


(사진/아버지의 육아휴직이 소수의 용기 있는 남성들에 의해 서서히 개척되고 있지만 법과 제도는 여전히 이들을 '국외자' 취급하고 있다)


‘육아를 하지 않는 남자는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최근 일본 후생성이 제작한 포스터에 등장하는 문구다. 한국남자들이 보면 상당히 섬뜩한 거부감을 느낄 만한 내용이지만, 아버지의 육아 참여를 강조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핀란드나 노르웨이 등 북유럽의 국가들은 특히 아버지의 육아 참여를 의무라기보다는 하나의 권리로서 인식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성 평등법’(Gender Equality Act)과 같은 이름의 법률에 아이를 가진 아버지에게 일정 기간 육아휴직을 가지도록 하는 제도(이른바 ‘파더 쿼터 시스템’)를 권리로 규정하고 있다. 1979년 이 법을 제정한 노르웨이의 경우 아버지에게 4주 동안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최근 남성들이 이 제도를 이용하는 비율은 70% 안팎이라고 한다.

아버지들은 이 제도를 이용함으로써 육아의 소중함과 가사노동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고 이 경험은 평생토록 이어져 가정과 사회를 튼실하게 유지시키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역시 이같은 남녀평등 선진국들의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민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도 지난 1992년 제정된 남성들의 육아휴직 제도를 적극 권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남성운동 관련 단체들은 남성들의 육아 참여를 권리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육아휴직 신청조차 자유롭지 못한 실정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법적으로 남성 노동자가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적용대상 범위가 좁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1조(육아휴직)에 따르면 ‘생후 1년 미만의 영아를 가진 근로여성 또는 그를 대신한 배우자인 근로자가 그 영아의 양육을 위해 휴직을 신청하는 경우에 이를 허용하도록 한다’고 규정돼 있다. 즉, 남성 노동자가 휴직을 하기 위해서는 여성 노동자를 대신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셈이다. 여성 노동자가 전업주부이거나 자영업자, 또는 국가공무원 등 특수신분에 있으면 애초 신청이 불가능한 셈이다. 또 육아휴직 기간을 1년 이내로 하고 영아가 생후 1년이 넘는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도록 해 만 한살이 넘는 아기들의 경우 남성들은 물론 여성들의 육아휴직도 가로막고 있다.

노동부는 내년 하반기까지 ‘남성 노동자의 배우자가 반드시 여성 노동자여야 한다’는 제한조항을 없애기로 해 남성 노동자의 육아휴직이 다소 쉬워질 것으로 보인다.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 1주일을 허용하기로 한 것도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동부는 또 육아휴직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무급휴직 원칙을 바꿔 육아휴직 동안 고용보험기금에서 30% 정도의 임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살 미만’이라는 휴직 대상 영아의 나이 제한 조항을 고칠 계획은 없다고 노동부 관계자는 밝혔다. 국가공무원법의 경우 육아휴직자는 대상자가 한살 미만일 때에 신청할 수 있어 남녀고용평등법과는 차별을 두고 있어 논란의 소지가 있다.

노동부에 문의한 결과 육아휴직과 관련해 남성 노동자의 육아휴직률은커녕 여성 노동자의 휴직률마저 잡혀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와 가능성을…


(사진/살 맛 나는 가정을 위하여…. 여성 노동자들도 아이가 한살이 넘으면 육아휴직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남녀평등 선진국들처럼 정치·교육·문화·가족 등 사회의 전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와 가능성을 주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들의 육아휴직 문제도 이 법을 통해 당당한 권리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제노동과 재택근무의 확대로 인한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여성수입의 향상, 그리고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확산 등 겉으로 드러난 변화와 수치들은 이제 한국사회가 아버지 육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나 남성들의 육아휴직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법 제정에 앞서 좀더 근본적인 사회구조와 사회의식의 변화가 선행해야 한다. 즉, 남성들의 육아휴직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 아닌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밤늦게까지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직장문화라는 것이다.

육아체험 남성들은 한결같이 “한국 남성들이 육아를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직장생활에 시달린 채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와 동등한 또는 어머니보다 더욱 큰 사랑과 관심을 쏟기는 힘들다.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을 달라”고 외치는 아버지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지 않는 한 육아휴직은 영원히 먼나라 얘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비율이 높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손자·손녀 양육 현상 역시 젊은 세대들의 과도한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

또다른 문제는 남녀 모두를 옭아매고 있는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아이보는 남자=실업자’로 보는 편협한 시각을 없애는 일이다. 육아휴직을 하고 싶어도 고민하는 대부분의 남성들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남성들은 특히 육아휴직을 하는 동료들에 대해 ‘자리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편견에서 해방돼야 하며, 전업주부들도 육아를 전담하는 남성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봐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숙한 사회의 진짜 아버지를 보고 싶다


(사진/아버지들의 육아휴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다. 이런 직장문화를 바꾸지 않고 남성의 육아 참여를 기대하는 것은 속절없는 바람이다)


올해 4월 육아에 전념하고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 대변인 직을 박차고 나간 제임스 루빈은 한국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사임을 발표하던 날 미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딸랑이와 모빌 등 아기선물을 잔뜩 안겨주며 축하를 보냈다.

영국의 언론들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네 번째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총리가 출산휴가를 갈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블레어 총리는 “국정공백을 우려해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여성계와 노동계는 휴가를 가도록 은근히 압력을 행사했다. 그뒤에는 총리 부인 셰리가 환경을 고려해 새 아이는 천기저귀를 쓴다고 결정했다는 것이 뉴스로 나오기도 했다. 1998년에는 파보 리포덴 핀란드 총리가 2주일 동안의 출산휴가를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세를 키우는 일을 이처럼 소중히 다루는 사회가 진정 성숙한 사회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 몇년 동안 공직을 쉬겠노라고 선언하는 ‘진짜 아버지’들을 볼 수 있을까.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