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10월25일 제331호 

[특집] 난 ‘배부른 돼지’였다?

인문학 강좌에서 ‘주경야독’하며 일상의 때를 벗는 직장인들


(사진/서울 인사동에 자리잡은 철학아카데미 강의실에서 조선시대 인물분석을 듣는 수강생들. 11명 중 9명이 직장인이다)


수요일 저녁, 서울 인사동의 허름한 건물 7층에 위치한 철학아카데미 강의실. 조선시대 신숙주 대 조광조라는 인물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의 철학을 강의하는 교실 안에는 11명의 수강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강의를 듣고 있다. 이 가운데 아홉명은 퇴근길을 서둘러 달려온 직장인들이다.

젊은 시절의 미련이 남아 있다면…

특허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정영태(39)씨는 부지런히 칠판과 프린트물로 시선을 옮기며 필기를 한다. “퇴근하고 역삼동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저녁 먹기도 빠듯하죠. 그래도 수업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갈 때는 일상의 때를 조금은 벗은 것 같아 뿌듯해요.”

전자공학을 전공한 정씨는 취미로 붓글씨를 쓰면서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혼자 철학책을 열심히 뒤적였지만 읽은 책이 여러 권 쌓여도 그다지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9월 철학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다. “수업을 들으니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던 단어들이 조금씩 줄기를 잡는 느낌입니다.”

5∼6년 직장 생활에 매여 살다가 발등을 슬쩍 가리게 된 배를 문득 쳐다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바로 배부른 돼지가 된 것은 아닌가.’ 퇴근 뒤 서점으로 달려가 <서양미술사> <장자이야기> 등 관심있는, 혹은 관심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의 교양서적을 사와 책장을 펼친다. 그러나 50쪽을 넘어가지 못하고 책은 먼지를 얹으며 책장 한구석에 얌전하게 자리잡는다. 이런 식으로 쌓인 책들을 보며 무력감에 빠져본 경험을 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젊은 시절 꿈꾸던 문학과 예술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도, 하루의 대부분을 고단한 노동에 바치는 샐러리맨이 혼자만의 의지로 공부를 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학습의욕을 다독이는 크고 작은 인문학 강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용기를 내 문을 두드리면 ‘주경야독’하는 많은 동료들이 벌써 자리잡고 앉은 걸 발견할 수 있다.

지난 봄 문을 연 철학아카데미에서 전체 수강생 가운데 20%는 직장인들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읽기’ 등 전문강좌들은 거의 대학원생들로 메워지지만 이정우 교수의 ‘근대성의 빛과 그늘’ 같은 입문강좌는 A반과 B반으로 나눠서 수업을 해야 할 만큼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높다. “80년대 자연스럽게 사회운동과 접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젊은 날의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끼면서 빠지게 되는 정신적 사상적 혼란이 철학에 대한 욕구를 분출시키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하는 철학아카데미의 이정우 교수는 “빡빡한 시간을 쪼개서 오는 직장인들이 수업에 임하는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라고 말한다.

92년 일반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처음 개설해 현재 1만5천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민예총의 문예아카데미는 일반인들을 위한 대표적인 인문학 강좌프로그램이다. 93년 유홍준 교수가 진행하는 ‘한국미술사’ 같은 교양강좌의 명강을 탄생시킨 문예아카데미에는 ‘미학’, ‘철학’, ‘문화연구’ 등 좀더 정공법에 가까운 강좌들을 진행시켜왔다. 지난 여름에는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수업한 ‘미학 오디세이’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올 가을학기 동안 문예아카데미는 휴교중인데 최근 늘어난 교양강좌들과 차별성을 가지는 수업내용을 개발해 올 겨울 다시 문을 열 예정이다.

최근 미술관마다 일반인들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20년 전통을 가진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미술아카데미나 호암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삼성예술아카데미를 비롯해 아트선재센터, 가나화랑 등 대규모 미술관마다 서너개의 강좌를 마련해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어놓았다. 작품 슬라이드를 보면서 진행하는 미술이론이 많지만 다른 분야의 강좌도 있다. 삼성예술아카데미의 경우 음대 교수들이 강의하는 ‘서양음악사’를 개설하고 있고 아트선재센터는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등 문화 전분야에 걸쳐 세 시간씩 입문이론과 공연, 견학 등 체험학습을 결합한 ‘교양강좌 프로그램’이 지난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가나화랑의 ‘풍수지리학교’ 역시 한국의 전통건축과 풍수지리학을 접목시키는 수업이다. 매주 목요일 8시부터 10시까지 열리는 이 수업에는 의사, 공무원, 박물관 직원 등 다양한 직종의 일반인들이 모인다. 14주 동안 하는 수업에 두번 포함된 현장답사에 단 한명의 결원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다들 열의가 대단하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장금애(38)씨는 이미 다른 인문학 강좌의 풍수지리학 수업을 두번 듣고 강사가 마음에 들어 이 수업을 등록했다. “책을 보다가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답사갈 때 몇번 따라나섰던 아들은 퇴근하고 들어와 서둘러 밥해주는 엄마보다 공부하는 엄마가 더 좋다고 말해요.”

강좌를 들을 때 좋은 점은 같이 공부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강좌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소모임을 만들어 강좌가 끝난 뒤에도 함께 공부하는 경우가 흔하다. 장금애씨는 수업에서는 다 소화하지 못하는 중국이나 한국의 풍수지리 원전들을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과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세무소에서 근무하는 정상원(29)씨는 신문사 문화센터의 영화강좌를 통해 잊었던 대학 시절의 꿈을 찾은 경우다. “대학 때 영화를 아주 좋아했어요. 영화에 관련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많았는데 취직하면서 꿈을 접었지요. 그런데 한 3년 정도 지나고 일에 적응도 어느 정도 하고나니 이렇게 머무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씨는 98년 한 영화강좌에 등록했다. 그러나 야근과 잦은 출장으로 중도에 포기했다가 지난해 겨울 한겨레신문문화센터의 영화이론입문과정에 재도전했다. 영화이론 수업을 두 학기 듣고 지금은 본격적인 비평수업인 ‘영화비평가 입문학교’ 수업을 듣고 있다.

강한 의지 없으면 소화불량될 수도

불규칙하고 업무량이 많은 직장생활로 정규적인 수업을 받기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또는 공부하기를 시작하기 전 자신의 적성과 인내심을 테스트해보고자 한다면 통신상의 학술동호회에 가입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이텔, 천리안 등 각 통신에는 여성학, 고고학, 심리학 등 많은 학술동호회들이 운영되고 있다. 전공자만을 회원으로 받는 곳도 있지만 하이텔의 고적답사동호회나 군사동호회처럼 가입제한이 없어 전공자와 비전공자들이 함께 공부하는 동호회에서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만나고 전문가들의 도움도 얻을 수 있다. 1500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는 고적답사동호회는 한달에 한번 답사여행을 떠난다. 답사후기를 사이트에 올려 토론을 하기도 하고 고건축, 미술, 불상 등 5개로 나뉜 분과에서 소모임을 해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하기도 한다.

1997년 결성된 아마추어 군사동호회에는 미국쪽에서 만든 북한의 전투력, 무소음 헬기의 비밀 등 일반인들은 이름도 외우기 힘든 무기에 대한 정보가 가득하다. 이 동아리는 육군, 해군, 공군으로 나누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나누고 서로 궁금한 점을 묻고 있다. 공군코너를 클릭하면 ‘관련 발언을 하실 경우에는 반드시 공개된 자료임을 입증하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출처가 명기되지 않은 게시물은 보안규정 위반으로 간주되어 통보없이 삭제됩니다’라고 써 있다. 이 동아리의 정보력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려주는 방증이다.

물론 혼자서 하기 힘든 공부가 강좌만 신청한다고 갑자기 머리 속으로 달려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일하는 김태희씨는 “보통 등록인원의 3분의 1 정도는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고 말한다. 주경야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으면 떠먹여주는 음식도 소화불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다. 자신이 배부른 돼지가 돼간다고 느껴질 때 과감하게 가까운 인문학 강좌의 문을 두드려보자. 이제 조금 죄는 듯, 책상과 붙은 의자에 앉아 아도르노와 장자와 고다르가 떠다니는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흐물흐물해진 듯한 두뇌가 팽팽해지는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 개설기관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철학, 미학 등 전통적인 인문학 강좌 중심. 다음 학기부터는 전문가 과정과 일반인을 위한 강좌로 나누어 진행된다/ 02-739-6856

한겨레신문문화센터/ 기호학, 영화이론, 디자인문화사, 건축 등 과목이 다양하고 현대의 사상이나 이론을 소개하는 강좌가 많다/ 02-3272-7575

철학아카데미/ 입문, 일반, 전문강좌로 나누어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강의하고, 문학이나 영화와 접목된 철학강좌들도 있다/ 02-722-2870

김상봉의 철학교실/ 서양철학사, 윤리학 등 학기마다 하나의 강좌가 진행되며 토론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02-927-9654

수유연구실 철학강좌/ 이진경씨와 여성학자 고미숙씨가 운영하는 연구실의 부설강좌. 니체, 동아시아 근대사상가 등 철학자 중심의 심도있는 수업이 진행된다/ 02-3673-1125

국립현대미술관 현대미술아카데미/ 슬라이드와 비디오 수업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현대미술의 흐름을 짚는 강좌와 작가론 건축 등 특강으로 나뉜다/ 02-502-0054

삼성예술아카데미/ 서양미술사와 서양음악사를 가르친다.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강사진이 구성된다/ 02-750-7878

아트선재센터/ 만화, 디지털 매체 등 현대 시각문화 전반을 분석하거나 건축, 사진 등 관련 장르들의 강좌가 다양한 것이 특징/ 02-733-8941

가나화랑/ 기초입문인 서양미술사, 한국미술과 풍수지리 등의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02-720-1020

전통문화연구회 고전연수원/ 명심보감, 사자소학 등 한자어의 구조와 문법을 배우는 기초과정에서 사서삼경까지 단계별로 10개의 한학강좌를 운영한다/ 02-762-8401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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