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09월20일 제326호 

[특집] 마음의 텃밭에 시를 가꾸자!

시단의 몸부림에 힙입어 대중 곁으로… 이 가을에 다시 시집을 펴보지 않으렵니까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내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일겝니다.”

천재 시인 이상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렇게 가을을 느끼게 마련이다. 천천히 오는 것 같아도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 한구석이 빈 것처럼 느껴질 때면 이미 가을은 다가와 있다.

멀어졌던 시들이 되돌아오는 조짐들

자연이 절정에 이르는 가을은 모든 이의 가슴에 시심을 불어넣어 시인으로 만든다. 한여름 새록새록 살이 찐 열매들이 푸른빛을 벗고 제 색깔을 찾아가는 가을의 모습은 절정인 동시에 금세 찾아올 조락을 앞두고 있어 더욱 감상적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가을에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픈 마음이 절로 솟아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가을은 시의 계절이다. “가을밤은 왜 이렇게 길고 길까요? 울고 싶은 밤, 누구의 노래를 듣고 싶은 밤이외다”라고 말했던 노천명 시인처럼 가을에는 누구나 마음을 달래줄 노래가 그리워진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책꽂이 틈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집을 다시 꺼내 보면 어떨까. 그동안 ‘시’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다면 올 가을 시와 한번 친해져보면 어떨까. 한동안 자취를 감춘 듯했던 시도 이제 다시 대중의 곁으로 차차 다가오고 있다.

90년대는 시와 세상이 멀어진 시대였다. ‘시의 시대’라고까지 불린 80년대와는 달랐다. 80년대에는 황지우, 이성복, 박노해, 기형도와 같은 걸출한 시인들이 등장해 대중에게 많은 시를 들려줬지만, 90년대는 누구나 이름을 떠올리는 새로운 시인도 찾기 힘들었고, 시가 시대의 아픔과 분노를 담아낼 여지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90년대는 시를 대신할 다른 도락거리들을 쏟아냈다. 넘쳐나는 영상이미지들은 시가 강조하는 ‘심상’을 퇴색시켰고, 사람들은 시 대신 상상하지 않아도 눈에 그대로 비치는 온갖 볼거리들로 눈을 돌렸다. “시가 죽었다”는 한탄이 시단을 지배했고, 시는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에 바싹 엎드린 모습이었다.

물론 시만이 움츠러든 것은 아니었다. 소설 역시 시와 마찬가지로 계속 ‘바닥’에 머물러 왔다. 최근에는 <가시고기>와 <해리포터…>를 뺀 소설은 거의 팔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시와 소설 모두 대중적인 것들만이 팔리고 순수 문학계열의 작품들은 시대착오적 느낌까지 풍길 정도로 쇠락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시는 다시 조금씩이나마 활력의 몸짓을 내보이고 있다. 아직 확실한 회생의 징조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껏 새로운 변화와 내적 충만을 추구하는 시도들과 자각이 시계에서 서서히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슈퍼스타는 없어도 90년대 후반 이후 시문학계는 김선우, 김기택, 이문재, 안도현 시인 등이 의미있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문학적 성과를 거둬왔다. 또한 시의 침체는 시대적으로 당연하므로 대중화보다는 내실을 기하며 시 본령에 충실하게 처한 상황에 맞춰 제 길을 가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이 시를 즐기기는 불가능한 만큼 거품을 빼고 진짜로 시를 사랑하는 소수의 ‘엘리트’ 독자들과 함께 수준을 높이자는 시인 황지우씨의 ‘문학 귀족주의’는 시단 내부에서 찬반이 엇갈렸지만 대안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라디오 낭송회와 인터넷 사이트도


(사진/최근 서점가에서도 시집이 활력을 얻고 있다.방송과 인터넷의 시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시집 진열대를 찾는 발길이 늘었다)


이런 인식과 함께 요즘 우리 시계에는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진 매체와 방식을 통해 대중에게 시를 알려나가려는 시도들도 등장하고 있다. 쉽게 시를 즐길 수 있는 통로를 늘리자는 시단 내부의 노력들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즘 부쩍 활발해진 각종 시낭송회이다. 시낭송행사는 90년대 후반 들어 여러 단체가 잇따라 열기 시작했고, 올해 들어서는 이름만으로도 문학계에서 권위를 지닌 문학과지성사(문지)까지 정기행사를 마련하고 나섰다. 문지쪽은 문지 계열의 주요 시인들을 차례로 훑는 ‘시의 숨결’ 시낭송행사를 지난 4월부터 매달 셋째 월요일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콘서트홀에서 열고 있다. 이 낭송회는 시인의 육성으로 시를 들을 수 있다는 매력으로 매번 100명 이상의 시 애호가들을 꾸준히 불러모으고 있다.

SBS라디오 프로그램 <김갑수의 책하고 놀자>에서 매주 금요일에 실시하는 시낭송 콘테스트도 문학계의 관심을 모으며 ‘우군’ 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이 코너는 애초 뜨거운 반응을 기대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제작진의 의도는 시를 대중과 같이 호흡하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반응이 뜨거워지면서 요즘에는 이 프로에서 가장 인기좋은 코너로 부상했다. 매주 세 사람의 지원자가 전화로 시낭송을 겨루는 방식인데 처음에는 김소월류의 교과서적인 시들이 주류를 이루다 요즘에는 기형도 시인의 시부터 온갖 다양한 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읽지 않고 암송하는 지원자들은 물론 영시까지 영어로 낭송하는 출연자도 있을 정도다. 담당 박성원 프로듀서는 “방송된 시낭송을 듣고 원전 시집을 구하고 싶다며 문의하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밝혔다.


(사진/시와 시를 노래로 만든 CD를 묶어낸 시노래집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


시와문학사가 선보인 인터넷 시 전문 사이트인 ‘포엠토피아’(www.poemtopia.co.kr)도 시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다. 1만여편의 시를 주제나 소재, 작가, 주제어 등의 방법으로 검색할 수 있게 꾸며놓아 시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시를 노래로 만들어 알리는 실험도 등장했다. 시인과 가수들의 모임인 ‘나팔꽃’(회장 김용택)이 펴낸 시노래집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현대문학북스)은 김용택, 안도현, 정호승, 도종환 시인 등의 시로 곡을 만들어 가수 백창우, 김원중, 김현성씨 등이 부른 노래 시디와 시집을 묶었다. 지난 7월 출시돼 두달 동안 1만부 가까이 팔리며 선전하고 있다.

풍부한 감성을 되살려보고 싶다면…


(사진/문학과 지성사가 마련한 시낭송회 '시의숨결'은 매달 셋째 월요일 서울 시간동 금호미술관 콘서트홀에서 열긴다.정현종 시인이 육성으로 시를 낭송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시를 다시 회생시키는 전조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더이상 추락할 수 없다는 시단의 자구적인 몸부림으로 보는 게 정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가 다시 사람들의 곁에 다가서고자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시를 읽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손쉽게 읽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도 분명하다.

시의 침체기, 이성부 시인은 시가 뭐냐고 물어오는 열살짜리 둘째딸에게 시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한탄했다. “나는 그것이 너를 꿈나라로 데려가고 네 동무를 사랑하고, 너를 함박꽃 웃음 속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평화라는 것을 알릴 수가 없다. 갈보가 돼버린 시를 어디 가서 찾으랴. 이미 아편쟁이가 된 언어…”라는 이 시인의 시는 자조적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런 상황 속에서 시인들은 늘 그래왔듯이 계속해서 시를 쓰며 노래해왔다. “곱창처럼 사람들 입에/ 꼬옴 꼬옴 되씹힐 수 있는 그런 詩를/ 몇개나 쓰다 죽어야 합니까”라고 했던 김용호 시인의 시처럼 시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늘 유지돼왔다. 상황의 변화는 아직 보이지 않아도 그 성과만큼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쌓인 것도 사실이다.

이런 성과를 들고 90년대 내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시단은 조용하게 벌어졌던 독자들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요란하지는 않다. 나지막하면서도 간곡하게 “다시 시집을 펴보라”고 귓속말을 건넬 뿐이다. 누구나 시인이었던 10대의 풍부한 감성을 불현듯 되살려보고 싶다면, 바쁘디 바쁜 생활 속에서 잠시 자신을 되돌아보며 위로를 받고 싶다면, 가을도 온 김에 한번 그 권유에 귀기울여 보면 어떨까. 결정은 독자의 몫이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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