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08월30일 제324호 

[특집] 시간과 속도, 그리고 역사

기술-자본주의의 미친 듯한 질주에 제동을 가하기 위하여



우주의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흘러가고 따라서 우주 속의 우리 삶도 시간 속에서 흘러간다는 것, 이것이 삶의 가장 기본적인, 피할 수 없는 여건이다. 이 절대적 여건을 우리는 ‘역’(易)이라 부른다. 세계란 끝없는 생성이며, 이 생성이 역이다. 그러나 고대의 역은 우리에게 우주 생성의 구조를 말해주었지만, 그 속도를 말해주지 않았다.

시간의 다채로운 얼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사물의 본질로부터 그 운동을 유추하고 있으며,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변화를 가르쳐주었다. 그렇지만 그의 물리학에도 속도에 대한 이론은 미약하다. 고·중세 시대에 시간을 측정하고 양화할 수 있었던 많은 장치들(해, 달, 별 등의 움직임, 낮과 밤 등등)이 있었음에도, 시간을 ‘대상’으로 삼고 공간화(그래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본격적인 시계가 발명된 뒤이다. 이 점에서 속도란 유별나게 근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끝없이 새로운 도구들을 만들어내고 결국은 그 도구들의 노예가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이다. 근대인들은 시계와 속도를 만들어냈고 결국 그 노예가 되었다. 시간은 끝없이 우리를 불러내고 서두르게 한다. 삶은 속도를 둘러싼 전쟁으로 화했다. 모든 것은 ‘속도전’이 된다. 이 점에서 탈근대적 사유가 ‘느림’의 가치를 복권시키려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간에 대해, 우주의 진화에 대해 근원적으로 사유했던 베르그송이 그의 말년의 저작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단순한 삶’과 ‘느림’의 가치를 역설했던 것은 시사적이다.

그러나 탈근대적 시간의 추구는 시간의 여러 얼굴들이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파악할 것, 그 관계를 존재론적으로 조망하고 화해시킬 것을 요청한다. 시간은 우리에게 물리적 얼굴, 생체적 얼굴, 심리적 얼굴, 역사적 얼굴, 신화적 얼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얼굴들을 존재론적으로 비교, 통합함으로써만 탈근대적 시간론은 가능하다. 얼핏 시간이란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은 다채로운 얼굴들로 존재하며 그 얼굴들 사이에는 불일치와 갈등이 아로새겨져 있다. 한 인간이 모든 시간의 얼굴들을 보듬을 수가 없으며, 한 사회가 이 얼굴들을 품어줄 수도 없다. 인간의 삶은 이 시간들 사이에서 분열되며, 사회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 이질적 시간들로 분열된다. 하나의 시간이 빛날 때, 다른 시간들은 그에 어두운 그림자들을 던진다.

오늘날 우리는 기술적 시간과 생체적 시간, 경제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 사이에서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으며, 인간의 얼굴은 산산이 조각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사건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이 모든 이들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오지도 않고, 한 인간에게 모든 사건들이 대등한 가치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시간과 사건은 자체로서 분열적이다. 특히 커다란 의미를 지닌 사건들이 짧은 시간대에 촘촘히 솟아오를 때 시대는 미친 듯이 질주하며, 인간의 정체성도 카오스의 바다에 빠진다. 오늘날은 사건들이 질주하고 정체성이 와해되는 분열의 시대이다.

기술은 폭력적이다


(사진/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암울한 사회를 그린 영화 <모던타임즈> )


2000년대는 디지털과 가상공간 그리고 생명 복제와 더불어 도래했다. 수만년, 수십만년 인간이 삶을 둘러쌌던 ‘생활 세계’가 이제 거대한 변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은 사물들을 0과 1의 조합으로 환원시켜 다시 새롭게 변형시킨다. 문자 그대로 ‘만화 같은’ 세상이 온 것이다. 가상공간은 꿈을 현실화시키고 우리 삶을 ‘꿈같은’ 세상으로 만든다. 생명 복제는 절대·유일의 것으로 인식되었던 생명 개체를 복제해냄으로써 ‘거짓말 같은’ 세상으로 만든다. 이제 세상은 만화 같고 꿈같고 거짓말 같은 세상으로 접어들었다. 시간은 이 만화, 꿈, 거짓말을 실재, 현실, 참으로 둔갑시킬 것이다.

누가 이런 변화를 원했는가? 도대체 ‘누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모든 이들의 동의를 통해 진행되지 않는다. 그 어디선가 갑자기 사건들이 도래한다. ‘어느 날 갑자기’ 디지털사회가 도래했고, 어느 날 갑자기 사이버 세상, 복제 세상이 도래했다. 사회는 ‘합의’에 의해 진행되지 않는다. 사회는 분열되어 있고 어느 한 ‘계’(界)에서 발생한 일이 갑작스럽게 다른 계들에 파급된다. 그 사건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런 사건이 발생하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한 새로운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사회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원하지 않았던 사태가 ‘그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강요된다는 점에서 사회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이 폭력성에 있어 기술은 그 무엇보다 핵심적이다. 철학적 사유, 예술적 창작 등도 사회적으로 파급된다. 그런 철학책, 그런 예술 작품을 원하지 않았건만, 어느 날 그런 작품들은 책방에 전시회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반드시 그런 책, 그런 작품을 감상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런 책,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커다란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술은 다르다. 기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 사람들에게 사용을 강요하며,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누구나 자동차를 타지 않을 권리, 전화를 사용하지 않을 권리,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그는 한 사회 속에서 고립되기를 감수해야 한다. 결국 좋든 싫든 반사회적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자동차를 타고, 전화를 걸고, 컴퓨터를 써야 한다. 이 점에서 기술은 폭력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누군가에 의해 에이리언처럼 등장해 사용을 강요하는 괴물인 것이다. 물론 이런 폭력이 가능하려면 자본주의 경제, 대중 매체, 정치적 로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무수한 기술들이 멀리서 쳐들어온 외계인들처럼 우리의 생활 세계에 무차별적 공세를 가하는 사회이다. 새로운 기술만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기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은 정치적 제제, 미디어의 비판, 그리고 비판적 지식인들의 저항이다. 그러나 궁극적 힘은 결국 대중이다. 대중이 호응하지 않는 기술과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술과 자본주의는 대중의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낼 수 있을 때에만 존립할 수 있다. 정치나 미디어는 그 속성상 대중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고, 지식인들의 저항은 실질적 힘에 있어 미약하다. 그래서 결국 대중이 깨어나지 않는 한 미래는 기술자-자본가의 ‘프로그램’대로 움직여 나갈 것이다.

예기치 않은 괴물창조를 감시하자


(사진/ <블레이드 러너>의 한장면)


대중은 <허준>에 감동받고, 김용옥 교수의 강의에 감동받는다. 그것은 대중의 마음속에 전통에 대한 향수, 근대 문명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이 깃들어 있다는 징표이다. 그러나 누구나 현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누구도 의식적으로 그 현실에 저항하지는 않는다. 방이 더럽다고 다들 느끼면서 누구도 실제 빗자루를 들지는 않는 것처럼. 기술-자본주의의 미친 듯한 질주에 제동을 가하려면, 의식있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의 연대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교감이 필요하다. 사회는 익명적이며 폭력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딘가에서 그 누군가에 의해 예기치 않았던 괴물들이 창조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시, 견제 자체가 특정한 집단에 귀속될 때 사회의 익명성과 폭력성을 사라지지 않는다. 무수한 가로지르기, 역동적인 연대, 끊임없는 계몽이 지속적으로 실천될 때에만 기술-자본주의의 고삐를 늦출 수 있는 것이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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