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08월02일 제320호 

[특집] 개혁을 이끄는 '힘센자치'

분권화로 지역의 활로 찾는 스코틀랜드의 실험… 해묵은 숙원 풀며 적대감 해소


(사진/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출범을 축하하는 퍼레이드)


출범한 지 몇달 되지 않은 스코틀랜드 의회는 에든버러대학의 건물 일부를 빌려쓰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장은 활기로 넘쳤다.

본회의장 중앙의석 앞줄에는 자치정부 총리와 각료들이 앉았다. 좌우편 의석에는 보수당과 스코틀랜드민족당(SNP) 의원들이 포진했다. 총리와 각료들이 모두 출석한 가운데 질문시간(question time)이 열렸다. 질문시간은 우리나라 대정부질문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방식은 철저한 일문일답식. 총 1시간 동안 질문 의원이 30명이다. 의원 한 사람에게 배정된 시간은 1분, 총리나 장관의 답변도 1분이다(런던 의회의 운영방식을 원용한 것임).

부재지주 없애는 토지개혁 단행

따라서 질문은 속사포처럼 쏘아댈 수밖에 없다. 즉각 장관이 일어나 답변한다. 답변이 끝나자마자 릴레이식으로 같은 당의 다른 의원이 장관을 몰아세운다. 간혹 기막힌 유머를 구사하면 의원들은 손바닥으로 의석을 두들기며 박장대소를 하기도 한다. 보좌관이 써준 자료를 읽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법안 처리 실적도 괄목할 만하다. 개원한 지 1년 만에 8건의 법안을 의결했다. 안건마다 지리한 논의를 거치는 영국의 정치풍토에서 이 정도는 대단한 능률이라고 한다.

처리 법안의 내용들도 권력분산과 자치를 실감케 하는 것들이다. 5월3일에는 봉건적 토지소유권 폐지법이 통과됐다. 스코틀랜드에는 얼굴도 모르는 부재지주 문제가 심각했다고 한다. 일종의 봉건시절의 유제인데, 실질적인 토지 점유자와 별개로 과거의 봉건영주가 법적 소유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몇십년씩 살던 자기 집을 헐고 다시 지으려면 얼굴도 모르는 부재지주를 찾아가 동의를 얻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더구나 부재지주의 대부분은 런던 등 남부잉글랜드 사람, 즉 ‘외지인’이었다.

스코틀랜드 주민들에게 이 문제는 해묵은 숙원이었다. 그러나 분권화 이전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의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런던 입장에서 볼 때 멀리 떨어진 북부지방의 작은 문제일 뿐아니라, 런던 일대에 사는 부재지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 구성된 자치의회는 보수당의 일부 반대를 누르고 압도적 다수로 폐지법을 의결했다. 이를 두고 런던에서 발행되는 우파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시대도 아닌데 웬 토지개혁이냐”며 ‘기가 막혀’ 하기도 했다.

논란이 됐던 법안 중에는 동성애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영국 법으로는 교사가 동성애는 부적절하다고 학생에게 가르쳐도 처벌받지 않는데, 스코틀랜드 의회는 “부적절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입법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우리의 도덕적 기준에 대해 중앙정부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주장했다.

분권화로 성립한 스코틀랜드 정부의 권한은 우리 지방자치단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세금도 중앙정부가 정한 세율을 기준으로 3% 이내에서 조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 그 밖에 보건, 교육, 경제개발, 치안, 환경, 주택, 투자 유치, 무역, 교통 등 대부분의 지역정책에 관해 입법과 행정권을 갖게 됐다. 중앙정부 대표와 함께 유럽연합 각료이사회에 참석하며 유럽연합 주재 사무실도 설치했다. 다만 외교, 국방, 안보, 국경통제, 거시경제, 금융정책 등은 중앙정부가 계속 담당한다. 재무담당 관리 메어리 맥퍼슨은 “런던에서 재정 배정액을 총액으로 넘겨받은 다음에는 런던의 간섭없이 모든 것을 스코틀랜드가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런던보다 지역활동이 정치적 전망 밝다”


(사진/스코틀랜드 의회 본회의장 모습)


런던 의회의 하원의원을 하던 인사들이 스코틀랜드 의원으로 대거 출마해 당선된 것도 자치정부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자치정부 총리인 도널드 듀어(노동당)를 비롯해 짐 월러스 재무, 샘 갤브레이스 교육, 헨리 맥리시 산업장관 등이 런던 하원의원이면서 스코틀랜드 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들이다(과도적으로 두 의원직을 겸임). 에든버러에서 발행하는 유력신문 <헤럴드>의 로비 딘우디 기자는 “정치인들이 런던보다 에든버러에서 활동하는 쪽이 더 전망이 밝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국회의원이 지방자치가 중요하다고 해서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도의원이나 시의원으로 나설 리 없는 것과는 분위기가 다른 셈이다.

분권화 정책은 지역갈등 해소와 함께 영국 전체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런던’에 대해 노골적 적대감을 표시하며 분리독립을 외치던 스코틀랜드민족당은 첫 의회 선거에서 35석을 차지함으로써 집권 노동당(56석) 다음의 제1야당이 됐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민족당도 체제 안에서 책임있는 야당의 구실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독립에 대해서도 “꼭 당장 하자는 것만은 아니다”는 정도로 선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블레어는 괴로워!


전통노선 외면하고 중앙집권적 분권화 추진… 측근인사 요직에 앉히려다 망신살

노동당 정부는 97년 5월 집권 이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 세 지역에서 함께 자치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웨일스에서도 97년 9월 분권화 법안을 놓고 주민투표가 실시됐는데 찬성 50.5%, 반대 49.5%가 나왔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찬성률이 75%에 이른 데 비해 자치에 대한 열기가 약했던 것이다.

웨일스가 분권화에 다소 시들한 것은 지리적 인접성 등 때문에 런던의 문화에 좀더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영어와 웨일스어를 병용하는 등 문화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집착은 있지만 정치·사회적인 자치 욕구는 약하다는 것이다. 웨일스에도 ‘플래드 킴루’라는 웨일스 지역당이 있지만 세는 약한 편이다.

어쨌든 웨일스에서도 99년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치러졌으며, 노동당은 여기서도 집권당이 됐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의회와 비교할 때 징세조정권, 입법권, 대유럽연합 대표권 등이 없는 제한적 권한만 부여됐다. 의회의 명칭도 스코틀랜드가 런던 웨스터민스터와 같은 팔러먼트로 붙인 반면에 웨일스의 그것은 격이 낮은 어셈블리로 명명됐다. 그러나 웨일스에서도 막상 자치가 시작되자 권한을 확대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북아일랜드는 훨씬 복잡하다. 신교계 대 구교계, 영국 본토 이민자 출신 대 아일랜드 원주민간의 종교 및 민족갈등이 극심하기 때문에 자치는 본격화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런던 정부는 북아일랜드에 행정위원회만을 구성해놓은 상태다.

분권화(권력분산) 바람이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부메랑이 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블레어는 웨일스 자치정부 구성 초기에 자신의 측근인사를 웨일스 총리에 앉히려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웨일스에서 인기가 없는 인물이어서 의회에서 불신임당했다.

지난 5월 런던시장 선거를 놓고도 블레어는 곤욕을 치렀다. 블레어는 측근인 돕슨(영국 언론은 그가 블레어의 충견에 불과하다며 ‘총리의 푸들’이라고 비아냥거림)을 노동당 후보로 공천하려고 경선대회의 투표권을 하원의원들에게 훨씬 많이 배정했다. 당내 좌파인 켄 리빙스턴이 출사표를 던지자 그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경선대회를 치른 결과 돕슨은 하원의원들의 표 덕분에 당선됐다. 그러나 1인1표씩을 갖고 있던 다수의 일반 대의원들은 리빙스턴에게 몰표를 던져 민심이 리빙스턴에게 있음을 실증했다. 그 결과 리빙스턴은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본선에서 압도적 다수표로 당선되고 말았다. 리빙스턴은 블레어의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의 아류라고 맹렬히 비판해온 인물이었다.

블레어는 노동당 당수이면서도 당 노선을 크게 수정한 바 있다. 특히 분권화 문제에서 그는 노동당의 전통적 입장을 따르기보다는 대처 시절의 중앙집권주의에 좀더 가깝다고 한다. 당 공천 등에서 측근 인물을 낙하산식으로 심으려 한 것도 그런 배경이다.

그러나 영국 정치에 권력분산 바람이 일고 그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좀더 충실하다는 대세론이 형성되면서 블레어는 마음먹은 대로 밀어붙일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이를 두고 보수당쪽에서는 “분권화를 하려면 노동당 운영이나 분권화하라”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블레어보다는 존 스미스 전 당수가 노동당에선 좀더 열정적으로 분권화 정책을 주창했다고 한다.

에든버러=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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