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07월26일 제319호 

[특집] 소외로 얼룩진 통독의 자화상

지역간 격차 방치해 동독인의 상실감 심화… 허물지 못한 감정의 장벽은 높아만 간다


(사진/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통독 당시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이곳에서 얼싸안고 환호했지만 통일 10년이 지난 지금 양쪽 주민들 사이엔 새로운 마음의 장벽이 생겨났다)


하이코 피플로(42)는 독일 연방 환경부에서 정책자문관으로 일하는 공무원이다. 옛동독 환경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90년 동·서독 정부가 통합되면서 연방 환경부로 넘어가 근무하게 됐다. 물론 그는 동독 출신으로 로스토크대학에서 지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독 정부의 비슷한 성격의 부서에 근무하던 30명 가운데 20명은 잘려 나가고 새 정부로 승계된 10명 가운데 포함됐으니 자신은 매우 다행스러운 경우라고 말한다.

그러나 통합 정부에서 일한 지 10년이 된 요즘 그는 회의에 빠져 있다. 지난 10년간 함께 일하던 서독 출신 관리들은 대부분 두 단계씩 승진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제자리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에도 승진할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방 환경부 공무원 800여명 중 동독 출신은 100여명인데 대부분 하위 직급이며, 승진을 못하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동독 정권 시절 라이프치히에서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한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동독 정권의 붕괴와 서독 체제로의 통합을 누구보다 열망했던 경우다. 그러나 통일된 지 10년. 옛동독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품고 있는 회의는 깊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장벽이 생겼다. 내 자식대에나 장벽이 사라질 수 있을지….”

자신의 설명대로 피플로는 동독 출신 가운데선 그나마 잘 나가는 경우로 꼽힌다.

동독인이 취업해도 승진 가능성 없어

브란덴부르크문.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을 오가는 검문소가 있었으며, 장벽이 무너지던 그날 양쪽 시민들이 몰려들어 환호했던 곳이다. 역사적 상징성이 깃든 브란덴부르크문 바로 앞에서 10여명의 동독인들이 ‘24일째 단식 투쟁’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왜 투쟁하나.

“우리는 대기업의 하청을 받아 배선과 배관 등의 일을 했다. 그런데 노임이 지불되지 않았다.”

-왜 지불되지 않았나.

“기업이 동독에 들어와 일감을 발주했다가 돈을 떼어먹은 뒤 부도처리했다. 그리고는 다른 이름으로 새로운 기업을 만든다”(한국에서 한때 횡행했던 위장폐업과 비슷하다는 설명이다).

-그 기업은 서독 자본인가.

“그렇다. 지멘스의 자회사다.”

-비슷한 일이 동독지역에 잦은가.

“그렇다. 통독 직후 얼마 동안은 괜찮다가 93∼94년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독 기업들은 정부 보조금을 노리고 동독에 진출했다가 보조금을 다 먹은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하기 일쑤다.”

-당신들의 문제에 정당들이 관심을 보이는가.

“다른 정당들은 관심이 없다. 오직 민주사회당(민사당·PDS·동독공산당의 후신)만이 관심을 보인다.”

동독지역당 민사당이 약진하는 이유


(사진/옛동독 공산당의 기관지였다가 민영화한 일간신문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사옥. 서독 자본이 소유한 대형 언론매체들이 동독인들의 좌절감을 소홀히 취급하자 동독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겠다는 군소 신문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두 사례는 통일되고 10년이 지난 동독지역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들로 비쳤다. 통일 이후 동독지역이 독일 연방 전체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나가기보다는 새로운 ‘소외지역’으로 고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서독지역의 ‘새로운 분단’, 또는 동독지역의 소외 고착화 현상은 선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민사당은 90년 말 통일 뒤 첫 연방의회 선거에서 동독지역 11%, 서독지역 0.2%의 득표율을 올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수의 서독 정치인들은 이를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했다. 서독인들은 “통일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어차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일 이후 서독쪽이 지원을 쏟아부으면 자연스럽게 불만이 해소될 것” 등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민사당은 94년 연방선거에선 22%, 98년에는 25%로 지지율이 올라갔다(동독지역의 그것으로, 같은 시기에 서독지역에선 각각 2.1%, 2.5%). 98년 연방선거에선 독일 전체 기준으로 5% 득표 하한선을 넘음으로써 비례대표제에 따라 연방 하원에도 진출하게 됐다. 베를린 중구(동독지역)의 경우는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44%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같은 선거에서 역시 동독지역인 튀링겐, 작센주 등에선 민사당이 21%의 득표율로 사회민주당(SPD) 또는 기독교민주연합(CDU)에 이어 제2당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사민당과 기민련은 독일의 양대 정당이며, 현재 연방 집권당은 사민당).

독일은 사실 통독 이전까지 모범적인 연방제 국가로 꼽혔다. 각 주가 경제·사회적으로 대체적인 균형을 이룬 가운데 잘 협조가 이뤄졌다. 지역갈등이라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가 월등히 앞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자성을 강하게 내세우는 정도였지만, 워낙 소수의 문제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 동독지역에 민사당이라는 지역당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독일이 새로운 지역 문제를 안게 됐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동독을 ‘내부 식민지’로 보는 것일까

독일 통합 과정의 문제점을 경제적 측면에서 에버트재단(사민당 계열의 정치교육 및 학술연구 재단) 베를린사무소장인 악셀 슈미트괴델리츠 박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굉장히 어렵게 버텨온 동독 기업들을 서독 자본은 헐값에 인수했다. 경쟁관계에 있는 동독 기업을 서독 자본이 고사시켜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동독 기업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보조금 따위를 노린 사기, 뇌물 등 경제사범도 무수히 발생했다. 동독 기업 인수와 함께 시설을 현대화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이다. 동독지역의 현재 실업률은 공식 통계와 달리 30∼40%에 이른다. 제일 중요한 것은 동독을 내부 식민지가 아닌 경제적 파트너로 봐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실제로 통독 직후 서독 자본들은 한동안 ‘동독 특수’를 한껏 누렸다고 한다. 인구 1700만명의 새로운 상품시장이 펼쳐졌고, 종업원 1만여명 규모의 대공장들을 거의 한푼도 들이지 않고 인수할 수도 있었다. 정부는 보조금을 지급해가면서 인수를 장려했다. 그러나 몇년 뒤 동독지역의 임금이 서서히 상승하면서 분위기는 일변했다. 서독 자본들은 애초의 메리트가 상실됐다고 보고 폴란드, 체코 등 임금이 더 싼 동구권으로 공장을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독 주민들은 초기 민영화 과정의 대량 실직에 이어 새로운 고통에 직면하게 됐다.

서독 기업 철수로 대량 실직 사태


(사진/동독지역의 한 주말농장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는 독일인들. 통독 이후 토지 소유권을 원소유자에게 되돌려주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많은 동독인들이 자신들이 점유하던 주말농장을 빼앗겨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사회심리적 차원의 문제도 컸다. 통독 이후 동독지역에는 3500여명의 서독 공무원이 투입돼 행정기관을 접수했다. 기존의 동독 공무원은 밀려났다. 서독에서 경력이 짧은 공무원이 동독으로 부임해 벼락승진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교수·교사들에겐 사회주의 대신 민주주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특별교육이 실시됐다. 그래도 학교 교장 등 고위직은 서독 출신이 차지했다. 동독인들은 “우리는 2등 국민”이라는 자조를 하게 됐다.

동독이 하루아침에 붕괴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통일은 대등한 통합이 아니라 서독 위주로 동독을 흡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독인에 대한 이념교육을 담당했던 독일 연방 내무부는 그것을 ‘공안 차원’에서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담당 부서를 우리 정부부처에 준해 번역한다면 ‘사회안전국’ 정도의 뜻이었다. 그러한 국의 한 부서로 ‘동독 내적 통합 담당과’가 있는데, 같은 국 안에 △극우세력 담당과 △극좌세력 담당과 △외국인 문제 담당과 등이 나란히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독인들이 겪은 심리적 충격과 상실감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반파시스트 운동가의 이름을 붙여지었던 거리 이름이 하루아침에 개칭되는 일이 많았다. 일부 동독인들이 시민모임을 만들어 반대해봤지만 “동독은 망했으니, 동독식은 모든 게 틀렸다”는 논리에 오금을 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젠 서로를 경멸하는 문화도 생겨나


(사진/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는 동독인들. 서독 기업이 위장폐업을 하면서 하청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사정책도 다르지 않았다. 집권 사민당 내각의 장관 17명 가운데 동독 출신은 베르크만 가정복지부 장관 한 사람뿐이다. 사민당의 연방 국회의원 298명 가운데 동독 선거구 출신이 65명으로 21.8%인데 비해 적은 숫자다. 티에르제 연방의회 의장이 동독 출신이고 그 밖에 차관급이 몇 사람 더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역 안배가 잘됐다고 보긴 어렵다. 티에르제 의장의 비서실장인 한스 미셸비츠 박사는 “동독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서독 출신 인사들은 “기민련이나 사민당이 주로 서독에 기반을 둔 정당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동독 출신들은 아직 현대 미디어 정치 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고위직에 오르기 어렵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고위직 인사에서의 지역 편중이 동독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더욱 굳게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기민련이 콜 전 총리의 부패 스캔들로 궁지에 몰리자,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을 당수로 옹립해 동독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그 방증이다.

동·서독지역간 격차가 벌어지면서 양쪽 주민들 사이의 감정의 장벽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통독 이후 독일에는 서독인을 베시스(Wesis), 동독인을 오시스(Osis)라고 부르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베시스는 깔끔하고 잘 나가는 서독 사람을, 오시스는 게으르고 멍청한 동독 사람을 가리킨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거리를 두는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드물긴 하지만 서독지역에 취업 기회를 얻었던 동독 사람이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동독지역으로 되돌아오는 일도 벌어진다고 한다. 동독지역의 공직 등에 발령받은 서독인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일이 드물다. 가족을 데리고 가봤자 자녀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줄근한 동독 아이들이 말쑥한 서독 아이가 급우로 나타나면 “너는 모든 것을 가진 자 아니냐”며 따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더 큰 문제는 동독인들이 겪는 상실감과 굴종감이다. 민사당은 이 틈새를 바짝 파고들고 있다. 실제로 94년 선거에서 민사당은 “손을 높이 쳐들지 말고, 고개를 쳐들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손을 쳐든다는 것은 구호와 자선을 좀더 베풀어달라는 굴종의 표시라는 것이다. 민사당은 투항과 굴종 대신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자존심을 지키자고 호소함으로써 동독인들의 열패감 내지 지역감정을 잔뜩 자극하려 한 셈이다.

시장의 논리는 동독인의 미래를 삼켰다


(사진/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베를린 교통노조 조합원들. 민사당은 공공부문 고용확대를 통한 실업문제 해결을 주장하지만 사민당과 기민련은 재정부담을 들어 난색을 표시한다)


통일 독일이 ‘동독 문제’라는 새로운 지역갈등을 안게 되리라고는 독일인들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독일의 경우는 통일이 워낙 갑작스레 닥쳐왔기 때문에 차근차근 대책을 정립해나갈 여유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일은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두 체제가 합쳐진 데 따른 문제이기 때문에 남한 내부의 지역갈등과 비교하기 어려운 점도 많다. 그보다는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참고자료로 종종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티에르제 연방의회 의장 비서실장의 진단은 우리 현실에도 일정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기존 독일 정부의 정책은 너무 많은 것을 시장의 힘에 맡겼다. 시장 자율에 맡기면 거기서 발전적인 동력이 나오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시장의 논리는 자율이 아니었다. 약자에게는 강압이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적 약자인 동독인들이 코너로 몰아붙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지역갈등은 기본적으로 격차와 차별에서 비롯한다. 격차를 방임하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집단은 더욱 우월해진다. 협조와 균형은 파괴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또는 사회적인 개입이다. 독일 사민당 정권은 이에 따라 국가개입을 통해 지역간 격차를 전반적으로 재조정하는 프로그램을 뒤늦게 연구한다고 했다.

베를린=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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