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00년07월19일 제318호 

[특집] 독립만세 외치며 기득권 챙긴다

남북의 극심한 경제적 격차로 적대·편견 난무… 민주주의 위협하는 패권주의 논리 득세


(사진/북부동맹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며 분리독립을 선포하자, 다른 정당들이 이에 반대하는 집회를 조직했다. 사진은 집회 참가자들이 자신들의 깃발을 모아놓은 모습)


이탈리아는 북부와 남부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극심하다. 북부에는 밀라노, 토리노 등 세계적 공업도시가 즐비하다. 실업율도 5.7%에 그치고 있다. 반면 캄파니아, 시칠리아 등 8개 주로 구성된 남부는 평균 실업율이 22.4%이며 청년층의 실업율은 50%에 육박한다. 남부의 소득은 북부의 절반가량이다. 사회간접시설 보급률도 남부는 북부의 53% 수준이다. 인구는 남부에 전체 5700만명의 43%가량이 산다.

남북부간 경제적 격차가 크게 벌어지다보니 사회심리적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북부인들은 “남부인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며 놀기만 좋아한다. 게으르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반대로 남부인들은 “북부인들은 예의가 없으며 돈만 밝힌다”고 깎아내린다. 남부인들은 “문화적 전통과 역사를 따진다면 단연 남부가 우위”라고도 주장한다.

북부 위주의 완고한 사회적 연줄망 형성


(사진/궁색해진 달레마의 처지를 배가 난파해 뗏목에 웅크리고 앉은 모습으로 묘사한 시사주간지 <에스프레소>의 표지)


유력 시사주간지 <에스프레소>의 프란체스코 데 비토 논설위원(남부 출신)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남북부간의 미묘한 지역감정을 설명했다. “나는 북부 피렌체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결혼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결혼한 뒤 피렌체의 처가쪽 친척들을 방문했을 때 일이 벌어졌다. 처의 이모가 처에게 ‘네 남편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다만 남부 사람이기 때문에 네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이모는 ‘이 이야기는 남편에게 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라’고 했다. 그러나 처는 나에게 털어놓았다.”

북부가 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북부인들은 기업에 취직해도 상대적으로 쉽게 승진한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도 있고, 그 밖에 사회적 연줄망으로 볼 때도 경제적 상승이 쉽다. 북부인들은 자녀를 공부시켜도 상경계통에 많이 보낸다. 미국에 유학 보내 경영학 석사 따위를 따도록 하는 점도 이들의 사회적 상승을 원활하게 하는 요인이다.

반대로 남부인들은 1950∼60년대에 상당수가 북부 공업지역으로 이주했다. 2차 대전 뒤의 경제적 부흥기를 맞아 북부의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노동력 수요가 많이 발생한 것이다. 전통적 농업지역인 남부에는 당시 이렇다할 직장이 없었다. 마치 한국전쟁 뒤 한국의 호남 사람들이 수도권과 영남의 일부 공업지역으로 대거 이농한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북부로 이주한 남부인들은 밀라노, 토리노 등의 공업도시에서 노동자 등 사회적 하층을 형성했다. 이탈리아의 북부에 우파 외에 좌파민주당(옛 이탈리아공산당의 후신)의 기반도 만만찮은 것은 이주 노동자계급이 기반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한국과 다른 점은 공직 분야에 남부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다는 점이다. 남부인들은 교육열이 높다. 그것도 상경계통보다는 법학, 행정학, 인문학 분야를 선호했다. 하긴 지역 내에 기업체가 없다보니 상경계통은 해봤자 쓸모가 없었다. 자연스레 남부인들은 주로 공무원, 경찰, 군인, 교사 등의 분야에 많이 진출했다. 그 결과 북부 중심도시 밀라노에서조차 교사와 경찰관, 세무공무원의 80∼90%가량은 남부 출신이 맡고 있다.

공공행정직 진출한 남부인이 균형추 구실


(사진/남부공사의 창업지원 자금을 받아 유리창 설치업에 나선 한 남부 청년)


경제는 북부가 패권을 쥐고, 공공행정 등의 분야는 남부인이 담당하는 사회적 분포는 이탈리아사회를 지탱하는 일종의 균형추로 작동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래 92년까지 기민당(우파)의 장기집권이 유지되는 동안은 적어도 그러했다. 기민당 정권은 북부에 패권적 기반을 두되, 남부에 개발예산을 책정하거나(공공사업 등이 마피아와 결탁한 사업가에게 흘러들어가 효율성은 없었다는 평가이지만), 남부 인사를 각료 등에 다수 기용함으로써 남부인을 심리적으로 포용했다. 따라서 ‘지역’ 차원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남부문제뿐이었다.

그러다 92년 마니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으로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일변했다. 검찰은 92년 2월 밀라노시 사회당 지부 간부 수뢰사건을 시작으로 정치권 사정에 착수해 96년 6월까지 전직총리 4명과 국회의원 440명을 수사했다. 이로 인해 기성 정치권은 붕괴했다. 기민당과 사회당은 해체됐고, 우파는 전진이탈리아당, 좌파는 좌파민주당 중심으로 재편됐다. 그러던 끝에 96년 4월 총선에서 좌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연합이 하원 630석 중 284석, 우파연합이 246석을 각각 확보함으로써 71년 만에(무솔리니 시절 포함) 좌파로의 첫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좌파연합의 승리는 우파 장기집권과 극에 이른 정치부패에 대한 염증의 결과였다. 이와 동시에 좌파민주당이 남부문제에 대한 전통적 무관심을 벗어던지고 적극적인 지원을 공약한 것이 남부 주민들에게 어필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좌파정부는 집권 뒤 남부지역 실업해소를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1999∼2001년간 36조리라(약 21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남부지역 고용확대를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했다.

그러나 북부인들에게 로마의 북부패권적 권력 붕괴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에 따라 북부 지역주의를 전면에 내건 신생정당 북부동맹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북부동맹은 창당 2년만인 92년 총선에서 전국 평균 8.7%의 득표율로 하원 55석, 상원 23석을 차지했다. 93년 4월 지방선거에선 북부동맹이 57%의 압도적 득표율로 거점도시 밀라노를 장악했다. 96년 4월 총선에선 하원 59석(9.3%), 상원 27석(8.6%)으로 약진했다. 북부동맹은 북부 지역에선 평균 25%의 득표율로 전진이탈리아당 다음으로 강력한 정당이 됐다.

북부동맹, 완전 분리독립에서 연방제로


(사진/움베르토 보시 북부동맹 당수가 4월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뒤 보도진 앞에 나섰다)


96년 총선으로 좌파 정부가 출범하자 북부동맹은 독립을 추진했다. 당수인 움베르토 보시는 96년 9월15일 베니스에서 북부지역을 ‘파다니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중앙정부와 협상을 거쳐 정식으로 독립하겠다는 파격적인 정치이벤트였던 셈이다. 보시는 “남부 로마의 중앙정부가 북부를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부동맹은 북부 지역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노골적인 지역선동을 감행했다. “게으르고 무식한 남부인들과 함께살 수 없다”는, 거의 인종주의적인 연설들을 북부동맹 정치인들은 쏟아놓았다. 북부 도시들의 정서는 흉흉해졌다.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남부 출신 교사에게 배울 수 없다. 그들을 몰아내자”는 지하 유인물이 나돌았다.

그러나 북부동맹의 지역주의적 선동은 일단 벽에 부닥쳤다. 비난 여론이 비등한 것이다. 같은 해 9월15일 이탈리아 다른 도시에서는 분리독립 주장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려 15만여명이 참가했다. 좌파정부의 프로디 당시 총리는 “이성을 찾으라”고 촉구했다.

이에 북부동맹은 노선을 일단 수정했다. 완전 분리독립 대신에 연방제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4월 지방선거에서 북부동맹은 같은 우파인 전진이탈리아당과 민족연합에 연방제를 공통의 정책으로 내걸자고 제안해 관철시켰다.

연방제의 핵심은 주별(이탈리아에는 모두 20개주가 있음) 재정 독립이다. 주별로 걷은 세금을 중앙정부로 보내 중앙정부가 다시 분배하는 현행 제도를, 주별로 걷어 주별로 쓰도록 바꾸자는 것이다. 북부동맹 상원 원내총무인 카스텔리 의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북부에서만 국부의 3분의 2를 만들어내는데 세금은 남부에만 쏟아붓는 일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다. 우리의 부를 운영할 방도를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파연합의 공동공약에는 교육자치와 경찰자치도 포함됐다. 북부에서 근무하는 교사와 경찰관의 90%가 남부인인데 이들을 북부인으로 바꾸겠다는 게 이면의 의도였다. 카스텔리 의원은 “남부인 교사는 무식하다. 북부의 문화적 전통을 잘 모른다. 그런 교사에게 우리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 교육내용을 북부의 가치관 중심으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경찰관도 남부 출신들은 북부인이 관련된 사건을 공정하게 조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선거 승리한 우파의 분리주의 공약들


(사진/북부동맹은 분리독립 주장을 선전하기 위해 독자적인 모의 지폐까지 만들었다. 지폐 안의 인물은 움베르토 보시 당수)


이탈리아 정가는 우파연합의 공약이 발표되자 들끓었다. 좌우파가 갈려, 그리고 남부 출신과 북부 출신 인사들이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좌파와 남부를 대표하는 논객으로는 유력신문인 <레 푸블리카>의 전 발행인 에우제니오 스칼파리가 나섰다. 우파와 북부의 이익을 대변해선 베를루스코니 전진이탈리아당 당수의 측근인 줄리오 트레몬티 파비아대학 교수가 떠올랐다. 좌파 시사주간지인 <에스프레소> 프란체스코 데 비토 논설위원은 “학교는 국민적 동질성을 길러주는 기관이다. 지역별로 교육내용을 각자 결정한다면 국민적 일체감이 없어질 것이다. 특히 따로 분리해 살겠다는 북부지역이 교육자치를 한다면 동질성 교육을 하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선거는 우파의 승리로 끝났다. 우파연합은 선거가 실시된 15개주 가운데 8개주를 장악했다. 특히 인구가 조밀한 북부 3개주는 우파의 확고한 기반임을 재확인했으며, 좌파는 로마를 포함한 중부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남부에서도 역시 우파가 몇군데서 이겼는데, 남부인들은 북부동맹의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전진이탈리아당과 민족연합의 기반이 원래 강했다고 한다. 남부 시칠리아주 기자협회장 벤트 파로디는 “북부동맹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세 정당의 연합 자체가 정략적으로 이뤄진 것인 만큼 오래 가기는 어려운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좌파정부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물어 달레마 총리를 사임시키고 아마토 신임 총리 내각을 출범시켰다.

어쨌든 우파 3개 정당의 연합이 이뤄짐으로써 이 구도가 계속된다면 내년 총선에서 이탈리아의 정권은 다시 우파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71년간의 우파 정권을 끝내고 사실상 첫 정권교체로 들어선 현 정부가 5년 만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96년 총선 당시에는 10% 정도의 지지율로 캐스팅 보트를 쥔 북부동맹이 좌·우 어느 쪽 연합에도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좌파연합이 덕을 봤다.

“경제적 불평등 상태의 분리는 위험하다”


(사진/4월 지방선거에서 우파연합이 승리함에 따라 내년 총선에서 정권이 다시 우파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진은 로마 테르미니역을 통해 출근하는 시민들)


좌파가 득세하든, 우파가 정권을 되찾든 그것이 한국인들에게 1차적인 관심사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북부 기득권 세력에 의한 지역주의적 선동은 민주주의와 국가통합의 원리에는 분명히 위협요인으로 보인다.

좌파민주당 하원의원인 이사이아 살레스(나폴리대학 역사학 교수·이탈리아 초기 좌파 운동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적 계승자로 꼽힘)는 이렇게 진단했다.

“연방제를 통해 지방으로 권한을 분산하자는 데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나 독일의 연방제가 잘됐던 것은 각 지역이 비슷하게 잘사는 조건 때문이다. 독일은 통일 뒤 동독지역 문제가 생기면서 연방제에 위기가 오지 않았는가. 이탈리아의 경우도 남부의 경제적 낙후 문제를 해결해 지역간 균형을 먼저 이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분리주의적 연방제 주장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다.”

로마=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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