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통 보수’에서 뉴라이트로… 신자유주의 깃발 아래 경제 이슈 선점하고 대선을 움켜쥐다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퍼펙트한’ 승리였다. 531만7708표. 이 당선자와 2위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표 차이다. 적어도 결과만 놓고 보면 완승, 완패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숱한 도덕성 논란과 아직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각종 의혹에도 불구하고, 어찌됐든 이 당선자는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절반에 가까운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이명박 당선자가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노무현 실정이 유일한 이유일까
대선 이튿날 거의 모든 언론과 시민사회단체, 지식인 그룹은 이명박 당선자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로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꼽았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이라는 관용구는 2007년 대선을 지배한 가장 중요한 열쇳말로 통했다. 풀어서 설명하면, 부동산 가격 급등과 사회 양극화 해소의 실패 등을 가리킨다. 넓게는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과 언행까지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 학계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설명할 때 ‘민생 파탄’ 혹은 ‘경제 파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것으로 충분할까. 사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도 정부의 ‘경제 실정’이 지적됐다. 가계부채 급등으로 인한 개인신용 공황과 주가 폭락, 아파트 가격 급등이 비판 대상이었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비상경제대책기구’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1997년 제15대 대선은 말할 것도 없다. 김영삼 정부는 임기 내내 이른바 ‘신경제정책’의 연이은 실패로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몰고 왔다. 언론이 ‘잃어버린 5년’이란 표현을 썼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1992년 대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 역시 주택 200만 가구 건설 등 경제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어김없이 ‘경제 실정’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당시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인 민자당 대선 후보로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노 정권의 경제 실정을 ‘신한국병’이라고 이름짓고 총구를 안으로 돌렸다.
최근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만 보더라도 대선은 결국, 야당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와 ‘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여당 논리의 충돌이었다. 역대 대선에서 여당 후보는 늘 ‘경제 실정’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싸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1992년과 2002년 대선에서는 여당 후보가 이겼다. 1997년 대선에서도 여당 후보로 나섰던 이회창 후보는 IMF라는 악조건에서도 39만여 표 차까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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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핵 사태 이후 보수 진영은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시도했다. 2004년 3월24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당직자들이 여의도 천막당사 입주식을 열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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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치컨설턴트들과 정치학 교수들은 이를 ‘회고적 투표’와 ‘전망적 투표’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현 정부를 심판하는 ‘회고적 투표’의 경향을 보인다면, 대선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평가하는 ‘전망적 투표’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실정’으로 이명박 당선자가 거둔 압도적 승리를 설명해버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불친절한 해석이다. 하지만 이 당선자와 한나라당이 이같은 환경을 역대 어느 후보보다 ‘세련되게’ 활용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당선자 쪽 백성운 선대위 상황분석실장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국민들이 가장 실망한 부분이 경제라고 보고 ‘경제 대통령’ ‘경제 살리기’ 등 모든 선거전략을 그쪽으로 맞췄다”며 “노무현 정부의 실정이나 반노 정서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양극화 해소를 통한 ‘국민성공시대’ 등 국민들이 원하는 지점에 이 당선자를 정확히 매칭해놓았다”고 말했다.
서민에게 와닿는 정책 더 많아
실현 가능성 여부나 정책 간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할지라도, 이명박 당선자 쪽에서는 서민들에게 와닿는 정책 메시지를 대통합민주신당 등 범여권 후보들보다 효과적으로 알렸다. 택시기사나 노인층, 농어민, 중소기업 종사자 등을 겨냥한 계층별 맞춤형 정책은 오히려 정부 여당인 범여권 후보가 좀더 자신 있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이명박 당선자는 노인들을 위해 틀니와 보청기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공약까지 내놓으면서 표심 공략에 나섰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도 선거전략 측면에서는, 범여권의 어떠한 전략보다 윗길이었다.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대운하 공약은 진작 폐기됐어야 옳았다. 대운하 건설에 반대하는 쪽이 찬성보다 늘 조금씩 앞섰다. 대선 직전인 12월14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운하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31.1%로 나타났다. 반대는 39.3%였다. 그럼에도 이명박 당선자는 대선 이틀 전인 12월17일 또다시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집중적으로 알렸다.
이유는 대운하 계획을 반대하는 계층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운하 건설에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쪽은 민주노동당 지지층이었다. 그 다음이 호남 유권자,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자의 순이었다. 반면 대구·경북 등 한나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선 직후 주요 경제 일간지와 영남권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한반도 대운하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한나라당 지지층 결집용으로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만큼 효과적인 공약이 없었다.
한나라당 부설 연구기관인 여의도연구소의 곽창규 부소장은 “대선 이슈 가운데 누구에게나 바람직한 결과를 안겨주는 것은 좋은 이슈라고 할 수 없다”며 “그런 측면에서 이명박 당선자는 찬반 양론이 갈리는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통해 적절하게 치고 나오면서 이슈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이 당선자가 내놓은 교육 관련 공약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선자는 선거 기간에 자율형 사립고 100개와 기숙형 공립고 150개, 마이스터고 50개 등 모두 300개의 특수목적고를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칫 부자들을 위한 공약으로 공격받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내부의 평가는 다르다. 이 당선자 쪽은 이를 통해 교육 관련 이슈를 성공적으로 주도한 것은 물론, 지지층 갈라치기에도 효과를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정치컨설턴트인 딕 모리스는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책 〈The New Prince〉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확실히 부각시킬 수 있는 이슈가 되려면 우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여야 한다. (중략) 중요한 것은 해당 이슈에 후보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을 담아서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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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패배의 원인을 보완하겠다는 한나라당의 노력은 계속됐다. 2007년 8월2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전경.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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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대운하 공약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이 당선자는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한나라당에 대운하 계획을 제안한 바 있다. 당시 그는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에서 미래경쟁력 분과위원회를 이끌고 있었다.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과 백용호 이화여대 정책대학원 교수 등 지금도 이 당선자를 돕고 있는 정책 브레인들이 그때 함께했다.
탄핵 사태 이후 치열한 자기 혁신
이 당선자는 이들과 함께 경부 대운하 공약을 내놓았지만 당 지도부에서는 이를 묵살했다. 환경단체 등의 반대가 빤히 보이는데 굳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냐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때 서랍 속으로 들어간 경부 대운하 계획은 지금의 한반도 대운하 계획의 뼈대를 이뤘다.
5년 전의 한나라당이 덜 ‘절박했다’면, 이번 대선을 앞둔 한나라당은 넉넉하게 앞서가고 있었음에도 범여권보다 훨씬 절박하고 치밀했다. 정권교체를 향한 한나라당의 절박함은 당의 혁신으로 나타났다.
혁신의 노력은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에서 연이은 참패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불법 대선자금 파동 직후 한나라당은 당사를 매각하는 것은 물론, 수백억원짜리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했다. 일각에서 ‘쇼’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천막 당사에서 버티며 한나라당 깃발을 놓지 않았다. 당 운영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무처 직원도 절반 가까이 구조조정했다. 2004년 총선에서는 최병렬 당시 당대표 등 중진들을 대거 불출마시켰다.
2005년에는 당 소장파들이 주축이 돼 당헌·당규를 현실에 맞게 고쳤다. 지난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 소장파들이 앞장서 대선 후보 경선 선거인단 구성에 대한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소장파는 맥빠지는 당내 경선 대신 흥행을 위해 당원과 일반 국민의 참여 비율을 5 대 5로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혁신안에 대해 애초 부정적 태도였지만, 결정적 순간에 이를 전격 수용했다. 지난 8월 한나라당 경선에서 여론조사의 우위를 바탕으로 가까스로 승리한 이명박 당선자가 혁신안의 최대 수혜자였다.
정병국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은 “국민들의 눈높이를 다 맞추지는 못했지만 과거 어느 정당보다도 내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당내 혁신을 시도했다”며 “한나라당의 피나는 노력이 이번 대선을 통해 일정 부분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명박 당선자가 이번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를 ‘반노 정서’의 전략적 활용에서 찾는다면,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나라당의 끊임없는 내부 혁신, 그리고 이를 통한 신뢰 회복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지난해 5·31 지방선거 이후 꾸준히 40% 이상의 정당 지지도를 유지했다. 대선 기간에도 당은 중심을 잃지 않았다.
지난 두 차례의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의 패배를 통해 얻은 교훈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한나라당의 집요한 시도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선거 패배의 원인을 찾아 불확실성은 제거하고 약점은 보완하겠다는 한나라당의 노력은 지난 수년간 끊임없이 이뤄졌다.

△ 출구조사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는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지지자들. 한나라당은 사회 양극화로 불안한 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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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정당으로 거듭나다
대표적인 것이 ‘이인제 방지법’이었다. 199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이인제 전 의원의 대선 출마로 쓴맛을 봤다. 경선 불복으로 인한 악몽에 시달리던 한나라당은 지난 2004년 ‘제2의 이인제’ 출현을 막기 위해 이른바 ‘이인제 방지법’을 들고 나왔다. 당내 경선에 나선 후보가 당을 깨고 출마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만약 이인제 방지법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언론은 박근혜 전 대표의 출마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를 쓰기에 바빴을지 모른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로 막판 곤욕을 치른 한나라당은 ‘이회창 방지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경선 출마자뿐만 아니라 일반 당원도 탈당해서 출마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심지어 한나라당은 대선 후보 등록 이후에는 후보 단일화 작업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심대평 방지법’도 내놓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둘 다 다음 대선에서라도 막판 변수는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도다.
보수 진영 전체가 이미 낡은 사고를 버린 채 칼을 갈아왔다는 사실에도 범여권은 둔감했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흔히 지적됐던 것이 인터넷이다. 당시 ‘노무현 바람’, 즉 노풍은 네티즌들의 지지를 타고 왔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젊은 유권자의 결집이 없었다면 노 대통령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한나라당이 2004년 박근혜 전 대표의 취임과 함께 3대 목표로 내세운 것은 ‘정책정당, 원내정당, 디지털 정당’이었다. 한나라당 디지털팀에는 중앙당의 모든 국실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이 배치돼 있다. 100명의 중앙당 당직자 가운데 13명이 디지털팀 소속이다.
김대원 한나라당 디지털팀장은 “2005년 4월 이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의 인터넷 홈페이지 방문자는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찾는 사람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2005년 하반기부터는 우리가 오히려 다른 정당들을 앞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네티즌으로 구성된 ‘747전사단’ 등이 인터넷 여론몰이를 담당했다. 당 외곽에서도 사이버기동대119 등 많은 인터넷 기반 지지모임이 활동했다.
‘젊은 보수’, 즉 뉴라이트 세력의 등장은 ‘담론 투쟁’이 더 이상 개혁·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2004년 총선 이전까지 이념과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전에서 보수 진영은 대체로 방어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2004년 이후 등장한 뉴라이트 세력은 권위주의와 부패의 이미지로 덧칠된 보수에서 ‘꼴보수’의 이미지를 덜어내는 데 한몫했다. 한편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무기로 먼저 사상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를 내내 괴롭힌 ‘작은 정부론’은 보수·우파 진영에서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작품’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사상전
정부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큰 정부’보다는 시장에 대한 주요 결정은 시장이 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작은 정부’ 논리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이를 거스른 채 관료들이 탁상행정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큰 정부’를 고집했기 때문에 ‘세금폭탄’이 떨어졌고 ‘부동산 가격 폭등’이 찾아왔다는 식이다. 종합부동산세를 내놓고도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한 참여정부와 개혁·진보진영에서는 ‘세금폭탄’이라는 프로파간다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는 “세금폭탄 논쟁으로 이어진 작은 정부론이나 교육 자율화, 북한 인권 문제 등이 우파가 먼저 나서서 문제 제기한 대표적 사례들”이라며 “작은 정부론도 마찬가지지만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좌파’ 진영에서는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을 포함한 보수·우파의 ‘변신’, 그리고 정권창출을 향한 ’절박함’은 이명박 당선자의 승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한 열쇳말일 수 있다. 그렇다면 보수의 변신과 절박함은 과연 누구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까. 개혁·진보 진영은 이 부분에 대한 고민과 대안모색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의 말이다.
“큰 틀에서 보면 보수가 변했다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수는 일관되게 시장과 경쟁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약자를 어떻게 포괄하겠다든지 하는 유연성을 일부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진보는 ‘이건 아니다’라는 식의 비판만 했을 뿐 대안이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계속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