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만남, 헤어짐, 그리고 극적인 해후…두 사람의 진술을 통해 재구성해본 ‘BBK 사건’ 풀 스토리
김경준? 그는 11월16일 저녁 6시55분 인천국제공항의 비행기 탑승 통로를 천천히 걸어 나왔다. 2001년 12월 미국으로 몰래 건너간 지 6년 만이다. 대통령 선거는 33일 남았다. 떠날 땐 아무도 모르게 떠났지만, 돌아올 땐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그를 지켜봤다. 그는 수건으로 가려진 수갑을 차고 있었다. 단 1분 동안 받은 카메라 세례는 그가 여태 받은 불빛보다 강했다.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그의 입에선 영어도 한국말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차분해 보였다.
이명박? 그는 같은 시각 TV를 보고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지금 시점에서 대통령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김경준의 송환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 후보는 이날 “뭐 그리 대단한 귀국이라고…. 범인 송환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또 “어느 누구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명박과 김경준 두 사람이 ‘BBK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BBK 사건’을 둘러싼 둘의 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180도 다르다. 한 사람의 말이 맞다면 다른 한 사람의 말은 거짓이다. 누가 살아남을까? 저녁 7시50분쯤 김경준은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빨려 들어갔다. 치킨게임의 심판은 검찰이다.
<한겨레21>은 두 차례의 김경준씨 인터뷰와 그동안의 이명박 후보의 주장, 미국 법원 기록 등을 바탕으로 이명박과 김경준의 관계를 재구성해봤다. 편집자
▣ 특별취재팀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1막.만남
1941년생 한국 국적의 이명박과 1966년생 미국 국적의 동포 1.5세 김경준은 언제, 어떻게, 왜 만났을까? 하나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만남의 역사’가 이젠 두 개의 스토리가 됐다. 상대의 역사는 부정된다. 이명박이 2000년 이후 김경준을 만난 것처럼 얘기하는 건 BBK가 투자자문업을 등록한 이후에 만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김경준은 만남에서부터 이명박이 종합금융사의 청사진을 그렸고, 자신은 머리와 몸만 빌려줬을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했다.
김경준이 말하는 역사부터 들어보자.
“1997년 한국에 들어와 살로먼스미스바니환은증권에서 근무했다. 99년 초 신문·방송·잡지 등의 인터뷰 요청이 꽤 있었다. 99년 중순쯤 김백준(이명박의 최측근)이 이미 나의 백그라운드(배경)를 조사하고 찾아왔다. 이명박이 금융 쪽에 관심이 많았고, 그걸로 ‘컴백’(복귀)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뜨는 별’이었지만, 이명박은 가라앉아 있었다. 이명박이 갑부라고 생각했고,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BBK도 처음부터 이명박이 계획했다. 내 돈을 투자할 이유는 없었다. 이명박은 여기저기 보는 눈들이 많아 BBK의 대표이사를 맡을 수 없었다. LKe뱅크를 지주회사로 만드는 구상 등 이명박은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지시했다. 부모님이나 누나가 이명박을 소개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명박의 역사는 다르다.
“2000년 2월 이전 언젠가 김경준을 만났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김경준의 부모와 누나인 에리카 김의 소개로 알게 됐다. 김경준의 부모가 애절하게 도와달라고 했다. 김경준이 자신의 금융 경력과 통합된 금융 서비스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사업 모델을 소개하면서,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국에 새로운 콘셉트(개념)를 지닌 사이버 종합금융 그룹사를 만드는 데 나도 동의했다. 김경준의 가족에 대한 믿음과 사업 모델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그의 책임 아래 운영한다는 조건으로 LKe뱅크란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김경준이 일상적으로 회사들을 운영할 수 있도록 이름을 빌려주고 재정적 지원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정치 방학이 2~3년 갈 것으로 보고 그 기간에 해야 할 일이 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치를 하더라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 김경준은 이제 한 달 남은 대선의 가장 큰 변수로 떠올랐다. 대선의 모든 이슈를 그가 삼켜버렸다. (사진/ 연합 김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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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인터넷 금융제국을 꿈꾸다
이명박과 김경준 두 사람의 꿈은 하나였다. 인터넷을 통한 금융제국 건설이었다. 그 중심에 ‘리드 컴퍼니’(lead company)인 LKe뱅크가 있었다. 1999년 11월 투자자문업으로 등록한 BBK는 김경준이 대표이사를 맡았다. LKe뱅크는 이명박의 지분을 100%로 해서 2000년 2월18일 출발했고, 6월까지 김경준(30억원)과 하나은행(5억원)의 증자 참여가 끝났다. BBK는 600억원이 넘는 투자를 끌어왔다. LKe뱅크는 e뱅크증권중개 설립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0월에 증권업 영위 신청에 대한 금감원의 예비허가도 나왔다. 100억원의 자본금으로 하되, 대표이사 사장은 김백준으로 예정했다. 모든 게 잘 풀려나가는 듯했다. 현대건설 신화로 불린 이명박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 것처럼 보였다. 세 회사는 한 사무실에서 공존했다.
김경준의 주장은 이렇다.
“BBK는 이명박 회사다. 나는 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내 투자금은 0원이다. 다스의 돈 190억원은 BBK, LKe, e뱅크증권중개의 자본금으로 흘러 들어갔다. (e캐피탈로부터) BBK를 인수할 때 들어간 30억원도 이명박 돈이다. 나는 명의만 대표이사였지, 실제론 이명박과 김백준이 운용했다. 나와 AM파파스와 이명박 3자가 맺은 비밀계약서가 있다. 다스와 심텍, 삼성생명 등 다 이명박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BBK에 투자했다. 하나은행이 LKe뱅크에 투자하기 전 이명박이 나한테 하나은행에서 돈이 올 거라고 말했다.
나는 7~8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인터넷상 거래 틀을 만드는 기술적인 부분에 집중했다. 금융상품을 만들기도 했다. 회사 운용과 자금 관리는 이명박과 종금사 대표이사 출신인 김백준이 다 했다. 이명박은 자금 관리에 꼼꼼했다
이명박은 김경준한테 배신당했다고 말한다.
“BBK는 김경준이 완전히 지배했던 회사다. BBK를 설립할 때 난 국내에 있지도 않았다. BBK는 내가 투자하기 전부터 김경준이 운영하던 회사다. BBK가 금감원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확인됐다. 검찰 조사에서도 나는 BBK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왔다. 심텍이 나를 믿고 투자했다고 하는 건 사실이 아니다. LKe뱅크도 김경준이 일상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했다. 당시엔 그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김경준의 제안으로 LKe뱅크의 주식과 자금을 MAF나 AM파파스에 거래했으나, 당시엔 이들 회사의 실체를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경준 소유의 ‘유령회사’(페이퍼 컴퍼니)였다. 김경준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100억원 이상을 빼돌렸다. 하나은행이 2001년 5억원을 돌려달라고 나와 김경준을 상대로 소송을 낸 뒤에야, 김경준이 사기를 친 것을 알았다.”

△ 지난 3년 동안 김경준이 수감돼 있었던 로스앤젤레스 소재 연방구치소의 입구.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 ‘BBK 사건’ 관련 3개의 소송에서 이겼다. (사진/ 연합 김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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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베일에 가려진 갈등과 이별
2001년 4월27일에 있었던 일은 둘을 갈라놓는다. 금감원은 BBK투자자문의 운용보고서가 위조됐을지 모른다는 제보에 따라 2001년 3월2일부터 11일 동안 검사에 착수했다. 금감원 조사관들은 서울 강남 대치동 코스모타워 8층에 있는 BBK를 샅샅이 조사했다. 김경준이 BBK의 회삿돈 30억원을 LKe뱅크의 증자 대금에 쓴 게 탄로났다. 이윽고 4월27일 BBK투자자문의 등록이 취소된다. 두 사람의 꿈은 이제 불가능하다는 게 확인됐다. 인터넷 금융제국의 ‘돈줄’ 구실을 할 BBK가 문을 닫은 것이다. 앞서 4월18일 LKe뱅크의 대표이사는 래리 롱이란 인물로 교체된다. 이명박은 이즈음 2002년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나은행은 이명박과 김경준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다. 김경준은 그해 12월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빚 청산을 하듯 옵셔널벤처스에서 횡령한 384억원 중 220억원은 BBK 투자자들의 계좌에 꽂아준다. 갈등과 이별로 점철된 이 시기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때이지만 베일에 싸여 있다.
두 사람은 왜 헤어졌을까? 김경준의 말은 이렇다.
“금감원에서 조사하면서 회사가 휘청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이 정치한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망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나한테 회복시키라고 했다. 그렇게 못한다고 하니까, 나한테 덤터기를 씌웠다. 처음에 정치를 안 하는 조건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명박은 어떻게 말할까?
“금감원에서 조사해 지적받을 정도면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어졌다. 그런데 금전 관계를 청산할 줄 알았는데 돈을 돌려주지 않는 거다. 나중에 보니까 미국에 가서 구속이 되어 있더라. 어쨌든 김경준이 그만큼이라도 돈을 돌려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다스의 돈만 떼먹고 갔는지 모르겠다. 다스한테도 돈을 갚아야지….”
4막.미국에서의 소송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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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준은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최대 걸림돌이 됐다. 김경준과의 싸움에서 진다면 이명박 후보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잃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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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두 사람은 적이 됐다. 2002년 4월15일 금감원은 옵셔널벤처스 주식의 시세를 조정한 혐의로 김경준을 검찰에 통보한다. 이명박의 친형 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대주주로 있는 다스는 2003년 5월 미국 법원에 김경준을 상대로 150억원을 돌려달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낸다. 미국에 있는 김경준을 상대로 낸 첫 소송이다. 곧바로 이명박도 김백준을 대리인으로 해서 김경준을 상대로 소송을 낸다. 한국 검찰은 이듬해 2월 미국에 범죄인(김경준) 인도 요청을 한다. 석 달 뒤 김경준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미 연방수사국(FBI)에 긴급체포된다. 옵셔널벤처스의 후신인 옵셔널캐피탈도 횡령한 돈을 돌려달라며 역시 김경준을 상대로 소송을 낸다. 이명박과 김경준은 미국에서 소송전쟁에 돌입했다.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미국에서 소송전은 김경준의 완승이었다. 미 연방정부가 김경준을 상대로 낸 재산가압류 소송에서 김경준이 이겼다. 다스도 중요한 이해관계자로 연방정부 편에 서 소송에 참여했지만, 증거 부족으로 졌다. 다스가 원고가 돼 벌인 소송에서도 김경준이 승리했다. 김경준이 한국 정부의 범죄인 인도 청구가 부당하다면서 낸 재판에서, 이명박 쪽이 김경준의 송환을 연기해달라고 한 요청도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6년부터 김경준은 “BBK는 이명박의 것”이라고 법정에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8월 두 차례에 걸친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김경준은 9월20일 이명박이 자신을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맞소송을 냈다. 소장에서 그는 “이명박이 사기와 탈세, 자금세탁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등 이 후보 진영에서 자신에게 씌운 굴레를 그대로 되돌려줬다.
이명박은 김경준이 자신과 김백준 몰래 돈세탁, 횡령 등 온갖 수법으로 ‘BBK 사건’과 관련된 모든 범죄를 주도했다고 말했다. 또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 등은 모두 김경준이 위·변조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쪽은 김경준이 ‘제2의 김대업’이라고 주홍글씨를 새겼다.
5막.송환 그리고…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 했던가? 6년 만에 김경준은 한국 땅을 밟았다. 김경준은 2004년부터 한국 정부의 송환에 응할 수 없다며 끌어온 소송을 지난 10월 접었다. 어차피 이길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송환 시점은 더 늦출 수도 있었다. 그는 왜 대선 직전을 택한 것일까? 그와 그의 가족들은 이명박 후보 쪽이 더 이상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이명박은 “김경준이 돌아오면 김대업이 된다”며,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정치권이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얘기했다. 이명박은 김경준이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인정하면 자신은 그것으로 끝이고, 손해 본 것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이제 막바지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미국 법률대리인들은 김경준의 송환을 막으려 애썼다.
그러나 결국 김경준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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