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만에 대선 구도를 보수 주도로 바꾼 이회창…두 후보 지지율만 60% 이상, 개혁·진보 진영은 왜 이 지경까지 왔나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법무사 이영길씨. 그는 경기도 호남향우회 연합회를 이끌고 있다. 경기도에는 31개 시·군별로 호남향우회가 있고, 각 시·군별 향우회 산하에는 최대 18개 지회가 있다. 경기도 호남향우회 연합회는 31개 시·군별 호남향우회는 물론, 경기도에 거주하는 350만여 호남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구라고 자임할 만하다. 연합회에 가입한 호남향우회 회원만 해도 25만여 명에 이른다.

△ 11월7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이회창 후보. 그는 단 며칠 만에 ‘이명박 대 이회창’의 구도를 만들었다.(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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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정동영이 아니라 이회창과”
이영길 경기도 호남향우회 연합회장은 한나라당 소속이다. 당적만 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지난해 5·31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경기도의원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비례대표 순번으로 10번이었던 이씨는 아깝게 낙선하고 말았다. 당선 커트라인은 7번이었다.
호남향우회 회장이라는 자리와 한나라당의 관계는 쉽게 말하면 ‘물과 기름’이다. 범여권의 전통적 지지 기반은 호남이라는 등식을 적용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이 장면은 범여권의 지지 기반이 얼마나 철저하게 붕괴됐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는 범여권의 딱한 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줬다. 출마를 선언한 뒤 이 전 총재의 지지율은 20~25%를 기록했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 합치면, 두 보수 후보의 지지율이 60~70%에 달하는 셈이다. 반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15% 안팎의 지지율에 머물며 3위로 처졌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나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의 사정도 나을 게 없다.
범여권과 민주노동당 후보들을 더욱 암담하게 만드는 현실은 보수 후보들로부터 ‘주적’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동영 후보는 그동안 ‘한나라 대 반한나라당’ 구도를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가까스로 ‘반한나라당’의 중심에 서려는 순간, ‘이회창’이라는 돌발변수를 만난 것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이 후보는 정 후보가 수개월 동안 구축하려 애써온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의 대선 구도를 불과 며칠 만에 ‘이명박 대 이회창’ 구도로 바꿔치기해버렸다. 이 구도 속에서 정 후보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일 따름이다. 이명박 후보의 주적은 어디까지나 정 후보가 아니라 이회창 후보다.
선거 전략에 밝은 한나라당 관계자는 남은 기간의 주요 변수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이같이 말했다. “정동영 후보를 변수로 보지 않는다. 범여권 후보 단일화? 그쪽 후보 단일화에 신경쓸 처지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단일화에 성공한다 해도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은 30%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이회창 후보는 자력으로 30%까지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싸움은 정동영과 하는 것이 아니라 이회창과 하는 것이다.”
보수 진영 후보들끼리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는 틈바구니 속에서 범여권과 민주노동당 후보는 맞상대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범여권과 민주노동당 후보들로서는 굴욕이라면 굴욕이고, 모욕이라면 충분한 모욕이다.
원인은 뭘까. 두 명의 386 운동권 출신 대통합민주신당 관계자는 굴욕적 결과에 대한 원인을 묻자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개혁·진보 진영의 지지층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실패한 부분도 많지만 우리는 여전히 진보적 가치를 대변하는 세력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 지지층은 도저히 대안이라고 할 수 없는 부패한 최고경영자(CEO)와 수구·보수 세력을 자신의 역할모델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관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한 것처럼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의 양강 구도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진보 진영의 필승 공식이던 보수의 분열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저쪽은 여전히 65% 안팎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반면, 우리는 그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범여권의 집토끼들 대부분 이명박에게
개혁·진보 진영이 이처럼 철저하게 무너진 것은 우선 이른바 ‘집토끼’들이 사라진 결과다. 비유하자면, 이들은 잠시 외출한 것이 아니라 집을 나가서 길을 잃었거나 다른 집으로 완전히 넘어가버린 상황이다.
범여권의 집토끼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념적으로 보수이면서 스스로 중도·진보라 주장하는 이명박 후보에게 범여권의 집토끼 가운데 상당수가 몰려가 있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일치된 분석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민병두 의원은 “사회과학적 기준에서 본다면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상당수 유권자들은 이 후보를 진보, 혹은 중도 후보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10월28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실시한 유권자 이념지형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조사에서 진보 성향 유권자는 전체의 24.4%, 온건진보 27.6%, 온건보수 24.9%, 보수 18.7%라는 결과가 나왔다(무응답 4.4%).
진보 혹은 온건진보 성향의 유권자가 오히려 보수(온건보수 포함) 쪽보다 많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문제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이 정동영이나 문국현, 권영길 후보보다 이명박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사에 따르면 온건진보를 포함한 진보 성향 유권자 가운데 47.5%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면, 정동영 후보는 이 집단에서 23.6%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주적 취급도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11월6일 이랜드 노조원들과 악수를 나누는 정동영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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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은 “유권자들이 개혁·진보 진영 내에서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자 탈이념적·실용주의적 이미지를 갖는 이 후보 쪽으로 쏠리는 측면도 있고, 아예 이명박 후보가 더 진보적이라고 보는 유권자들도 있다”고 분석했다.
보수 진영의 전략통으로 알려진 윤여준 전 의원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윤 전 의원은 “지난 2002년 대선 이후 젊은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탈이념화하고 있다”며 “이같은 결과는 이념적 보수화와는 구분되는 상대적 보수화”라고 설명했다.
개혁·진보 진영의 집토끼들이 보수 진영의 대표였던 이명박 후보에게 몰려가 있는 현실에 대한 책임은 우선 범여권에 있다. 이 후보가 개혁·진보 세력들의 착시 현상을 유도하는 ‘마술’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라 범여권, 즉 참여정부와 과거 열린우리당이 보여줬던 ‘개혁의 후퇴’에서 비롯된 결과인 것이다.
우선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17대 국회 초반 박창달 전 한나라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부결 사태나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가 거론된다. 몇몇 상징적 사건을 둘러싸고 노정된 열린우리당의 소신과 전략 부재로 인해 개혁·진보 유권자들의 이탈이 시작됐다는 지적이다.
노혜경 전 노사모 대표는 “참여정부 5년 동안 보수 언론들은 정권 탈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정치세력과 다름없었음에도,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이들을 활용의 대상으로만 파악했다”며 “개혁 세력의 요구를 의정활동에 반영하기보다는 정체성 배반과 정당 개혁에 역행하는 ‘지도부발 친위 쿠데타’를 거듭하면서 결국 개혁·진보 세력 유권자들의 외면을 사고 만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진보 진영 비겁했다
지난 5년간의 한나라당의 집요한 공격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도 개혁·진보 진영이 무너진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정책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과도하게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맞서야 했었다는 지적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5년 동안 줄기차게 정부·여당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이를 정면 돌파하면서 끝까지 전통적 지지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의 대통합민주신당을 포함한 개혁·진보 진영은 과도한 공격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비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진보적 지식인들과 시민사회 세력 역시 이같은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운 개혁·진보 어젠다를 제시하고 개혁에 동참하려는 진지한 노력보다는 개혁·진보 진영 내부로 관념적 비판의 총구를 돌리면서 제 살 깎아먹기에 급급했다는 평가다.
안희정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은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면, 국민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세력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역사 속에서 단결해왔던 개혁·진보 세력이 독재가 사라진 시대에 맞게 한 단계 발전된 이념적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 셈”이라고 말했다.
범여권을 떠나버린 집토끼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는 최근 두 개의 ‘혁명적’ 공약을 내놓았다. 2011년 대학입시 폐지 등 교육 개혁안과 불법 간접 고용을 제한하는 비정규직 보호법 보완책이었다. 한반도 5대 철도 건설 공약이 오히려 무색해질 정도의 파격이었다. 모두 개혁·진보 진영의 유권자를 겨냥한 나름의 묘수였다.
하지만 정 후보가 개혁·진보 진영을 겨냥해 야심차게 준비한 이들 공약은 ‘이회창 쇼크’로 인해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 후보 쪽 핵심 관계자는 이회창 후보의 출마 선언 직전 <한겨레21>과 만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과 범여권 단일화, 그리고 이명박 후보의 경제 이슈에 필적할 만한 대형 이슈를 개발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 이슈 논쟁은 ‘이회창 등장’이라는 변수와 조만간 시작될 BBK 사건 수사로 인해 적어도 11월까지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남은 것은 두 가지다. 그런데 둘 다 쉽지가 않다. 우선 노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 문제는 정 후보 쪽과 친노 진영 간의 인식차가 여전히 존재한다.
애당초 정 후보 쪽에서는 늦어도 11월10일까지 안희정 참평포럼 상임집행위원장과 이강철 전 청와대 정무특보가 선대위에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다. 친노 진영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한 명인 유시민 의원이 11월3일 ’시민광장’ 모임에서 정 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만큼, 안 위원장과 이 전 특보까지 합류하면 이 세 명을 지렛대로 노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친노 진영 “정 후보가 사과해야”
그러나 친노 진영은 이같은 방식의 화합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백원우 의원은 “정 후보가 전통적 지지층을 회복하려면 그동안 취해온 탈노무현 전략부터 수정해야 한다”며 “참여정부의 정책 노선을 비판하고 부정한 사실에 대해 정 후보가 직접 사과하는 것으로 지지층을 달래야 한다”고 말했다.
안희정 위원장 역시 “정 후보가 열린우리당을 깨고 나간 것에 대해 사과하고 노 대통령과의 진정한 화해를 시도한 뒤라야 개혁·진보 진영에도 반전의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밝혔다.
인적 화합으로 친노 진영을 아우르려 했던 정 후보 쪽 생각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친노 진영을 끌어안는 것에서부터 범여권의 집토끼를 잡기 위한 시동을 걸 요량이었던 정 후보 쪽에서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