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이종찬 기자rhee@hani.co.kr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된 8월20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이날 새벽까지 전국 248개 투표소에서 올라온 투표함이 열리면서 이명박, 박근혜 양쪽 캠프 핵심 관계자 사이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교차했다. 개표 상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3시30분쯤 당선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승패를 가른 것은 선거인단의 현장 투표가 아니었다. 개표 작업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되는 동안 한쪽 구석의 ‘금고’에 밀봉된 채 잠자고 있던 여론조사 결과였다.

△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은 홍준표”

박근혜 후보는 모두 13만893명이 참여한 선거인단 투표에서 432표차로 이명박 후보를 누르고도, 54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뒤지는 바람에 패하고 말았다. 경선룰에 따라 응답자 한 명을 6표꼴로 반영한 결과 박 후보는 이 후보에게 2884표(환산치)를 뒤지는 것으로 나왔다. 최종 결과는 이 후보의 2452표 차 승리.

경선 직후 이명박 후보의 승리는 여론조사의 승리라는 말이 불거져나왔다. 한나라당 핵심 관계자는 “이명박 당선의 일등공신은 홍준표”라고 촌평했다. 2005년 6월 한나라당 혁신위원장을 맡고 있던 홍준표 의원이 당 대선 후보 선출제도를 바꿔 일반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20% 반영토록 한 사실을 지적한 말이었다. 그전까지 한나라당은 대의원과 일반 당원, 그리고 국민참여선거인단 등으로 구성된 전국선거인단 대회를 통해 대선 후보를 뽑았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얼굴이 여론조사 결과로 뒤바뀌었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경선을 앞두고 있는 범여권 역시 여론조사를 대선 후보 경선에 활용하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9월3~5일 실시되는 예비경선을 아예 여론조사로만 치르기로 했다. 9월15일부터 진행되는 본경선에 여론조사를 반영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민심에서 앞서고 있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 쪽은 여론조사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반면, 조직력에서 앞서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여론조사는 완전국민경선제의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민주신당과 별도로 경선을 벌이는 민주당의 사정도 비슷하다. 조순형 의원이 여론조사 확대를 주장했고, 이인제·신국환·김영환 후보 등이 이에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은 8월21일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15%로 결정했다.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나머지 주요 3당의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 여론조사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고, 대선이 치러지는 2007년 한국의 정치 지형을 여론조사가 좌우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지금이야 여론조사가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결정짓는 잣대로 쓰이기도 하는 실정이지만 여론조사가 정치 현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대부분의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13대 대선이 치러진 1987년이 정치 여론조사가 선거에 활용된 원년이라고 입을 모은다. 당시 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후보 쪽은 광고기획사 오리콤을 통해 지속적으로 민심을 확인했다.

1997년·2002년 대선 거치면서 전성기

△ 8월20일 결론이 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의 승패는 여론조사에서 갈렸다. 경선 직후 박근혜 후보의 지지자들이 한나라당사 입구에 모여 경선 무효를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사진/ 한겨레21 이종찬 기자)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에 여론조사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제한적이었다. 우선 유선 전화기 보급률이 높지 않았던 탓에 전화 여론조사가 쉽지 않았다. 여론조사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도 초보적 수준에 그쳤다. 결과를 받아놓고도 제대로 읽을 줄 몰랐다. 단일화에 실패한 채 독자 출마를 선언한 김대중, 김영삼 양김 후보는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조사 결과만을 믿으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론조사가 적극적으로 활용된 최초의 선거는 1992년 대선이었다. 당시 민자당 후보로 나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 쪽 캠프의 전병민씨는 여론조사를 선거 전략 수립에 활용한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전씨는 YS의 선거기획팀인 ‘동숭동팀’을 이끌며 YS의 메시지와 선거기획을 담담했다. 전씨는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92년 대선 당시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 돌입하면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선거 전략과 메시지를 만들었다”면서 “각종 여론조사 자료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올라왔는데, 주요 고비마다 이를 바탕으로 적절한 전략을 구사했다”고 말했다.

예컨대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면 영남 유권자를 대상으로 이 사건에 대한 여론조사를 급히 돌려보는 식이었다. 여기서 파악된 민심의 미묘한 흐름은 전씨의 분석을 통해 김영삼 후보에게 전달됐고, 캠프의 대응으로 이어졌다.

선거 여론조사는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보수 진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론조사 활용에 소극적이었던 개혁·진보 진영에서도 97년 대선에 접어들면서부터 여론조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각 언론사에서는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 추이를 중계했다.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에 이른 과정은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삼파전을 벌이고 있던 노·정 두 후보는 지지율 하락이나 정체로 단일화 압박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단일화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노 후보는 국민경선을 주장했고, 정 후보는 여론조사를 고집했다.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은 단일화 합의와 파기, 재협상의 과정을 거친 끝에 대선을 고작 한 달여 앞둔 11월15일 합의에 성공했다. 한 차례 TV토론을 가진 뒤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확정하기로 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여론조사 단일화’는 출발부터 많은 우려를 낳았다. 조사를 수행해야 할 여론조사 업체부터 난색을 표했다. 당시 TNS코리아에서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그릇된 사회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며 정치권의 결정을 비판했다.

총선과 지방선거에도 활용

8월19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여론조사를 어떤 문항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양쪽이 대립했던 것처럼 당시에도 설문 문항에 대한 양쪽 입장이 달랐다. 노무현 후보가 주장한 것은 ‘노무현과 정몽준 가운데 누구를 더 지지하느냐’라는 지지도 조사였다. 정몽준 후보는 ‘이회창 후보와 겨뤘을 때 누가 더 경쟁력이 있느냐’는 설문을 고집했다. 지지도 조사에서는 노무현이 앞섰지만 이회창 후보와의 가상 대결 구도에서는 정몽준이 강했기 때문에 벌어진 갈등이다.

양쪽이 최종적으로 합의한 설문 문항은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 후보로 노무현, 정몽준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였다. 두 후보의 주장을 절충한 설문안이었다. 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4.6% 차로 승리.

여론조사 전문기관 엔아이코리아의 이흥철 대표는 “전화로 이같이 물어보면 유권자 입장에서 앞부분에 흘러가는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부분보다 ‘노무현, 정몽준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라는 부분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면서 “설문 문항의 중요성을 양쪽 모두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큰 논란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노·정 두 후보가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를 이룬 모습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었다. 하나는 여론조사가 정당의 선거 후보를 결정짓는 기준으로 활용되는 사례를 남긴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여론조사가 설문 구성 등에 따라 상반되는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는 여론조사로 이뤄졌다. 대선 직전 합동유세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그러나 이후 정당들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여론조사를 도입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보다는 그 효용성에 더 주목했다. 거의 모든 선거의 후보자 선출에 여론조사를 도입한 것이다.

2004년 총선과 2006년 5·31 지방선거의 공천 및 후보 경선에도 여론조사는 폭넓게 활용됐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강금실과 이계안 후보의 당내 경선 과정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50% 반영했다.

한나라당 역시 맹형규, 홍준표 후보가 뒤늦게 나타난 강금실 후보에게 여론조사에서 밀리자 역시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오세훈 후보를 영입했다. 오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도 여론조사에서 크게 앞선 덕분에 당원, 대의원 등을 포함한 선거인단 투표에서 우세했던 맹 후보를 제치고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민주신당 본경선은 어떻게 될까

정당의 대통령, 혹은 서울시장 후보가 여론조사 결과로 뒤바뀌는 ‘한국적 현상’이 앞으로도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반성과 우려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의 후보 선출 과정에 민심을 반영하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 방식이 여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라면 문제라는 지적이다.

각국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을 연구한 안순철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도 여론조사를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제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다”며 “정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전략적 흥행만을 노리다 보니 여론조사가 선거에 직접 개입하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 역시 “여론조사를 후보자 결정 방식에 도입하는 것은 여론조사가 가진 표본오차조차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행태”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사정은 좀더 복잡하다. 민심에서 앞서는 후보와 당심, 즉 조직력 면에서 우위를 보이는 후보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심에서 앞서는 후보는 여론조사를 대폭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당심에서 우위를 보이는 후보는 당원 중심의 경선이나 국민참여경선을 고집하게 마련이다.

9월15일 시작되는 민주신당의 본경선 선거인단이 어떻게 구성될지는 이런 측면에서도 주목해볼 만하다. 여론조사를 도입해야 한다는 ‘현실론’과 이를 반대하는 ‘원칙론’이 정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학규 전 지사 쪽은 민심을 담기 위해 여론조사 반영이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정동영 전 장관 쪽은 완전국민경선제라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손학규 전 지사 쪽 우상호 대변인은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이길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후보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일반 국민들에게 누구를 선호하는지 물어봐야 한다”면서 “여론조사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특정 지역에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후보가 유리할 텐데, 그 후보가 본선에서 경쟁력을 가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 50% 반영안을 주장하는 손 전 지사와 달리 정동영 전 의장과 일부 친노 후보들은 여론조사 반영에 반대하거나, 반영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정 전 의장 쪽에서는 “여론조사로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는 바로 ‘이명박식’ 사고”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민심을 확보할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한다. 그런데 국민참여경선만으로 일반 국민의 적극적 참여를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정당이 당면한 현실이고, 여론조사를 주장하는 쪽의 논리다. 일반 국민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낼 자신이 없는 정당은 여론조사라는 편법을 통해 민심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

당원 중심의 경선도, 그렇다고 완전국민경선 방식도 아닌 여론조사라는 임시방편을 도입한 정당의 구조는 선거가 지나고 나면 또다시 허약해진다. 2002년 대선에서 여론조사에 따른 후보 단일화를 관철시킨 국민통합21이 대표적 사례다. 2002년 11월 4일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만들어진 국민통합21은 대선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97년 대선 직전 이인제 의원이 창당한 국민신당 역시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민심을 흡수할 뿌리가 약한 정당은 급한 대로 여론조사를 선택하고, 여론조사는 다시 정당이 뿌리내릴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 여론조사가 이 악순환의 고리 구실을 하는 셈이다.

		‘한철 장사’ 해야 하나 선거철 외에도 정책에 대한 지역구 민심 파악에 활용한다면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여론조사가 정치를 지배한다.’ 틀린 말일 수 있지만 적어도 선거철 여론조사가 얼마나 중요한 정치 수단이 되고 있는지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한철 장사’다. 여론조사는 선거철 외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정치인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추진하는 정책과 법안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듣거나 지역구 민심을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여론조사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여론조사 기관의 상징인 갤럽의 편집장 프랭크 뉴포트는 미국 정치인들이 선거 때만 여론조사를 활용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여론조사>에서 “지역구나 해당 주의 여론을 과학적으로 조사한다는 건 걸려오는 전화나 편지에 대한 단순한 반응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며 “법률이나 정책을 수립하고 개정하기 위한 주요 토대로서 여론조사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조사해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적 상황만은 아니다. 정치·사회 여론조사를 전문으로 해온 임상렬 리서치플러스 사장은 “선거철 외에도 평상시 정치활동에 여론조사가 활용될 여지가 많지만, 지난 17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의뢰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표’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이 여론조사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선거 때 자신이 얼마나 알려졌고, 어떻게 평가되고 있나를 알아보고 싶을 때다. 정치권 전체로 봤을 때 이런 지지도 중심의 조사 경향성이 과거보다 강해졌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다. 이상일 TNS코리아 이사는 “과거에 비해 지지도가 얼마나 높은지 ‘인기투표’ 중심으로 조사되는 것 같아 아쉽다”며 “예전에는 ‘3김 정치’로 상징되듯 정치권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면에선 부동층 공략을 목적으로 이슈나 정책에 대한 여론조사를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했다”고 말했다. 대선 전략과 여론조사를 주제로 국회에서 세 번의 토론회를 개최한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은 드문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고 의원은 2004년부터 해마다 자신의 지역구인 경기 성남시 분당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역 현안을 놓고 여론조사를 벌였다. 올해엔 분당~수서간 준고속화도로를 둘러싼 지역 주민 간 의견 대립을 조정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여론조사를 할 예정이다. 고 의원은 “지역구 의원은 지역구민과 동떨어진 행동을 할 수 없다”며 “지역 현안뿐만 아니라 남북 문제든 교육 문제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지역구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론조사를 해 의정 활동에 충분히 반영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론조사는 정치의 윤활유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