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포로감시원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의 재판 기록 단독 입수…어이없는 재판 끝에 사령관으로 오인받아 사형수가 됐던 이학래씨를 만나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이학래씨는 1925년생이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3남매의 첫째로 태어났다. 소작농이었던 가난한 아버지는 장남인 그에게 신식 교육을 가르치길 원했다. 소학교에 입학했고, 가까스로 졸업했다. 상급학교 진학은 꿈꿀 수도 없었다. 첫 일터는 여수에 있는 조선소였고, 두 번째 직장은 나무를 자르는 제재소였다. 어린 이학래는 중노동을 견딜 수 없었다. 세 번째로 고깃배를 여러 척 가진 일본 부잣집에서 먹고 자는 ‘고스카이’로 취직했다. 그 와중에 아는 사람의 소개로 보성우편국에 취직해 처음엔 우편봉투에 스탬프 찍는 일을 하다가, 등기우편 배달부로 나서게 됐다. 그의 창씨명은 히로무라 가쿠라이(廣村鶴來)로 우편으로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신청해 독학으로 공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처벌 가치 없다” 각하했다가 다시 체포
우편배달부로 일하던 그는 홋카이도 탄광에 징용간 사람이 월급을 모아 보낸 등기우편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 돈을 물어주고 우체국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었다. 1942년 봄이었다. 어느 날 면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데, 자네가 가소!” 근무 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고 했다. 2년만 고생하면 강제징용과 머잖아 시행될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자원이었을까, 강제동원이었을까. 며칠 뒤 간단한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2월27일 기자와 만나 과거를 회상하다, 그는 “그때, 기뻤다”고 말했다. 동남아시아로 떠날 때 열일곱 살이었고, 호적 나이로는 열다섯 살이었다. 해방 이후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죄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이학래씨의 포로감시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미 팔순을 넘긴 노년의 그였지만, 군사법정 판결에 대해 “나는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죄목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사형선고를 받은 것일까. 그동안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B·C급 전범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주장이 없지 않았으나, 정작 그들의 재판 기록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이뤄지지 못했다. <한겨레21>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이학래씨 등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조선인 B·C급 전범들의 재판 기록을 입수해 분석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으로 조선인 B·C급 전범들이 단죄받은 영국·네덜란드·미국·중국 쪽의 전범재판 자료도 찾아내 판결 과정을 밝힐 예정이다.
이씨는 두 번의 군사재판을 받았다. 1946년 오스트레일리아 제1전쟁 범죄 섹션(1st Australian War Crime Section)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기소됐지만, “처벌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각하됐다. 그는 귀국선에 몸을 실었고, 연료 보급을 위해 잠시 기항한 홍콩에서 다시 체포됐다. 두 번째 재판에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0년형으로 감형된다. <한겨레21>이 입수한 문건은 101쪽 분량의 두 번째 오스트레일리아 재판 기록으로, 첫 장에 쓰인 문서 제목은 ‘한국인 포로감시원 히로무라 가쿠라이의 전쟁범죄에 대한 군사재판 진행 기록’(War Crime Proceeding of Military tribunal Korean Guard Hiromura Kakurai)이다.

△ 전범이라는 멍에를 쓰고 출옥했을 때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다. 그들은 1955년 동진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했다.(사진/ 김은식 제공)
|
재판 기록은 크게 △전체 재판 과정을 간략히 요약한 군사법정 기록 △감형을 권고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법무감 리포트 △일본군 변호사 리포트 △법정 녹취록 △이학래의 범죄 사실을 증언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진술서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재판은 1947년 3월18일에서 20일까지 사흘 동안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죄목은 1943년 3~8월에 시암(지금의 타이)의 힌똑(hintok) 분주소에 근무하면서 포로들을 타이와 버마를 잇는 ‘태면철도’를 놓는 노역에 강제 동원하는 등 비인도적으로 다뤘다는 것이었다.
이학래씨는 “그 시절 포로수용소의 상황이 참혹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식료품·의약품·의복이 지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혹독한 노역이 시작됐고, 뒤이어 닥친 부상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1943년 3월에서 한 달이 지난 뒤 800명에 달하던 오스트레일리아 포로의 25%가 병원으로 실려갔고, 공사가 마무리됐을 때 100여 명이 숨을 거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검찰은 자국 포로들을 생지옥으로 몰아넣은 일본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포로들의 집단 사망의 책임은 일본군의 비 인도적인 포로 정책에서 찾아져야 겠지만, 분노한 서양인들이 반강제로 끌려나와 감시원이 된 식민지 청년들의 사연에까지 귀기울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가혹행위 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힌똑에서 이학래씨의 지위는 포로감시원이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고용된 민간인으로, 군 계급체계상 이등병보다도 못한 군속이었다. 그런데 군사법정 기록에 담긴 ‘증거 요약’(Precis of Evidence) 항에서 그는 엄청난 권한을 가진 ‘수용소 사령관’(he occupied the position of the Camp Commandant)으로 둔갑하고 만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오스트레일리아 군검찰이 이씨 밑에서 포로 생활을 한 병사들의 진술서를 객관적 검토 없이 그대로 증거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모르는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은 대부분 이씨의 일본 이름 ‘히로무라 가쿠라이’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별명으로 일본군과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을 구분했다. 이학래의 별명은 ‘도마뱀’(lizard)이었는데, 그는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장교로 포로가 됐던 리처드 앨런과 레지널드 휴스턴이 진술한 “도마뱀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인이 캠프의 책임자였다”거나 “히로무라 이등병이 캠프 사령관으로 있는 힌똑으로 이동했다”라고 진술한 대목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검사는 군 계급상 하찮은 신분이었던 이학래를 사령관으로 지칭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가 공식적으로 캠프 사령관에 취임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억센 성격으로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 실질적으로 캠프를 운영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 이학래 동진회장(맨 왼쪽)은 김원웅 의원을 만나 “일본 국회를 움직이기 위해 한국 국회의원들이 나서줘야 한다”고 말했다.
|
재판 기록에 나타난 옛 포로들의 증언과 이학래의 항변을 종합해보면, 그는 철도 공사를 위해 일본군 공병대에서 차출을 요구한 노역 인원을 맞추려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관 E. E. 던롭 중령과 자주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던롭 중령은 부상자들을 노역장에 보내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포로들은 현장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분노를 쌓아갔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가 병사 오스틴 파이프는 “도마뱀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국인 이등병이 병사들을 철도 공사장에 내보낸 책임이 있다”고 말했고, 일부는 이학래가 던롭 중령을 구타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반면, 구타는 없었고 이학래가 다른 포로감시원에 견줘 별다른 가혹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리처드 앨런 대위는 “나는 던롭 중령이 히로무라에게 구타당했던 일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다. (중략)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히 더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옛 포로들의 진술서 대부분은 이학래에게 극히 불리한 것들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전쟁범죄자들을 골라내기 위해 포로감시원들의 사진을 찍어 옛 일본군 포로들에게 보여준 뒤 혐의점이 있는 사람들을 잡아 재판을 진행했다. 대질심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학래씨는 기자에게 “규율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따귀를 때린 적은 있지만, 그 밖의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식민지 조선인 청년에게 포로들의 딱한 사정을 봐줄 만한 재량권이 어느 정도까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 울먹임, 그리고 사형선고
재판을 받을 때 이학래는 스물두 살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무척이나 겁냈던 것 같다. 그는 책임을 추궁하는 검사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고, “노역 시간이 5시간 반에 불과했다”는 응답으로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변호인은 “피고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기 때문에 전범이 될 수 없다”는 영국 장교의 의견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히로무라 가쿠라이는 일본군에 고용된 민간인으로 그의 행위는 상급자의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일본군 이시이 대좌의 증언도 수용되지 않았다. 이학래의 마지막 증언은 “강제로 끌려와 한 달에 35엔을 받고 일했다”는 울먹임이었다. 잠시 뒤 속개된 재판의 판결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히로무라 가쿠라이, 기립하시오. 재판부는 당신에게 교수형을 선고한다.”(HIROMURA KAKURAI, stand up. The Court sentences you to death by hanging)
 |

△ <한겨레21>이 입수한 이학래 회장의 군사 재판 관련 문서.
|
다른 사람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마트라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숨을 거둔 조문상의 재판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1921년에 개성에서 태어났고, 경성제국대학을 다닌 당대의 엘리트였다. 그는 일본군과 영어를 쓰는 포로들 사이에서 통역병으로 일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검사는 그에게 “기독교의 교리는 약한 사람에게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 아닌가”라고 따져물었다. 조문상은 “군대에서는 개인의 양심과 종교적 신념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답했다. 그의 재판에 제출된 진술서는 영국군 장교가 작성한 것인데, 오스트레일리아 군검사는 진술서에서 그가 “‘잔인한 짓을 했다’고 인정했다”고 말했다. 조문상은 “내가 말한 대로 썼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서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1947년 2월25일에 사형당했다.
경상북도 영일에서 1919년에 태어난 박정근의 별명은 ‘알리’였다. 그의 창씨명이 아라이 히데오(新井英夫)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사카에 있는 니혼대학에서 클럽 활동으로 복싱을 배웠다. 옛 포로들은 “태면철도 80km 지점에서 알리라는 덩치 큰 전문 복서가 포로들을 때렸다”고 증언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검찰은 “그게 네가 아니냐”고 물었고, 박정근은 “나는 약한 죄수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박정근은 “아라이라는 이름을 가진 포로감시원이 많았다”고 항변했지만,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지금에 와서 아라이 히데오가 포로들을 때렸던 그 알리인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경기도 개성에서 1918년에 태어난 김종연의 창씨명은 가네미야 쇼렌(金宮鐘淵)이었다. 그의 재판은 1948년 8월4일에서 9일까지 계속됐다. 그의 별명은 ‘스네이크 아이’였는데, 재판 기록에 첨부된 사진을 보니 눈매가 매서워 보이긴 했다. E. T. 넬 하사관은 그가 “다른 포로감시원들보다 특별히 더 잔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은 뒤 이학래는 사형수 감방이었던 싱가포르 장기형무소 P홀로 옮겨졌다. 그는 “영어는 몰랐지만, ‘데스 바이 행잉’이 죽는다는 뜻인 줄은 알았다”고 말했다. 사형을 선고받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며, 그는 사형수 감방에서 8개월을 갇혀 지냈다(보통 형 선고에서 집행까지는 3개월 정도가 걸렸다). “마지막에는 나와 임영준(1947년 6월18일 형 집행)이라는 사람 두 명이 남았는데, 결국 그 사람도 가고 혼자 남겨졌지. 지금까지 용케도 살아 있구먼.”
친일파와 조센징으로 배척당해
형 집행이 늦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감형을 둘러싸고 변호인과 오스트레일리아 군검찰의 공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범재판은 기본적으로 항고를 인정하지 않는 단심이지만, 변호인의 청원(petition)을 받아 상급기관에서 이를 확인(confirmation)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변호인 쪽에서는 “그가 이전에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가 별다른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풀려났다”는 점을 물고 늘어졌고, 오스트레일리아 법무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법무감(필기체 서명만 남아 있어 이름을 알아볼 수 없었다)은 결국 “다른 사건에 견줘 특별히 더 나쁜 사건이라 할 수 없으니 형량을 (사형에서) 장기형(imprisonment for a long period)으로 낮추자”는 건의가 담긴 리포트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감형이 결정된 것은 1947년 10월20일이었고, 이씨에게 감형 사실이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2주일이 지난 1947년 11월7일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에겐 갈 곳이 없었다. 조국은 그들을 친일파라 멀리했고, 일본은 그들을 조센징이라 부르며 배척했다. 이씨의 투쟁은 별다는 소득 없이 62년째 계속 중이다. 그는 “죽어간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얀 백발에, 온화한 전라도 말씨였다.
문창재 <나는 전범이 아니다>(2005),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2006) 참조
 |
 | |
B·C급 전범은 무엇인가
전쟁수행 과정에서 비인도적 행위 저지른 장교와 사병
‘B·C급 전범’이란 말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낯선 용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승리를 거둔 연합국은 전쟁 기간에 벌어진 독일과 일본의 ‘전쟁범죄’를 벌하기 위해 군사재판을 열었다. 그 재판의 규칙이 되는 군사재판조례에는 전쟁범죄의 형태를 A항 ‘평화에 반하는 죄’, B항 포로 학대 등 ‘통상의 전쟁범죄’, C항 ‘인도에 관한 범죄’ 등 3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크게 보기
A급 전범으로 지목된 사람은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데 직접적으로 가담한 전쟁 지도자, B·C급 전범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전쟁 법률·관습을 어기거나 비인도적 행위를 저지른 장교·사병들이었다. A급 전범은 뉘른베르크 재판(독일)과 도쿄 재판(일본)이라는 국제 법정에서 기소·처벌됐고, B·C급 전범들은 연합국 7개국이 각각 자국 법령에 기초해 연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았다.
종전 이후 B·C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사람들은 5700여 명이고, 이 중 984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처벌자 가운데 조선인은 148명이고, 그 가운데 129명이 강제 동원돼 포로 감시 업무에 내몰린 포로감시원이었다. 148명의 조선인 B·C급 전범 가운데 일본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하다 교수당한 홍사익 중장이 유일하다.
| |  |
 |
 |
 | |
“남은 건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
1950년대 초 석방된 뒤 끊임없이 투쟁한 조선인 전범자들
해방 이후 조선인 B·C급 전범들은 한국 정부의 무성의와 일본 정부의 차별 속에서 말 못할 고통을 강요당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 일대의 전범 형무소에서 몇 년씩 복역한 뒤 1951년 8월 도쿄 이케부쿠로에 있던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돼 1950년대 초부터 차례로 석방 또는 가석방됐다. 조선인 전범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은 그 무렵이다. 1952년 4월28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조선인 전범 대부분은 일본 국적을 벗어나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평화조약의 처벌 대상은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에 한정됐기 때문에, 그들은 ‘즉시 석방’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처벌받았을 때 일본인이었으니, 형기를 채워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이는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에 의해 추인된다.
사실, 풀려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B·C급 전범들을 일본인과 똑같이 처벌하고, 형무소 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을 원호 대상에서 제외했다. 김은식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은 “처벌할 때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처벌하고, 원호 요건을 따질 때는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친일파’로 매도됐고, 일본은 그들을 따뜻하게 품지 않았다. 석방될 때 그들의 나이는 대체로 30대 중반이었다. 생의 엄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난 속에서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1955년 조선인 전범자들은 서로 뭉쳐 같이 잘살아보자라는 뜻으로 ‘동진회’(同進會)라는 모임을 꾸렸다. 1960년에는 공동 명의로 택시회사를 만들어 생계 문제를 해결했다. 그들은 1956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1965년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책임이 없다”며 대화 창구를 닫아버리고 만다.
30여 년의 투쟁 속에서도 일본 정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법정 투쟁에 돌입했다. 1991년 11월12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은 5년을 끌었다. 1996년 9월9일 판결에서 재판부는 “우리나라(일본) 군인 군속 및 그 유족에 대한 원호 조치에 상당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이 요망된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이는 국가의 입법 정책에 속하는 문제다”라며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보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입법부에 “보상법을 만들라”고 공을 떠넘긴 판결이었다. 그 판결의 기조는 고등재판소 판결(1998년 7월13일)과 최고재판소 판결(1999년 12월20일)까지 이어졌다.
최고재판소의 권고가 있은 지 8년이 지났지만 일본 국회는 조선인 B·C급 전범들을 구제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2006년 5월 한국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이들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희생자로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월25일, 석방 뒤 한국으로 귀국한 전범들과 유족들의 모임인 동진회 한국지부가 결성됐다.
이학래 동진회 회장은 “이제 남은 것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과 동진회 한국지부 유족들은 2월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을 돌며 “한국 정부와 국회가 일본 국회를 움직일 수 있도록 압박해달라”고 호소했다. 구체적인 방안은 한국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를 해마다 두 차례 열리는 한-일 의원연맹 회의에서 정식 안건으로 제안해주는 것이다. 평생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를 연구해온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 교수는 “필요한 것은 일본을 압박할 한국인들의 작은 관심”이라고 말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