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2월27일 제649호
진보 대논쟁 더 멀리 더 크게 더 뜨겁게

한국 사회 변화와 함께 찾아온 위기, 소통 부재를 뚫고 백가쟁명 시작되는가…사회의 미래상을 그려나갈 큰 논쟁을 기대하며 진보 인사 10명에게 길을 묻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아주 오랜만에, 우리 사회에 논쟁이 돌아왔다. 진보의 ‘위기’를 딛고 대안을 모색하자는 성찰의 노력이 달궈지기 시작한다. 1987년 민주화 항쟁 20주년, 1997년 구제금융 체제 10주년을 맞아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와 그 해법을 찾기 위한 거대한 담론의 장이 열리고 있다.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에 대한 문제 제기

“1987년 (민주화) 체제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을 그 특징으로 한다. 하나는 운동에 의해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한국의 민주화는 혁명적 단절을 통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 체제의 연속선상에서 제도화됐다는 사실이다. 운동이 민주화를 이뤘지만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까지를 국민들이 위임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존 정치세력과 공존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곧 87년 체제의 기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논쟁은 이른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했다. 그 문을 연 것은 진보학계의 원로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다. 그는 지난 1월22일치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권위주의 아래서 억압된 여러 갈등, 사회경제적 문제, 남북관계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민주화 이후 체제에 부과됐다”며 “그런데 이런 과제를 소흘히 한 채, 모든 것이 87년 체제 때문이고, 5년 단임제 때문이고, 지역주의 때문이고, 그래서 대연정하고 개헌해야 한다는 접근은 기본적으로 정치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라고 말했다.

최 교수가 참여정부를 ‘실패’로 규정하고, “노무현 정부가 개혁적 또는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한 것은 자연스런 논리 전개로 읽을 수 있다. 정작 논쟁을 부른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었다.

“지금 민주파들에게 비합리적 선택이 강요되고 있다. 개헌을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한나라당 좋은 일 하게 그냥 둬야 하느냐, 한나라당으로 권력이 넘어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의 동원에 노출되고 있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가 실패했다고 다수가 평결하면 그것이 곧 민중의 평결이 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의 표현이라 해서 모든 것은 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실패하고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교체되는 것이 당연하다. 한나라당이라서 안 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없다.”


△ 정부의 일방적 주도로 추진되고 있는 한-미FTA 협상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촉발된 논쟁에 불을 지피고 나선 것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다. 그는 1월25일 인터넷 매체 <레디앙>에 최 교수의 주장에 대한 장문의 반박문을 올렸다.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 최 교수의 ‘지적’은 올바르지만, 그 원인을 ‘제도정치’를 강화하지 못한 채 ‘운동정치’(포퓰리즘·민주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찾은 ‘진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게다. 오히려 ‘진보적 민중주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주장이다.

이어 손호철 서강대 교수와 이병천 강원대 교수 등이 가담하면서, ‘2007년 진보 논쟁’의 본격화를 알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2월20일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합니다’란 제목의 글을 청와대 국정브리핑 사이트에 올린 것은, 그 적절성 여부와 관계없이 논쟁의 판을 키우는 구실을 했다. 이제 ‘진보의 백가쟁명’은 시작되는가?

냉정한 자기 반성이 필요한 상황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진보 진영도 그 변화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주력’으로 여겨졌던 학생운동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으로 발전해간 노동운동이 학생운동을 대신해 진보운동의 ‘동력’을 형성했지만, 최근 몇 년 새 급격히 지지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만들어낸 비정규직 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이, 낡은 종파 투쟁이 꼬리를 물고 지속된 탓이 크다.

1990년대 중반 싹 피우기 시작한 시민운동은 합리적인 정책대안을 꾸준히 내놓으며 대안 세력으로 떠올랐다. 2000년 4·13 총선 당시 온 나라를 뒤흔든 낙천·낙선 운동은 시민운동의 역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이어가는 사이 시민운동이 보여온 ‘폭발력’은 어느새 소진돼가는 모양새다. 일부 시민운동가의 정권 참여만으론 그 부침의 원인을 설명하기 어렵다.

대중조직의 연합체인 전국민중연대와 통일연대를 전국 단위 통합조직으로 묶어내기 위해 지난 1월9일 출범식을 연 한국진보연대 준비위원회가 여론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은, 거리집회를 중심으로 정치적 목소리 내기에 집중해온 민중운동 진영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민주항쟁 20돌, 위기의 징후는 진보 진영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 유연한 진보?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 논쟁 개입은 그 적절성 여부와 관계없이 논쟁의 판을 키우는 구실을 했다.(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학교로 복귀한 뒤 이런 소릴 들었다. 참교육한다며 전교조 만든 게 20년 세월인데, 그동안 뭐가 달라졌느냐는 거다. 우리 교육의 모순과 그로 인한 고통, 갈등은 여전하다. 아니, 사교육비 부담은 더욱 커졌고, 입시교육에 내몰린 학생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만약 전교조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교육 환경은 어떻게 돼 있을까? 스스로 반문도 해봤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변화를 추구하고 때로 주도하면서, 정작 진보 진영 스스로 그 변화에 맞춰 얼마나 스스로를 바꿔왔는가? 수구보수의 부정부패보다 진보의 무능이 더 나쁘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게 현실 아니냐. 냉정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답답한 상황에서 뭔가 물꼬를 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듯하다”며 진보 논쟁을 반겼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나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 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진보 진영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세상을 차분하게 그려보는 보다 구체적이고 건강한 토론이 벌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논쟁의 주제를 더욱 폭넓게 가져가야 한다는 얘기다.

“보수파에 포위된 개혁의 한계로도, 구조적 성장통으로도 위기에 대한 설명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양극화 시대, 빈부 격차는 늘어만 가는데, 진보 진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현실로 닥친 어려움을 해소해내거나, 적어도 미래를 설계할 희망이라도 내놨어야 한다. 진보 진영은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정치학)가 내놓은 ‘위기’의 원인이다. 그는 “한때 논쟁과 이론의 과잉을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좋은 논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며 “가끔 좋은 글이 있었고, 간헐적으로 짧은 논쟁이 있었을 뿐, 철저한 소통 부재의 세월이 이어져왔다”고 말했다. 때늦은 감마저 있는 진보 논쟁의 확산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진정한 사회구성체 논쟁이 필요하다”

이태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당사자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와 다가오는 대선에 대한 정치공학 차원의 논쟁으로 흐를 수 있다. 진보 담론의 대중화를 위한 치열한 토론이 벌어져야 한다. 한국 진보 진영이 처해 있는 역사적 위치와 한국 사회의 미래 발전 방향에 대한 학제 간, 부문 간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논의에 나서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한국 사회 구성체 논쟁이 필요하다.”


△ ‘대선 전략을 넘어, 진보의 미래 담론으로!’ 지난 2월21일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회 주최로 열린 토론에서 참석자들이 진보의 위기와 대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진보 논쟁이 촉발되기에 앞서 지난달 말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가 인터넷 매체 <참세상>을 통해 ‘진보 진영의 100대 과제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후퇴해왔지만, 진보 진영은 이를 극복할 새로운 민주주의 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민주주의 담론 형성을 위한 경쟁에서 보수 진영과 자유주의 개혁 진영을 넘어 대중에게 진보운동 진영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상이 제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큰 틀에서 봐야 한다. 단기적으론 진보가 질 수도 있다. 시민사회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다가오는 선거에 지더라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진보 담론이 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느냐에 대한 성찰이다.” 이기호 평화포럼 사무총장은 “진보 진영은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간직해야 할 ‘미래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가야 한다”며 “사회 변화에 필요한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진보의 활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21>도 같은 생각이다. 논쟁이 세상을 바꿔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나은 미래를 여는 길잡이는 될 수 있을 터이다. 각계 진보인사 10명에게 진보 대논쟁의 ‘길’을 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어쩌면 논쟁은 몰락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소통 부재의 어둠을 뚫고 언젠가 부활할 날을 기다리며,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긴 침묵에서 깨어난 한국의 진보여, 논쟁하시라~!


진보인사 10명에게 던진 5개의 질문

1. 노무현 정부의 성격과 평가
-진보의 개념이 뭔가, 노무현 정부는 진보정권인가
-진보세력은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나
-87년 이후 진보세력은 집권한 적이 있었나

2. 87년 이후 20년, DJ 이후 10년 진보는 뭘 했는가.
-노무현 정권의 실패인가, 진보진영의 실패인가?
-진보는 무능한가, 진보는 실패했나
-현존하는 한국사회 진보세력의 실체는 뭔가

3. 진보 진영의 장단기 과제는 무엇인가.
-원포인트냐, 멀티포인트냐. 개헌에 대한 진보진영의 인식
-올해 진보 진영은 무엇을 해야 하나. 또 앞으로 10년 뒤까지, 20년 뒤까지 진보 진영이 할 일은. 진보 진영이 바라는 미래 한국사회의 모습은

4. 2007년 대선, 진보는 무엇을 할 것인가.
-비판적 지지론은 여전히 유효한가
-박근혜·이명박 주도의 대선 정국을 바라보는 진보의 심정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응
-올 대선 진보의 구심점은 민주노동당이냐, 통합신당이냐, 아니면 제3의 길이냐

5. 진보논쟁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진보논쟁은 유효한 것인가
-진보의 위기는 어디서 왔는가
-작금의 진보논쟁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