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승려가 강탈해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벽화의 고향, 투루판…서구와 일본이 유린한 석굴사원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점유를 생각하다
웨이우얼(維吾爾)은 위구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을 중국식으로 읽은 발음입니다. 위구르인들은 스스로를 웨이우얼이 아닌 위구르로 읽습니다. <한겨레21>은 위구르를 <한겨레> 표기법에 맞춰 ‘웨이우얼’로 통일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투루판(吐魯番)의 현지 발음은 투르판입니다.
▣ 투루판(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은 화염산 계곡의 중턱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었다. 왼쪽 옆으로 흐르는 강이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무르툭 하천, 오른쪽 둥근 돔 모양의 건물이 베제클리크 15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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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굴 앞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우뚝 서 있었다. 웨이우얼족 관리원이 팻말을 옆으로 비껴놓고 오랫동안 잠겼던 철문을 열어젖혔다. 금속성의 소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투루판시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제15굴. 웨이우얼족 말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인 베제클리크 석굴은 깎아지르는 듯한 화염산 협곡의 서쪽 벼랑 끝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었다. 협곡 밑으로는 톈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만든 무르툭(木頭溝) 하천이 흐르고, 앙상한 백양목 가지들이 소스라치듯 흔들리는 소리가 차갑게 식은 사막의 정적을 깨고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니 눈앞에 펼쳐진 화염산의 별로 높지 않은 봉우리들이 너울대며 춤추는데, 그 너머 톈산산맥의 만년설들이 늦은 오후 햇살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톳빛 흙벽돌이 노출된 상처
<한겨레21> 취재진은 1월21일 서울을 출발해 사흘 만에 베제클리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찾아야 할 그림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벽화 공양보살상. 10~12세기. 투루판 베제클리크 제15굴. 토벽 채색 57×145㎝. 본관 4049’. 부처에게 공양하고 있는, 눈 언저리와 콧잔등이 훼손된 화려한 옷차림의 보살 그림이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세계적 수준의 귀보(貴寶)’가 “전시관 불빛에 손상될까 두려워” 그림을 3층 아시아관 중앙아시아 전시실이 아닌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10월 펴낸 <초원과 오아시스 문화, 중앙아시아>를 보면, 이 그림에 대해 “이 불화는 전세의 석가모니가 연등불(燃燈佛)이라 불리는 과거불과 만나는 이야기, 즉 연등불수기의 오른쪽 아래 그려져 있는 보살상”이라는 주석을 달아놓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모르고 있지만, 그림은 20세기 초 일본 교토의 명찰 니시혼간지의 주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976~48)가 이끈 탐험대가 이곳 베제클리크 15석굴에서 뜯어낸 벽화의 일부다. 도굴품인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 밖에도 ‘오타니 컬렉션’이란 이름이 붙은 서역 유물 1500여 점이 보관돼 있다.
굴 안은 완벽한 어둠이다. 조심스런 마음으로 한 발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15굴은 가운데 중당을 둘러싼 말발굽 모양의 회랑으로 구성돼 있다. 말발굽의 왼쪽 입구로 들어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 속에 잠겼던 벽화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양과 일본의 약탈자들이 손을 댄 벽화는 온통 뜯기고 파괴된 채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림이 뜯긴 곳마다 황톳빛의 흙벽돌이 노출된 상처가 선연했다.
어둠 속에서, 중국 지안에 남아 있는 무용총의 벽화가 떠올랐다. 지안 고구려 벽화는 1907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샤반이 처음 발견해 학계에 소개한 뒤, 일본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됐다. 그 무렵 조사는 전문인력이 참여해 이뤄진 것이 아니었고, 조사 뒤의 보존 조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500년 가까운 시간을 지하에서 버텨낸 벽화들은 급속히 변색·퇴색됐고, 원형이 떨어져나간 예도 많다. 우리 민족의 활기찬 기상을 드러내는 무용총의 사슴·호랑이 수렵 벽화는 그렇게 엉망이 됐다. 평양 덕흥리 고분에 남아 있는 견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선 직녀의 퀭한 눈빛과, 문화재청장의 극찬을 받은 삼묘리 강서 큰 무덤 사신도의 생생한 필치도 떠오른다. 눈을 번뜩이며 회랑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 회랑의 끝에 이르러 오른쪽 회랑을 향해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웨이우얼족 관리인이 닫혔던 오른쪽 회랑의 출입문을 마저 열어젖혔다. 여행의 목적이었던 벽화 한 점이 어슴프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른쪽 아래와 왼쪽 위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초라한 모습의 벽화였다. 등장인물들의 눈알이 모두 파헤쳐진 채로, 벽화는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15굴에 그려진 15개 벽화 중 11번째 그림은 오른쪽 위, 아래쪽 밑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다(왼쪽). 아래쪽 밑 귀퉁이(오른쪽)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사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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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부분은 영국이, 밑부분은 일본이…
그 한 폭의 그림은 100년째 그 자리에 서서, 서구와 일본의 유물 약탈가들이 이곳 실크로드에서 저지른 만행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림은 이곳 베제클리크 15굴에 그려졌던 15점의 벽화 중 11번째 그림이다. 그림의 왼쪽 윗부분은 헝가리 태생의 영국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1862~1943)이 떼어갔고, 오른쪽 밑부분은 오타니 탐험대가 도굴했다. 오타니 탐험대가 도굴한 벽화는 191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됐고, 해방 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유가 됐다. 웨이우얼인들의 화려한 예술작품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3분의 1은 애초 벽화가 탄생한 베제클리크 15굴 벽에, 다른 3분의 1은 인도 뉴델리 박물관에, 마지막 3분의 1은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흩어졌다. 나머지 14점의 그림도 조각조각 잘린 채 세계 곳곳의 박물관으로 흩어지거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한겨레21> 취재진을 따라나선 딩난난(27) 투루판 문물국 학예사는 “서양의 도굴꾼들이 그림을 모두 떼어갔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웨이우얼족 관리인은 취재진에게서 의심 어린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폐허가 된 석굴을 들여다보는 기분은 참담했다. 19세기 말 중앙아시아로 몰려든 서구와 일본의 탐험가·고고학자들은 건조한 사막의 바람 속에서 많게는 1500년 넘는 시간 동안 버텨온 중앙아시아의 놀라운 문화적 성취들을 거리낌 없이 파내고 도려낸 뒤 낙타 등에 박스째 실어 그네들의 박물관으로 이송해갔다. 그들의 약탈은 사반세기 동안 계속됐고, 끝나갈 무렵에는 7개국의 고고학자들이 몰려들어 유럽·미국·러시아·일본·한국·중국 등 30곳이 넘는 박물관과 연구기관들에 약탈물을 보냈다. 베제클리크를 처음 발견한 이는 독일인 폰 르코크(1860~1930)이다. 그는 <사막에 묻힌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서 벽화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을 감격 어린 어조로 설명했다. “내 좌우로 드러난 벽 위에 이제 막 붓질을 끝낸 것 같은 생생한 그림이 드러났다. 이 벽화를 안전하게 가져갈 수만 있다면 탐험은 성공한 것이었다.” 그는 그림을 뜯지 말고 스케치만 한 뒤 베를린 박물관에서 재구성하자는 탐험대장 그룬베델과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 31굴은 천장이 진흙으로 뒤덮였다.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중국 정부는 벽에 유리 보호막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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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굴로 들어섰다. 굴의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불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불화가 있던 자리에 나무 기둥이 흉측하게 드러나 있다. 굴의 왼쪽 입구를 통해 들어서니 왼쪽과 오른쪽 벽면에 작은 부처의 좌상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가운데 몇 개의 단편이 오타니 탐험대에 의해 뜯겨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됐다. 천장에는 해와 달을 본뜬 것 같은 푸른색 무늬가 이어지는데,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떨어질 찰나 다시 저만치에 처참하게 뜯긴 벽면이 보인다. 오른쪽 회랑 끝부분, 아직 뜯기지 않은 벽화 위에는 “저장성 사람 오늘 여기서 하루 유람 왔다 간다”고 판 낙서가 선명했다.
진흙으로 벽화를 떡칠한 약탈자들
31 굴은 더 엉망이다. 약탈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벽화를 떼어가지 못하도록 진흙으로 떡칠을 했다. 중국 정부가 뒷벽을 기준으로 오른쪽 위의 작은 불상 그림 두 점 위에 칠해진 진흙을 벗겨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안료까지 지워졌기 때문이다. 이 석굴에는 애초 배를 타고 피안으로 가는 석가의 본행경도·열반경변도·공양도 등 세 폭의 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물론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33번 굴의 뒷벽에는 다행히 석가의 열반을 애도하고자 100여 명의 왕자가 도열한 그림이 남아 있었다. 황톳빛 갓을 쓴 인물이 신라 왕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39번 굴에서는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자기 이름을 새겨넣으려 한 듯 ‘김원은’이라는 한글 낙서도 찾을 수 있었다. 베제클리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석굴은 모두 83개고, 일부라도 그림이 남아 있는 석굴 수는 40개라고 한다. 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조성된 석굴은 서구인들에게 철저히 약탈당해 빈 껍데기로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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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 토벽에는 한국어로 된 낙서도 있다. ‘김원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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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의 수난은 이곳만의 일이 아니다. <한겨레21> 취재진을 태운 승합차는 베제클리크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아 1시간 정도 나아갔다.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60km쯤 떨어진 곳에 토욕구(吐山+谷溝) 석굴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사원 밑에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교 마을 마자촌이 형성돼 있다. 토욕구 사원의 관리를 맡고 있는 마이마이티(39)는 “석굴로 들어가는 길이 파괴돼 옆으로 우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20분쯤 산등성이를 올라 왼쪽 위를 쳐다보니 곳곳에 벌집처럼 뚤린 석굴사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찍부터 관광지로 꾸며진 베제클리크와 달리 토욕구는 일반 사람들에게 개방된 지 올해로 겨우 4년째를 맞는다. 개방된 굴은 38호·41호·42호 3개밖에 없다. 38번 굴로 들어갔다. 정면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불상이 사라졌고, 굴 내부는 붕괴에 대비해 지지대로 받쳐져 있다. 마이마이티는 “38호 굴 앞에도 3개의 굴이 있었는데 지각운동으로 무너져내렸다”고 말했다. 이후 들어선 41호·42호 굴도 내부는 잘 보존된 편이지만, 이곳에 머물렀던 이슬람교도들이 불상의 눈을 훼손해버렸다. 독일인 폰 르코크는 이곳에서도 수많은 문화재를 도굴해갔다. 토육구는 11년 동안 발굴이 진행됐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도 많다. 딩난난은 취재진이 지나온 길 양쪽을 가리키며 “저곳들도 모래를 파다 보면 석굴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굴 앞에는 “사진 찍다 걸리면 벌금으로 1천원(중국돈)을 내야 한다”는 경고문이 쓰여 있다.
그 벽화들을 석굴의 품으로 돌려줄 수 없는가
현지 사람들은 빈 석굴을 보며 피를 토했다. 위즈융(于志勇)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문물고고연구소 부소장은 “잃어버린 유물들은 중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 외침은 대부분 소리 없는 메아리로 끝났고, 이는 다시 현지 사람들에게 큰 상처가 됐다. 소중한 조상의 유물을 강탈당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의 절규에 대해 서구의 지식인들은 교묘한 논리를 만들어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들은 “이것은 인류 공통의 재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그들 나라의 박물관에 있어야 한다)이라거나, “유물은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입수됐다”는 논리를 들이댔다. 심지어 “유물이 이나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적반하장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야만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서역의 오지를 뒤져 놀라운 예술품들을 도려내 박물관으로 옮긴 고고학자와 비싼 고속철도를 팔아먹고자 한국을 찾아 강탈한 책 300여 권 가운데 한 권을 돌려주고 입을 씻은 프랑스의 늙은 대통령 중 누가 더 야만적이었을까.

△ 베제클리크 15굴은 일반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는 굴이다. 베제클리크에서 관광객 입장이 허용된 굴은 17, 20, 27, 31, 33, 39 6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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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일본의 월간잡지 <개조>에 일본인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철거돼 없어지려고 하는 광화문을 애도하며 ‘없어버려지려고 하는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다. “가령 지금 조선이 발전하고 일본이 쇠퇴하여 마침내 조선에 병합되고 궁성이 폐허가 되고, 저 푸른 해자를 넘어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흰 벽의 에도성이 파괴되는 광경을 상상해주기 바란다.” 한 세기 전 야나기의 글은 식민지 반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일본의 지식인들에게까지 피할 수 없는 울림을 남겼고, 문은 이전됐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웃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결국 구원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무용총의 수렵도가, 덕흥리 고분의 견우와 직녀가, 강서 큰 무덤의 사신도가 조각조각 쪼개져 도쿄 국립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 수장고에 갇혀 우리의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는 느낌은 어떨 것인가. 그 서역의 벽화들은 우리가 그토록 분노해 마지않는 일본 제국주의 문화재 침탈의 산물이다. <한겨레21>은 서구와 일본의 메마른 지성들이 실패한 지점에서 우리가 세계에 좀더 도덕적이고, 좀더 정의로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벽화들을 그 초라한 석굴의 품으로 돌려놓을 순 없을까? 상처받은 투루판이, 상처받은 용산에게 묻는다.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2000)
피터 홉커크(김영종 역), <실크로드의 악마들>(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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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여 점의 서역 유물들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 위치한 ‘오타니 컬렉션’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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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서역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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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 우리나라 유물들이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아시아관 중앙아시아실 코너에 전시돼 있는 ‘오타니 컬렉션’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 교토의 니시혼간지 주지 오타니 고즈이가 1902년 9월부터 1914년까지 중앙아시아로 세 차례 탐험대를 보내 도굴해온 유물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는 이 유물들에 대해 “오타니 탐험대라 불리는 일본의 승려 조직도 이곳을 세 차례 답사하며 많은 유물을 수집했고, 당시 수집품 중 일부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 이르고 있다”고 적고 있다. 오타니 수집품의 일부는 우여곡절을 거쳐 191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됐고, 해방 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됐다.
오타니 컬렉션은 석굴에서 절취한 벽화 등 종교미술과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 등에서 출토한 <복희여와도>(사진)와 같은 고분 발굴품, 토기·인형·연장 등 생활용품으로 구성돼 있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소장품은 작은 벽화 파편들까지 합쳐 1500여 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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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없는 중국의 반환 요구
‘오타니 컬렉션’을 돌려줄지에 대한 국내 전문가의 찬반 의견
약탈된 서역 유물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커다란 성과는 눈에 띄지 않는다. 중국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돌려받으려 했던 것은 100년 전 둔황 석굴사원에서 유출된 고문서들이었다 1998년 1월, 중국 정부는 둔황 막고굴 발굴 100주년을 앞두고 영국·프랑스·일본 등으로 유출된 문서를 되찾겠다고 이 분야의 전문 변호사들을 선임해 실태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유물 약탈국들은 반환 요청은 고사하고 임대 요청도 응하지 않았다.
위즈융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문물고고연구소 부소장은 “중국 정부가 약탈 유물을 회수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불행히도 성과는 크지 않다”고 말했다. 심정적으로는 불법적인 약탈이 확실하지만, 법률적으로 꼼꼼히 따지고 들면 문화재 유출의 불법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 반환과 관련된 국제 규약은 1970년 11월17일 유네스코에서 채택된 ‘문화재의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과, 1995년 6월24일 로마에서 채택된 ‘도난 또는 불법 발굴된 문화재의 국제적 반환에 관한 협약’ 등이 있다. 협약은 ‘외국 군대의 점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강제적인 문화재 반출과 소유권 양도는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협약은 채택 이전의 문화재 반출에까지 소급되지는 않는다. 김기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팀장은 “그 때문에 협약의 한계는 명백하다”며 “2차 세계대전 때 이뤄진 불법 문화재 반출까지 이를 소급하자는 국제 사회의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법적 논리를 들이대자면, 우리에게 오타니 컬렉션을 반환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전문가들은 오타니 컬렉션이 야만적인 문명파괴 행위의 결과라는 데는 공감하고 있지만, 반환에 대해선 팽팽하게 맞섰다. 민병훈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팀장은 “중앙아시아 유물을 위해 당장 급한 것은 문화재 반환이 아닌 현지에 남아 있는 유물의 현상 보존”이라고 말했다. 이는 유물에 대한 학술조사가 마무리된 뒤 논의해도 늦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다. 중앙아시아 유물들의 주인을 굳이 따지자면 중국 정부라기보다는 웨이우얼족이기 때문이다. 실크로드 전문가 김영종씨는 “유물을 돌려준다 해도 돌려받을 나라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에 유물을 돌려주는 것은 일제에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는 것과 같은 꼴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재가 약탈된 것이 맞다면 도리상 돌려줘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오타니 컬렉션이 약탈 문화재가 맞다는 게 학술적으로 증명되고, 그쪽의 요구가 있다면 좋은 선례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이를 돌려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문화재의 소유권까지 넘기는 ‘반환’이 좋을지, ‘영구 임대’가 좋을지, 또는 오타니 컬렉션의 가치에 준하는 다른 유물의 교차 전시를 중국 정부에 요구할지 등의 실무적인 문제들을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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