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6년10월31일 제633호
진보는 판문점에서 멈춘다

북한 핵실험에 대해 끝내 “반대한다”는 성명 하나 내놓지 못한 민주노동당… 인권이든 핵문제든 북한에 대해선 늘 우물쭈물해왔던 이 땅의 진보에 묻는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오해 마시라. <한겨레21>은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의 부당성과 북-미 직접대화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북핵 위기의 뿌리에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악의적’ 무시와 대북 강경정책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 반핵이 빠진 ‘반전·반미 구호가 설득력이 있을까? 10월22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반미반전 민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한-미 FTA 협상 중단과 대북제재 반대 등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사진/ 연합 이정훈 기자)

북한의 핵실험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제재 일변도의 대북정책은 오히려 위기를 키울 뿐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강화는 자칫 북과의 무력충돌로 이어질 수 있으며,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상황이 나빠질수록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수해로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울을 맞아야 할 북녘 동포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망설여선 안 된다는 원칙도 분명히 밝혀둔다.

남한 시민사회를 불신한 건 북한

안다. 반세기 이어져온 분단체제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의 안락한 서식처였음을. 지구촌의 마지막 냉전체제가 한반도의 남과 북을 옥죄고 있고, 국가보안법이란 폭압기제가 여전히 목숨을 부지한 채 발톱을 들이댈 대상만 찾고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툭하면 터져나오는 ‘색깔론’에, 집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전쟁불사론’을 쏟아내는 보수 진영의 울부짖음은 차라리 아연하기만 하다. 북쪽을 향한 비판은 고스란히 반공·반북의 음습한 과거에 기댄 낡은 세력이 진보세력을 겨누는 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깊이 공감한다. 그러니 이제부터 하는 말, 조금 거슬리더라도 참고 들으시라.

지난 10월9일 오전 10시35분께 북한이 핵실험을 전격 단행한 지 5시간여 만에 나온 민주노동당의 11줄짜리 첫 논평 가운데 가장 눈에 띈 단어는 ‘유감’이었다. 사전을 펼쳐보니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 아쉽거나 한스러운 것’이란 뜻이다. 이 단어가 포함된 문장은 “많은 국민의 우려에도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것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강한 충격과 유감을 표명한다”로 완성된다. 비슷한 시각, 우리 사회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우리는 한반도 주민의 안전을 볼모로 백해무익한 핵무장을 실현하고 이를 협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북한 당국의 군사적 모험주의에 반대하며 이를 규탄한다. 북한의 핵무장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북한 핵무기를 즉각 폐기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 지난 8월30일 인천항 제1부두에서 북한 수재민에게 전달할 쌀과 의약품 등을 실은 배가 출항하기에 앞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수해로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울을 맞아야 할 북녘 동포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망설여선 안 된다.(사진/ 한겨레 김경호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진보진영을 대표하면서도 대중과 눈높이를 잘 조율하는 참여연대와는 시각차가 너무 컸다. 어떤 사안에 대한 관점을 놓고 정당과 시민단체를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 순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적어도 민주노동당의 북핵 인식이 대중들과 한참 동떨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북의 핵실험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끝내 내놓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인 ‘반핵’ 원칙이 북한 앞에서 흔들린 것이다.

핵실험을 통해 북한은 남한 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핵실험을 통한 독자적 핵무장을 선택함으로써 북한은 남한의 정부도, 시민사회도 믿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쪽 평화세력의 힘이 자기 체제를 지켜줄 ‘억지력’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게다. 틈만 나면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을 강조해온 북쪽이 스스로 자기 주장을 거둬들인 셈이다.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10월25일 낸 성명에서 “남조선 당국이 이성을 잃고 끝끝내 미국의 반공화국 제재·압살 책동에 가담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6·15 공동선언에 대한 전면 부정으로, 동족에 대한 대결 선언으로 간주할 것이며, 해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은 그래서 생뚱맞다. ‘이성을 잃고’ 핵실험을 함으로써 ‘6·15 공동선언 전면 부정’을 한 것은 남이 아니라 북이다. 더구나 핵실험으로 북은 남쪽에 다시 고약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이른바 ‘민족의 핵우산’과 ‘미국의 핵우산’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핵에는 국적이 없다. 모든 핵은 파괴와 죽음의 상징일 뿐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민주노동당이 ‘반핵’의 원칙에 오롯이 충실하지 못한 까닭은 뭘까?

정파 갈등, 뿌리깊은 인식의 격차

흔히 민주노동당엔 두 가지 금기가 있다고 말한다. 북한과 민주노총 문제다. 이 가운데 북한에 대한 ‘금기’가 핵실험의 후폭풍 속에 논란을 부른 것이다. 10월15일 민주노동당 6차 중앙위원회의에선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최고위원회를 거쳐 이날 안건으로 올려진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민주노동당 특별결의문’은 당의 첫 성명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곧 2개의 수정안이 나왔다. ‘북한 핵실험 유감 표명’을 ‘반대’로 바꾸자는 것과, 북한에 ‘추가 핵실험을 하지 말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둘 다 부결됐다. 그러자 이번엔 ‘북한 핵실험 유감 표명’조차 거두자는 취지의 수정안이 튀어나왔다. 이른바 ‘자주파’(NL)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이 수정안을 안건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평등파’(PD) 중앙위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정족수 미달로 안건의 최종 통과가 무산됐다. 어쨌든 당내에 ‘북핵이 미 제국주의에 맞선 자위적 수단’이라는 쪽에 무게를 둔 시각이 정치적으로 다수임이 확인된 것이다.

이 사건은 민주노동당 내 세력 간 철학과 노선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북의 핵실험에 대해 자주파는 자위적 수단이라는 용인 아래 ‘반미’에 방점을 찍고, 평등파는 ‘북핵 반대’에 무게를 뒀다. 어떤 이는 “진보라는 한 울타리에 있지만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차이만큼 큰 대북관을 둘러싼 당내 간극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민주노동당뿐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에서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놓고 존재하는 인식의 편차를 압축해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그 뿌리도 깊다.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북한은 우리에게 사회민주주의의 기지, 타락한 사회주의, 통일을 향한 민족적 동반자, 잠재적 적대관계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며 “북한이 우리에게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물음이자 북에 대한 각기 다른 태도는 당을 만들기 이전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 ‘핵무기에 국적은 없다!’ 10월22일 평안남도 평성에서 핵실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군중대회에서 북쪽 병사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 사진공동취재단)

갈등의 역사에 크게 주목할 필요는 없다. 분열을 확대할 일도 아니다.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진보정당 내 정파 갈등과 얽혀 ‘북한 금기’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인권 문제도 뜨거운 감자다.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7월 유럽 좌파그룹의 초청으로 스웨덴·독일·영국·이탈리아·네덜란드·포르투갈 등 많은 나라의 좌파 의원들과 릴레이 좌담회를 가졌다. 이때 어디에 가든 빠짐없이 등장했던 공통 질문은 “북한 인권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조차 ‘명확한’ 입장을 갖지 않은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난처한 질문이었지만, 유럽 좌파들은 예외 없이 비판적으로 이 문제를 보고 있었다.

‘부메랑 효과’ 때문에 입을 닫는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 표명을 ‘어려워’하는 것은 민주노동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실은 2006년 사업 중 하나로 1천만원을 들여 북한 인권에 대한 보고서를 낼 계획을 짰다. 하지만 진보진영에서 필자를 구하지 못해 포기해야 했다. 이용승 보좌관은 “대부분 집필에 참여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는 곳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진보가 주춤하는 사이 북한 인권에 대한 담론의 틀거지 자체를 이미 보수가 장악하고 주도권을 쥐고 흔들고 있다(물론 이들이 북한 인권의 실질적 개선에 이바지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따로 논쟁이 필요하다).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에 대해 명확한 입장 표명을 주저하는 이유는 ‘반핵의 실종’과 맞닿아 있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책 제목을 패러디한다면, ‘인권은 판문점 앞에서 멈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한의 인권운동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우려해왔지만, 정작 경고의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수구세력의 반북 선동에 선의의 비판이 악용될 수 있다는 이른바 ‘부메랑 효과’에 대한 우려 탓이다. 그래서 마치 남한의 인권운동이 북한의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실험은 인권운동 진영의 ‘레드라인’을 넘어서는 행위였다.

지난 10월20일 인권운동사랑방,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 힘 등의 단체가 모여 ‘북 핵실험 국면, 민중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선 북한 인권 문제의 정치적 악용을 우려해온 인권운동사랑방도 핵실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 박석진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발제문에서 “상황과 의도를 떠나 어떤 말로도 북의 핵실험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반핵은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본 전제”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시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 자체가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인권운동사랑방은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에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있고, 북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남한의 우익들이 핵실험 사태를 대북 적대정책으로 전환의 계기를 삼으려 하고 있다. 그들에겐 전쟁에 대한 공포 조장을 통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만이 관심의 대상일 뿐이다. …북의 핵실험을 ‘자위적 혹은 정치적 수단’으로 애써 이해하려고 하는 일부 진보진영도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자위적 핵무장이란 표현의 바탕에는 국가주의와 군사적 대결을 전제로 하는 안보주의가 깔려 있다.”

환경단체의 ‘반핵’ 움직임을 보라

남한의 인권운동이 북한 인권에 대해 소홀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90년대 후반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나섰고,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 해결도 도왔다는 것이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반북과 친북이라는 극단과 극단의 목소리가 부딪히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지금, 여기’의 인권 문제를 우선하다 보니 북한 인권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진보에게 과연 ‘반북’은 금기인가?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 회의 장면.(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그럼에도 여전히 상당수 인권운동가들은 북한 핵실험을 북 체제의 문제와 연계시키는 것에는 조심스러워한다. 한 인권활동가는 “핵실험을 북한 체제에서 나온 문제로 보면, 반북 분위기에 힘을 실어줄 우려가 있다”는 ‘낯익은’ 주장을 반복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도 같은 맥락에서 여전히 조심스럽다.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 그는 “문제가 왜 없겠느냐”고 말하면서도, 정작 “대안의 부재가 인권운동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체제 전복을 노리고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보수세력과는 다른 시각에서 인권 문제를 재구성해야 하지만, 아직은 마땅한 방법론이 없다는 게다. 이렇게 진보적 시각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재구성’하는 것은 몇 해째 이어져온 인권운동 진영의 고민이다.

서보혁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객원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은 “진보에게 북한은 함께 변해가야 할 대상”이라며 “북의 체제가 남에게 대안일 수 없듯, 남의 현 체제도 통일 한반도의 대안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남과 북이 별개의 주권국가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동질성 회복이 아닌 이질성의 극복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남한 진보진영 몫은 통일 한반도의 대안체제를 모색하고, 남과 북이 그 방향을 향해 함께 변해가도록 하는 견인차 노릇일 게다.

핵실험 이후 ‘반핵’의 원칙에 충실해 북한에 대한 날선 비판에 나선 환경단체들의 움직임은 이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그동안 환경단체들은 핵폐기의 대가로 원자력 발전소 지원을 요구해온 북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한 채 냉가슴을 앓아왔다. 한반도 평화 정착과 반핵이라는 환경운동의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빚어진 탓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환경단체가 ‘원칙’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됐다. 10월11일 환경운동연합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적 도발 행위”로 규정하고 나섰다. 환경운동연합 관계자는 “대북제재 문제가 교묘하게 얽혀 있는데다, 북한 비판이 자칫 보수여론의 확대재생산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며 “하지만 ‘반핵’은 환경운동의 강줄기라는 점에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좀더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민노당 방북 뒤 갈등 재연될 수도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북쪽 조선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지난 10월31일 평양에 도착해 4일까지 머문다. 앞선 당내 갈등은 북한 핵이 “자위적 수단”이라고 중앙위원회와 언론 인터뷰 등에서 강조했던 이용대 정책위 의장의 공개 사과로 일단 봉합됐지만, 방북 성과를 놓고 당내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최근 당 관련 인사 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가정보원의 수사를 받고 있는 것도 당으로선 큰 부담이다. 아직 사건의 진위를 예단할 수 없지만, 당직자와 당원이 북쪽과 연계돼 있다는 뉴스는 왜곡된 형태로 ‘친북’ 정당이란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핵 실험 뒤 민주노동당이 북을 옹호하려고 한다는 시각 등과 맞물려 당에 족쇄가 될 수 있다. 이는 비단 민주노동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진영 모두에게 성찰이 필요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