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노버=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전반 23분 스위스 공격수 하칸 야킨이 띄워준 공을 향해 수비수 필리페 센데로스가 힘차게 날아올랐다. 맏형 최진철이 공중볼 경합을 벌여보지만, 올해 서른여섯의 최진철은 끝내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센데로스의 머리에 맞은 공은 빨랫줄 같은 기세로 뻗어 한국의 오른쪽 그물망을 갈랐다.

△ (사진/ AP/ MURAD SEZER)

공중에서 부딪친 둘의 머리에서는 어느새 빨간 핏물이 쏟아지고 있다. 응급처치를 마친 둘은 다시 경기장 안쪽으로 돌아왔다. 그라운드는 이미 전쟁터로 변한 뒤다.

44번 경기에서 3번 이기다

뼈아픈 선제골 이후에도 ‘태극전사’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미드필드에서 이호와 김남일의 압박이 살아나고 왼쪽 윙백 김동진이 활기차게 빈 공간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전반 44분 상대 아크 지역 정면을 돌파하던 박지성이 찔러준 전진 패스를 받은 이천수가 상대의 오른쪽 골문 아래쪽으로 회심의 슛을 날려보지만 공은 상대 문지기 파스칼 추베르뷜러의 손을 맞고 튕겨나왔다.

문득 1986년 6월2일, 14인치 삼성 ‘이코노 컬러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떠오른다. 그때 첫 경기 상대는 1978년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였다. 김정남 당시 대표팀 감독은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팀이고 마라도나라는 선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 팀이 얼마나 잘하는지, 마라도나가 어떤 선수인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차범근과 최순호를 투톱으로 내세운 ‘태극호’는 전반 6분 만에 발다노에게, 12분 뒤인 전반 18분에는 루게리에게 연속 골을 헌납하고 만다. 32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들은 몸이 얼어붙어 제대로 그라운드를 누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다리가 후들거려 어떻게 할지 잘 몰랐거든. 전반 시작부터 골을 먹기 시작하는데, 이렇게 하면 한없이 먹겠더라고.” 김정남 감독이 말했다. 허정무가 마라도나를 상대로 두세 가지 태권도 옆차기 동작을 선보일 때까지 마라도나는 한국의 중원을 마음 놓고 유린했다. 73분 만에 박창선이 대한민국 역사상 첫 월드컵 골을 터뜨렸을 때 4천만은 임박한 패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즐거운 함성을 터뜨릴 수 있었다. 1-3으로 경기는 끝났다.

시간은 ‘이코노 컬러텔레비전’의 시대에서 대형 벽걸이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시대로 진화했지만, 지난 76년 월드컵 역사 속에서 아시아 팀들의 성취는 보잘것없었다. 16번째 치러진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아시아 팀들은 44번 경기에 나서 3번 이기고 9번 비기고 31번 졌다. 그들은 32골을 넣었고, 그보다 더 많은 105골을 내줬다. 얼마 전 작고한 <조선일보> 이규태 고문은 1994년 6월29일치 ‘이규태 코너’에서 “아시아 사람들은 발재간을 좌우하는 족척근이 퇴화돼 축구를 잘 못한다”는 해석을 내놓기까지 했다.

△ 패배가 확정되자 독일 하노버 경기장 붉은 악마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은 이번 월드컵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받은 아시아의 슬픔이었다.(사진/박승화 기자)

아시아 축구의 문제는 뭘까. <한겨레21>은 K리그 현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감독 14명 가운데 12명을 상대로 아시아 축구와 한국 축구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긴급 설문조사(한국-스위스 경기는 제외)를 벌였다. 문화방송 해설위원으로 독일에 있는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과 브라질인인 파레이라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감독들은 아시아 국가들의 부진 이유로 “실력의 반영일 뿐”(7명·복수응답)이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 다음으로 많았던 대답은 “경험 부족”(4명), “약한 정신력”(2명), “수비 불안”(1명), “체력 열세”(1명) 등이었다. 박종환 대구FC 감독은 “일본은 강한 미드필더 압박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팽팽한 경기를 펼쳤지만 중과부적이었다”고 말했고, 최윤겸 대전 시티즌 감독은 “세계 축구의 중심인 유럽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객관적 기량이 뒤지는 아시아 국가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k리그 감독 14명이 말하는 강점

1966년 북한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거둔 1-0의 기적 이후 40년이 지났지만, 아시아는 여전히 세계 축구 변방에 있다. 이후 1994년 16강에 진출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깜짝 돌풍이 있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4강 신화가 탄생했지만, 서구인들은 여전히 4년 전 아시아인들이 이뤄낸 성취를 믿지 않았다. 이번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은 4년 전 그들의 성취가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것은 39억 아시아인에게 떨어진 공통의 고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세계의 벽은 높고 견고했다. 이란·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아시아의 강호들은 남미와 유럽팀들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똑같이 1무2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고, 6골을 넣는 동안 상대에게 20골을 헌납했다. 남은 것은 한국밖에 없었다. 아시아 사람들의 이목은 6월23일 밤 9시(한국시각) 독일 하노버로 향했다.

그 경기 전까지 한국 대표팀은 1승1무로 승점 4점을 획득하고 있었고, 16강 진출은 코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그 비결은 뭘까. 감독들은 “한국이 다른 아시아에 견줘 더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이 아시안컵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것은 1960년이고,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선 사우디아라비아에 2연패 했다. 이에 견줘 일본은 지난 4번의 아시안컵에서 3번이나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K리그 감독들은 우리의 강점으로 “2002년의 경험”(10명·복수응답)을 첫손에 꼽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정신력”(4명), “유럽 빅리그 출신 선수들”, “체력”(3명), “붉은 악마의 응원”(1명) 등이었다.

스위스와의 후반전에서 태극전사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없는 한국팀의 ‘그 무엇’이 무엇인지 힘겹게 증명해내고 있었다. 그들은 집을 침범당한 병정개미 같은 투지로 공을 잡은 상대를 압박해나갔다. 2002년 이후 사라진 ‘압박’을 4년 만에 되찾은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 스위스와의 후반전에서 태극전사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없는 한국팀의 투지를 증명했다. 그들은 4년 만에 ‘압박’을 되찾았다.(사진/ AP/ MURAD SEZER)

‘청년’ 이천수와 박지성은 스위스의 4백을 마음껏 유린했고, 그 밑에 단단히 받치고 선 ‘젊은’ 이호는 장신의 스위스 선수들과 몸싸움 끝에 중앙의 조재진에게 공을 연결했다. 이번 대회 한국 축구의 ‘발견’이라 할 만한 조재진은 장신의 스위스 수비수들과의 공중볼 다툼에서 번번이 머리에 공을 맞히는 투지를 보여줬다. 한국팀은 지난 두 차례 경기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투지로 2002년 이룬 성취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해내고 있었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언젠과 ‘한국팀의 강점이 무엇이냐’는 외국 기자의 질문에 “한국 선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경기 뒤 기자회견에서 “지난 9개월 동안 한국팀과 함께했던 시간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한국팀은 개인 하나만을 놓고 봤을 때 세계의 수준과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팀 정신으로 묶인 한국팀은 세계 최고 수준의 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시아인들

그렇지만 스위스의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63분 오른쪽 윙백 이영표 대신 설기현이 나왔고, 이어 박주영 대신 노장 안정환이 투입됐다. 그리고 오프 사이드 오심 논란을 불러온 77분 스위스의 두 번째 골이 터졌다. 이후 이천수의 코너킥을 받아친 조재진의 헤딩슛이 상대 골키퍼 정면으로 연결됐고, 85분 김진규가 이호의 패스를 받아 때린 슛은 상대 크로스바를 맞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경기 후 골을 넣은 프라이는 “심판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하지 않은 것은 다소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패배는 한국만의 슬픔은 아니었다. 일본 유니폼을 입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 경기를 경기장에서 보고 나오는 스즈키 사토코씨와 남편 스즈키 이즈루씨는 “어제는 일본이 져서 슬펐는데, 오늘은 한국이 져서 슬프다”며 “그래도 한국이 아시아 대표들 중에서 가장 선전해주어서 기뻤다”고 말했다. 일본 요코하마 마리노스의 서포터인 스즈키씨 부부는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뛰었던 유상철 선수의 사인이 들어간 티셔츠를 일본 유니폼 안에 입고 응원했다. 유상철 선수의 티셔츠는 유 선수가 요코하마를 떠날 때, 팬들이 만들어 간직한 선물이었다. 슬픔에 젖어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한국인들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아시아인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 축구를 선진적인 축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02년 우리가 일궈낸 승리는 세련된 기술과 개인기에 의존한 유럽 또는 남미식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가 한 발 뛸 때 우리는 두세 발을 뛰는 체력과 근면함,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백으로 이룬 성취였다.

△ “이겼든 졌든 정말 잘 싸웠다.” 6월24일 동이 터오는 서울 광화문에서 붉은 악마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다.(사진/ 윤운식 기자)

아시아는 이번 대회에서 1승4무7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쥐었다. 일본 는 “한국의 결승 토너먼트 진출 실패로 아시아 팀이 아쉽게도 모두 1차 리그에서 탈락하게 됐다”고 말했고, 중국의 는 “졌든 이겼든 한국이 보여준 정신력은 아시아의 긍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평했다.

한국에서 독일로 원정 응원을 왔던 젊은이들은 잠시 침울해했지만 이내 발랄함을 되찾았다. 모두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쳤고, 누군가는 응원 광장의 외국인들에게 “남아공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인사했다. 광장에는 개그맨 박명수의 어법으로 말하면 “죽지 않아”로 번역되는 팝송 <아이 윌 서바이브>(I will surviv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국팀은 죽지 않아! 그동안 되풀이된 수많은 절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외친다. 한국팀은 죽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