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열린우리당이 망가졌다. 5·31 지방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폭삭 주저앉았다. 집권여당의 자존심도 벗어던졌다. “싹쓸이를 막아주십시오.” 정동영 의장의 말처럼 “창당 이래 최대 위기”다. 위기도 그냥 위기가 아니라 ‘쓰나미’급이다. 피습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당했는데, 피는 열린우리당이 흘리고 있다.

탈당·분당·재창당·신당 창당…

열린우리당은 5월25일 코앞에 닥친 지방선거 지원 유세를 팽개쳤다. 국회의원 110여 명을 포함해 당직자·고문 200여 명이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했다.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2004년 4·15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뒤 환호하던 곳과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울림이 없다. 발가벗었음에도 이미 대세는 기울었을뿐더러 읍소로는 돌리기 힘들 정도로 민심과 멀어져버렸다. 다음날 <인터넷 한겨레>가 실시한 라이브폴에는 모두 2553명의 누리꾼들이 참여(5월26일 오후 1시 현재)했는데, “선거 판세에 영향 없을 것”이라는 응답이 2067명(81%)으로 “지지층 결속 효과 있을 것”이라는 응답(421명·16.5%)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강론’(自强論)을 펼쳐왔던 정 의장은 전날 민주당, 고건 전 총리 등을 언급하며 선거 이후 ‘민주개혁평화세력 대연합론’을 주장했다. 조롱만 당했다. 민주당은 “열린우리당이 완전히 붕괴돼야 민주개혁 세력의 재건이 시작된다”고 했다. 선거 때마다 ‘사표 방지’ 공세의 표적이 됐던 민주노동당이 이제는 “열린우리당에 가는 표가 죽은 표”라며 역공을 취했다. 열린우리당은 반한나라당 전선을 주장하지만, 모양새로만 보면 반열린우리당 전선에 갇힌 꼴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비상총회에서는 독선·오만·아집 등 자기 진단이 나왔다. 단일 사건이나 실수에 의해 이런 지경까지 왔다고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누적효과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3년 남짓 해놓은 업적이 뭔지, 지역 정당이 아닌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만든 당인데 무엇을 했는지, 정책적인 측면에서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이 뭔지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성이 일고 있다. 한쪽은 좌파 정권이라고 비난하고, 한쪽은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며 떠났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지지 기반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한나라당 지지층들이 “세 번 질 수는 없다”며 똘똘 뭉치고 있는 반면,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열린우리당 지지층들은 투표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내리막길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5·31 지방선거 이후 열린우리당은 극심한 내홍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정치권에 익숙했던 ‘문법’대로라면 정동영 의장 등 지도부 총사퇴,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으로 이어지고 백가쟁명식의 위기 타개책들이 쏟아질 것이다. 다 같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이 과정에서 탈당·분당·재창당·신당 창당 등의 움직임이 분주해질 전망이다. 이런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 변화가 더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파장이 어디까지 미치느냐이다. ‘도로 민주당’이냐, DJP(호남·충청 연합) 수준이냐 아니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실험이 시도되느냐가 결정된다. 상식선에서 보면, 대선 1년 전에 치러진 전국 단위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고 대선후보 선두권을 형성하는 주자들 가운데 고건 전 총리를 제외하면 모두 한나라당 소속인 점에 비춰보면 대선은 해보나 마나이겠지만, 역대 대선은 상식대로 치러진 적이 없었다.

△ 2003년 11월11일 열린우리당 창당대회. 열린우리당은 이제 읍소로는 민심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주저앉았다. (사진/ 한겨레 김정효 기자)

좀처럼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개입하고 변화가 일어났다. 열린우리당의 몰락은 그 변화의 발화점이다. 불이 나도 절대 한나라당으로는 옮아붙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정치권의 불안정성이 커진 셈이다.

한나라당도 분화할까

실현 가능성과 유권자들의 지지 여부와 별개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내년 대선이 없을 수도 있다. 현재의 대통령중심제를 내각제로 바꾸는 개헌이 일어날 경우 그렇다는 얘기다. 정·부통령제나 이원집정부제 형태라면 다양한 짝짓기가 가능하다. 대통령 선거가 현행대로 치러지더라도 정계 개편의 폭에 따라 현재 익숙한 당명의 후보들이 아닐 수 있다. 자기 색깔이 뚜렷한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 여러 정치세력의 이합집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 외화되지는 않았지만 정치권에서는 흰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 여러 형태의 시나리오들이 물밑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우선 가장 단순한 조합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이다. 어느 한쪽으로 흡수통합될 수도, 당 대 당 통합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실제 두 당의 호남 출신 의원들이 오래전부터 주장해오던 방안인데다, ‘민주개혁평화세력 대연합론’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두 당의 합에 고건 전 총리가 합세하고 국민중심당, 민주노동당 등이 더해져 ‘반한나라당 연합’을 구축한다는 복안이다. 정치권 바깥의, 국민들로부터 신망 받는 외부 인사·세력의 지원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망가졌지만, 여전히 한나라당 지지 세력과 반한나라당 세력이 엇비슷해 연합만 이뤄진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이긴 하나 걸림돌이 적지는 않다. 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을 표방하고 창당했다. 지역정당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민주개혁세력 통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더라도 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 기반으로 돌아가는 셈이고, 차기 대선은 “제3차 동서대전”(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형태로 치러진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 의원, 한나라당과 영남 출신 의원들이 견디기 힘든 구도다.

△ 열린우리당은 정계 개편으로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DJ와 JP. (사진/ 한겨레)

‘도로 민주당’을 희석시킬 정치세력이 더해진다고 해도 진통은 불가피하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통합의 전제조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이런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면 노 대통령의 탈당은 불가피하고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탈당도 예상된다. 반대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할 경우, 민주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다가 그 속도가 더디다고 판단한 의원들이 먼저 탈당할 가능성도 있다. 어느 한쪽의 일부면 탈당이지만, 규모가 커지면 분당이 된다. 고 전 총리의 행보도 결정적 변수가 된다. 그는 “중도개혁 실용주의 세력 연대에 역할을 다하겠다”고 줄곧 주장해왔던 만큼, 공정 경쟁의 장이 보장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고 현재의 대선후보 지지율로 보면 가장 유리하다. 하지만 그가 독자세력화의 길로 갈지, 통합정당에 힘을 실어줄지는 불투명하다.

열린우리당과 함께 한나라당의 분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내년 초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를 결정한 경선이, 어느 한쪽에 확연하게 불리하다면 경선 참여 여부를 고민하면서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손학규 경기지사도 마찬가지다. 또 정권 교체라는 ‘대업’ 앞에 영남 보수 의원들과 수도권 소장파들이 공존하고 있지만, 외부 환경이 변한다면 틈이 벌어질 수도 있다. 몇몇 소장파 의원들 중에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처럼 지역 대결 구도로 벌어진다면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한나라당이 이기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서도 동서 화합을 위한 영·호남 적자 연합, 열린우리당 일부와 한나라당 일부의 연합 등이 그럴듯하게 거론되고 있다.

개헌, 국가적 어젠다와 함께

또 다른 가능성은 ‘개헌 앞으로 헤쳐 모여’ 방식이다. 강봉균 정책위의장, 염동연 사무총장 등 열린우리당의 주요 당직자들은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어떤 식의 정계 개편이든, 현재의 권력구조, 선거제도 개편 등을 중심으로 한 개헌론이 고리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방식이 정치세력들의 논의와 합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국가적 어젠다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재편되는 방식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영토 조항(헌법 3조),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 위헌 판결을 받은 바 있는 토지공개념 등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개헌 정국을 주도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 만큼의 힘을 가지고 움직일지는 보는 이들에 따라 편차가 크다. ‘식물 대통령’ 초입 단계여서 아무런 의제 설정 능력이 없다고 보는 이(장성민 전 민주당 의원)들이 있는가 하면, ‘업적 관리’와 ‘선거 과정에서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작지만 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보는 이(김형준 국민대 교수)들도 있다.

5·31 지방선거 이후 각 정치 세력들은 2007년 대선을 향해 본격적인 대장정을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움직임이 빨라질 것이다. 정치의 계절이 왔다.

		3당 합당, DJP 연합, 노무현… 대선 승리를 안겨준 야합의 정계 개편… 노무현 후보 단일화는 내용적 연대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성과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뒤, 대선 승리는 새로운 정치실험을 시도한 쪽에 돌아갔다. 새로운 정치실험이라고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리지만, 사실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였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큰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역을 뗐다 붙였다 하는 수준이어서 언제나 ‘야합’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1990년 2월 3당 통합.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14대 대선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했다. 하루아침에 호남을 고립시키는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졌다. 명목은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3당을 합당한다는 것. 그러나 이는 여소야대를 만들어준 유권자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3당 합당은 4당 구조로는 집권 연장이나 권력 배분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축소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세력들이 안정적인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대한 것이다. 결국 2년 뒤 대선에서 김영삼이 승리하면서 통합형 정계 개편의 힘이 입증됐다.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이 DJP(DJ+JP) 연합을 했다. 호남과 충청 지역의 표를 동시에 얻은 김대중은 4수 끝에 여야 정권 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이처럼 민주화 세력과 군부독재 세력이 연대하는 ‘야합의 정계 개편’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87년 김영삼, 김대중 두 민주화 세력의 분열이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분열되면서 군부독재 세력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지역주의와 결합하는 양상이 됐다는 설명이다. 손 교수는 “YS와 DJ가 분열되지 않았다면 영남과 호남의 연합이자 반민주 투쟁의 연합,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연합이 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2002년의 실험은 ‘후보 단일화’였다. 한나라당 집권에 반대하는 이들은,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극적으로 단일화를 이룬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다. ‘행정수도 충청 건설’ 공약은, 1992년의 당 대 당 통합, 1997년 당을 달리한 연합과는 달리 내용적 연대였다. 한나라당은 “행정수도 공약으로 충청 지역의 표를 샀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2007년에는 어떤 실험이 등장할까. 정치권에는 벌써부터 여러 시나리오가 나돈다. 정계 개편의 주요 시나리오들이 여전히 지역 구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