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을 수 없는 부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김세진·이재호 유가족과 친구들… 20주년 행사 준비하는 기념사업회 “그들은 아직 편하게 잠들 수 없다”
▣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 앞에서 “평생 지울 수 없을 만큼 큰 부채 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강렬한 것이었고,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상처기도 했다. 죽음의 목격자 가운데 일부는 운동판에 투신한 활동가가 됐고, 일부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월급쟁이나 기업가가 됐다. 그때 공대 학생회장을 지낸 장유식 변호사는 “물론, 몇몇은 젊은 시절 신념을 바꾸고 뉴라이트로 전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20년이 지난 ‘그 죽음’을 앞세워 각자 살아온 삶의 모습을 공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유학가라”던 부모는 투사가 되어
‘김세진 열사’의 아버지 김재훈(70)씨는 “부모가 아이를 이해 못하면 누가 세진이를 이해할 수 있겠냐”며 입을 열었다. “나나 이 사람(어머니 김순정·69)이나 그날 이후 세진이를 이해하기 위해 싸워온 것 같아.” 김순정씨는 이따금 마른 기침 소리를 냈다. 그동안 집회 현장에서 하도 최루탄 가스를 많이 마셔 폐가 나빠졌다고 한다.
“사건이 나기 며칠 전에, 그러니까 4월25일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세진이를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고. 그래서 세진이 형과 같이 세진이를 잡으러 학교를 이 잡듯 뒤졌지. 숨을 돌리려 학과장실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한 통 오더라고. 세진이가 다쳤다는 거야. 화상을 입어서 한강성심병원에 있다고.”

△ 김세진의 아버지 김재훈(70)씨는 “남은 인생은 세진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재일 유학생 ‘장의균 사건’에 휘말려 고정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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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에서 만난 김세진의 육신은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상체는 온통 핏빛 붕대에 감겨 있었고, 목덜미는 새까맣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김세진의 경복고 선배라는 의사는 “불이 몸에 붙은 채로 구호를 외치며 팔을 강하게 흔들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세진은 부모에게 눈길을 돌려 “죄송하다”고 말한 뒤 “친구는?”이라며 이재호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세진은 그날 저녁 의식을 잃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전경을 동원해 인의 장막을 펼쳐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아들의 죽음은 부모를 ‘투사’로 만들었다. 탄탄한 국영기업 충주비료의 공장장을 지냈던 김씨 부부는 아들이 죽기 전까지 그저 평범한 중산층 서민이었다. 1985년 겨울, 미생물학과 학과장이었던 임정빈 교수가 “만났으면 좋겠다”고 전화가 왔다. “세진이가 졸업하면 구속될지 모르니 서울대학교 총장 추천으로 해외 유학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해왔죠. 안 그래도 세진이 때문에 걱정이었는데, 너무 고마웠지. 얼마나 고마웠냐면, 유학 가는 학교가 어느 학교인지도 못 물어봤다니까.” 김씨는 며칠 뒤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아들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김세진은 “앞으로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어머니는 예수를 믿으면서 주위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이 있는데 내 자식만 잘되기를 바라세요?”
아들의 죽음 이후 김씨 부부 주변에는 경찰이 떠날 날이 없었다. 감시는 철저하고 집요했다. 부부는 마음 놓고 바깥 외출도 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몰래 담을 넘어 빠져나가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일도 잦았다. 당시 은평경찰서 정보계장은 김씨의 집 주변에 지프차를 세워두고 결재를 받았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상처
부부가 그동안 거쳐간 직함은 일일이 손으로 헤아리기 힘들다. 아버지 김씨는 당시 재야의 명망가였던 예춘호 전 의원, 나중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이 되는 장을병 선생 등과 한겨레사회연구소(현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해 상임이사직을 맡았고, 나중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서울지부 공동의장이 됐다. 어머니 김순정씨도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부의장과 지금의 환경운동연합으로 발전한 ‘공해추방운동연합’ 공동의장,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부의장을 맡았다.

△ 김세진·이재호의 장례식은 삼엄한 경비 아래 치러졌다. 경찰은 가족들에게 “화장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가족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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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벤처기업 하늘미디어넷을 운영하는 우상수(자연대 84)씨는 “그때 세진이형과 약속을 못 지킨 게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1986년 자연대 총무부장을 지냈고, 자연대 학생회장이었던 김세진이 죽은 뒤 보궐로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그때 ‘택’했던 농성 장소가 경찰에 잇따라 털리고 나서 상황이 급박했거든요. 사건이 나던 1986년 4월28일 오전 7시에 세진이 형과 만나 진행 상황을 보고하기로 약속했는데 늦잠을 자느라 못 나갔죠.” 전날 밤 오전 10시께 노량진에서 만난 김세진이 자연대 84·85들을 모아놓고 “내일 경찰들 겁주러 석유를 준비하겠다”고 말한 게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고 말했다. “그때 그 일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줬냐고 말하면 똑 부러지게 말은 못해요. 그 사건은 평생 떠안고 살아야 할 제 인생의 짐이죠. 어떤 일이 생길 때마다 ‘그 형이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그 기준대로 항상 명확하게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서 삶을 늘 규정해온 것 같습니다.”
그들의 젊은 죽음은 시대를 같이했던 또래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안긴 것도 사실인 듯했다. 지금 서울 강남 청솔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이정호(공대 85)씨는 “그때 무서웠다”고 말했다. “신림사거리에서 세진이 형 등에 불 붙는 것을 직접 봤거든요. 운동 하면 죽음이 연상되니까, 충격이 컸죠. 운동판에서 사람들도 많이 떨어져나갔어요. 저희 과(산업공학)에서도 6개월이 지나니까 2명밖에 안 남더군요. 그땐 우리도 어렸으니까….”
구영한(공대 85)씨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직접 보는 일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1986년 5월, 학생회관 4층에서 이동수가 떨어지는 모습을 코앞에서 관찰했다. “그걸 바로 앞에서 봤는데, 그 느낌은 말로 설명이 안 돼요. 세진이 형 때도 6개월 내내 밤만 되면 술 마시고 취해 우는 애들이 있었어요. 1986년에는 정말 쉼 없이 사람들이 분신하고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추모 문집과 다큐멘터리 나올 예정
상처는 곧 아물었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 학번들에게 김세진·이재호는 피 끓는 양심을 가진 젊은이라면 도무지 피해나갈 수 없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그것은 이재호의 동생 이재욱(39)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양대 87학번으로 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사건에 연루돼 실형 2년을 언도 받고 1년8개월을 감옥에서 살다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데모 하느라 아들 하나는 죽고 하나는 감옥에 갔으니까 부모님께 말도 못할 괴로움을 줬다”고 말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젊은이었다면, 돌과 화염병을 드는 게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허벅지 피부를 떼내 이식 수술을 했던 어머니 전계순(66)씨도 이따금 찾아와 한숨만 내쉬었을 뿐 아들을 탓하지 않았다.

△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는 4월28일과 29일 이틀 동안 서울대에서 20주년 추모행사를 열기로 했다. 행사를 준비하는 사업회 구성원들의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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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형의 삶이 제겐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는 서울 구의동에서 DVD판매상을 하는 ‘생활인’이 됐다. “지난 7월 평택 대추리에 집회가 있어서 찾아갔어요. 대학을 1995년에 졸업했으니까, 졸업 이후 그런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죠. 그곳에서 우리 민중의 삶을 규정하는 압도적인 미국의 힘을 다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형이 그렇게 죽었는데, 변한 것은 뭘까요?” 그는 4~5월만 되면 정신이 산란해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다고 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흩어졌던 친구들이 모여 2004년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를 다시 결성했다.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장유식 변호사는 “20주년 행사는 꼭 챙겨야겠다는 부담이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83~85학번이 주축이 된 기념사업회원 11명은 4월11일 저녁 7시 기념사업회의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서울 서초구 서초3동 법무법인 동서남북의 장유식 변호사 사무실에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빠 늦게 도착했고, 홍양현(사회대 84)씨는 나주에서 4시간이나 차를 몰고 달려왔다.
2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는 김세진·이재호 추모 문집과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든다. 자료집의 이름은 ‘아름다운 청년 김세진·이재호’로 정해졌다. 자료집 편집을 담당한 백창화씨는 “애초 검토한 제목에는 ‘불꽃’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지만, 서로의 가슴에 너무 큰 상처가 남아 이를 빼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신 전태일 열사를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제목에 ‘아름다운 청년’을 집어넣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근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아구찜 한 접시에 소주 한 잔씩을 비우고 뿔뿔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입 밖에 내어 얘기하진 않았지만, 김세진·이재호 두 사람의 이름은 그 시대 젊은이들이 평생 동안 지고 살아야 할 주홍글씨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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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만에 다시 모인 친구들 당국의 탄압으로 활동 중단된 추모 모임, 서울대 83학번들이 재결성
‘반전반핵·양키고홈’을 외치며 스러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를 추모하기 위한 모임은 분신 2주년째인 1988년 4월 결성됐다. ‘김세진·이재호 열사 추모사업회’에는 고 문익환 목사가 회장, 지선 스님, 진관 스님, 박원순 변호사, 김영주 목사 등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발족식은 1988년 4월28일 5천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렸다. 행사가 끝난 뒤 서울대 인문과학동 잔디밭에 추모비도 제막됐다. 그날 이후 매년 4월 마지막 주 일요일마다 김세진·이재호를 기억하는 서울대 선후배들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이 추모비 앞에 모여 추모식을 열어왔다.
발족 이후 추모사업회는 김세진·이재호의 뜻을 이어 통일운동을 펼쳤지만, 행동이 자유로울 순 없었다. 1989년부터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추모사업회 주요 운영자들이 국가보안법 등으로 구속돼 활동이 사실상 중단됐다.
흩어진 모임이 재결성된 것은 15년 만이다. 열사 추모기념일 20주년을 앞두고 김세진·이재호의 동기인 서울대 83학번을 중심으로 모임을 재결성하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2004년 3월 모임은 ‘김세진·이재호 기념사업회’로 재발족했다. 회장은 사건이 나던 때 공대 학생회장을 지냈던 장유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변호사)이 맡았고, 김세진·이재호와 활동읕 같이한 83~85학번을 중심으로 2006년 4월 현재 온라인과 오프라인 회원이 150여 명이다. 모임방은 cafe.empas.com/mem0428에 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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