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당신은 생명과 지구를 생각해 육식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기 먹는 것을 의식적으로 줄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이미 비덩어리주의자이다.”

2002년 서울대 환경동아리 세이프에서는 ‘비덩주의 선언’이 있었다. 1999년 설립된 이 동아리의 학생 4~5명은 이미 채식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한 회원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패러디해 장난스러우면서도 진지한 채식선언을 논의에 부친 것이다.

‘비덩주의’를 아십니까

페스코(생선까지 먹음)에서 락토오보(계란·우유까지 먹음), 비건(완전 채식)까지 ‘채식 실력’을 분류하는 서구의 방식은 단계주의적 오류에 빠진다는 게 비덩주의의 주장이다. 선배 고수가 새내기 채식인을 깔보는 태도, 고기맛을 잊을 수 없어서 죄다 페스코로 몰리는 경향이 채식주의의 단계주의적 오류다. 반면 연속선적인 실천인 비덩은 “고기를 먹지 않거나 줄이려는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그리고 비덩은 “인식론적으로 생명을 죽이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덩어리 고기’를 우선적으로 배제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 (사진/ 윤운식 기자)

세이프의 창립 멤버인 홍상욱(27)씨는 그해 학생식당 앞에 산 돼지를 갖다놓았던 ‘비육식 퍼포먼스’를 기억하고 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먹고 있는 돼지고기가 한때는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채식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종교와 치료, 명상 영역에서만 수행돼왔다. 채식이 대중화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1998년 PC통신 하이텔에 채식동호회가 생겼고, 채식은 웰빙 바람을 타고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서울대 세이프의 ‘비덩주의’는 2000년대를 통과하며 젊은 층에 확산된 한국 채식주의 문화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들 2세대 채식주의자에게 있어 채식은 종교도 아니고 투쟁도 아니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채식한다고 하면 신기한 사람처럼 쳐다보거나 외골수인 양 대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나도 일주일 하다 포기했다’고 하거나 ‘어떻게 하는 건데’라고 물어와요.”

채식 5년차 박하재홍(29)씨는 “채식은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채식인은 더 이상 힐난의 대상도 아니고 범접하기 힘든 도인의 것도 아니다. 사실 채식인을 일컫는 베지테리언(vegetarian)의 어원을 따져보면 채소(vegetable)와는 관계가 없다. 베지테리언의 어원은 ‘온전한’ ‘활기 있는’ 이라는 뜻의 라틴어 ‘vegetus’이다. 온전하고 활기 있는 삶 자체, 즉 라이프스타일을 지칭한다.

최희수(31)씨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이다. 비행기를 탈 때면 ‘베지테리언 밀’을 신청할 정도로 채식주의자임을 자처하지만, 커밍아웃할 수 없는 회식 자리에선 육식도 한다. 그가 채식을 시작한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도 환경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환경 관심·사회적 연대·슬로 라이프

“그냥 채식이 좋았어요. 어렸을 적부터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도 있고….”

최씨는 자신의 채식에 정치적 목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삶은 평균 이상으로 정치적이다. 민주노동당 후원회원이며, 양성 쓰기를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으며, 새만금 간척사업에 분노한다. 채식이 먼저였는지 그의 정치적 성향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삶과 채식이 한 배에 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채식은 삶의 총체적 방향성을 담고 있다. 류현정(27)씨는 “두 달 정도 지나니까 세계관이 바뀌더라”고 말했다. 채식을 통해 동물에게 고통을 주지 않은 것처럼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 킬러’가 고기를 끊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일상의 변화는 두렵지 않았다.

“일단 집에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세제를 친환경 세제로 바꿨고요. 슈퍼마켓에 갈 때도 직접 봉투를 가지고 나가요. 채식하더니 개과천선했다는 소리를 듣지요.”

음식을 소비하다가 창조하는 데 재미를 들인 류씨. 그는 내친 김에 휴대전화와 인터넷도 해지했다. 천천히 요리하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통신기기 없는 느린 삶도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류씨는 “점점 느린 삶의 패턴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3월26일 낮 서울 북한산 인수봉. 녹색연합 채식모임 베지투스 등 회원 10여 명이 환경보호 활동을 벌였다. 5년 전 동물 도살 장면을 보고 육식을 끊었던 박선우씨도 이날 쓰레기를 주운 뒤, 집에서 싸온 채식 도시락을 까먹었다.

“5년 동안 채식을 하다 지난해 녹색연합에 가입했어요. 한 달에 2~3번 정도 시간을 내 활동하지요. 지난 1월에는 경북 봉화에 가서 야생동물을 해치는 올무를 제거했습니다.”

채식으로 시작한 식생활의 변화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이끈다. 채식주의자들은 △생태·환경적 이슈에 민감하고 △사회적 연대에 적극적이고 △친환경적 소비를 하며 △슬로 라이프를 추구한다. 동물 모피가 사용된 가죽 지갑이나 구두는 피하고, 음식은 남기지 않는다. 채식 동호인 카페에도 먹을거리에 대한 글만 올라와 있지 않다. 새만금 개펄을 살리자는 제언, 평택 대추리 집회에 가보자는 글, 진보적인 책에 대한 서평 등 다양하다. 그리고 이런 삶은 도시 속에서 파열되지 않는다. 헬렌 니어링 부부의 자연주의적 삶은 동경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를 떠나진 않는다. 며칠 동안의 자연주의 여행이나 명상을 좋아한다. 경쟁과 속도, 소비를 지향하는 주류적 삶에서 비켜서 있다.

학교 급식에 채식 식단 도입도

이런 채식주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적어도 채식주의자들의 밑바탕에는 건강한 개인주의가 깔려 있다. 함께 먹는 식사 자리에서 항상 소수자로서 시험대에 오르는 채식주의자들은 개인주의자로서 단련돼 있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대표의 말이다.

△ 채식은 2000년대 들어 웰빙 바람을 타고 확산됐다. 경기 과천 풀무원 농장의 새싹 채소 재배 모습.(사진/ 류우종 기자)

“채식을 하려면 ‘난 채식주의자’라고 밝혀야 할 커밍아웃 문제에 봉착하게 되지요. 육식 집단에서 자기 자신을 끝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소수자도 떳떳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체득하게 되지요.”

2004년 생긴 서울 홍익대 앞의 헌책 카페 캘커타는 이러한 채식주의 라이프스타일과 맞닿은 공간이다. 캘커타는 여행서적인 <론리플래닛>과 <녹색평론> 등 환경·생태주의 책들로 가득 차 있다. 슬로 라이프와 자유로운 노마드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이곳을 찾아와 수화를 배우고 명상 모임을 한다. 이 카페의 운영자 코코넛(누리꾼 이름)은 현미밥에 채식 카레를 덮은 소박한 밥상을 내놓는다. “지금까지 인도와 몽골 등지로 7차례 손님들과 함께 채식 여행을 다녀왔어요. 장애인·비장애인 반반씩 팀을 꾸려 출발한 뒤 고기를 먹지 않지요. 30대 직장인이 주요 참가 대상이에요.”

서울 도봉구의 채식 식당 해피아도 30대 젊은 층이 주요 고객이다. 환자나 종교인이 주로 드나들던 기존의 채식 식당과 달리 패밀리 레스토랑처럼 인테리어를 꾸며놓았다. 1600명의 회원이 드나든다.

채식주의 라이프스타일은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국가적인 통계가 없어 수치는 알 길이 없지만, 채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진상현(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씨가 2004년 서울대학생 634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자신이 채식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10%에 이르렀다.

△ 채식 뷔페의 주요 고객은 환자와 종교인에서 30대 젊은 층으로 바뀌었다. 고급 이미지로 인테리어한 서울의 한 채식 뷔페의 모습.(사진/ 윤운식 기자)

학교 급식에 채식 식단을 도입한 곳도 생겼다. 2004년 서울대에 이어 지난해부터 동국대는 채식 식단을 서비스하고 있다. 이 학교 원향식당은 젓갈이 든 김치를 빼고는 드레싱까지 식물성 원료를 쓰는 완전 채식 식단이다. 김영중(39) 영양사는 “지난해 3월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한 끼니에 10명 정도밖에 오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30~40명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채식을 지향하고, 육식을 지양한다

채식이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님은 최근의 조사결과에서 확인된다. 채식 전문기업 베지푸드가 1월10일부터 ‘채식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은 온라인 조사결과(3월31일 현재)에서 ‘자연과 생명 사랑을 위해서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전체의 40%로, ‘건강을 위해서 한다’고 대답한 29%보다 많았다.

△ 2세대 채식주의자들은 사회적 연대에 적극적이다. 녹색연합 채식모임 베지투스가 북한산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사진/ 박승화 기자)

채식주의 라이프스타일은 엄격한 ‘채식주의’라기보다는 ‘채식지향주의’이자 ‘육식지양주의’이다. 동물과 생선을 죽이느냐,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덩주의처럼 육식을 줄이려는 모든 행위다. 그리고 채식주의 라이프스타일은 음식에 대한 성찰이 가져다준 여러 일상의 변화로 구성돼 있다. 100명의 변화된 일상에는 100가지의 채식주의가 있다. 일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즐거워서 채식주의는 매력적이다.

		퇴출 심사대에 오른 우유 로스앤젤레스-뉴욕선 학교 급식 메뉴서 제외… 한국에서도 논란 일 듯 현대 영양학이 ‘완전 식품’이라고 찬사를 바친 우유. 미국에서는 이 우유를 가지고 논란이 한창이다. 로스앤젤레스시에 이어 지난 2월 뉴욕시도 저지방 우유를 제외한 모든 우유를 학교 급식 메뉴에서 뺐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고 비만 증상이 있는 학생들이 날로 늘어가는 현실에서 동물성 단백질 식품인 우유가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일부 채식주의자들은 우유를 ‘건강의 적’으로까지 돌린다. 인간의 혈액은 항상 산성과 알칼리성이 평형을 유지하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우유를 마시면, 동물성 단백질로 인해 몸 안의 혈액이 산성화된다. 이렇게 되면 혈액을 중화하기 위해 우리 몸은 알칼리성 미네랄을 필요로 하고 이 과정에서 뼈 속의 칼슘을 소비하게 된다. 쉽게 말해 우유를 먹으면 칼슘을 섭취하는 동시에 상당량의 칼슘을 잃는 것이다. 채식주의자들은 “우유의 칼슘 보충 효과가 과장됐다”며 우유 최대 소비국인 핀란드에서 가장 골다공증이 빈발한다는 통계를 내놓는다. 어쨌든 성인병이 만연한 현대인의 식생활에서 우유는 퇴출 심사대에 올라 앞으로도 한참 찬반 논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한국에서 이와 관련해 연구·검토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에선 우유의 전체 급식이 이뤄지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서울만 해도 초등학교 4곳 가운데 3곳이 수요 희망조사를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전교조 2005년 6월 조사에서 나타났다.

		페스코 →락토오보 →락토→비건 완전 채식은 소수, 어류까지 먹는 채식인이 전체의 절반 가량 세계채식인연맹은 채식을 소·돼지 등 포유류와 닭·오리 등의 가금류 그리고 생선까지 먹지 않는 비육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달걀과 우유 등 동물의 부산물은 때에 따라서 먹을 수 있다. 채식은 보통 포유류부터 시작해 가금류, 어류순으로 먹지 않는다. 인간과 가깝고 고통을 극렬하게 느낄 수 있는 고등동물부터 섭취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래서 비육식은 하되, 닭을 먹는 채식인을 ‘세미 베지테리언’(semi-vegeterian·준채식)이라고 부른다. 생선까지 먹는 채식인은 ‘페스코’(pesco·생선 채식)이고, 다른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는 완전한 채식인을 ‘비건’(vegan·완전 채식)이라고 부른다. 육식은 하지 않되 우유까지 먹는 걸 ‘락토’(lacto), 우유와 달걀을 먹으면 ‘락토오보’(lacto-ovo·유란 채식)이다. 채식인 하면 보통 비건을 연상하지만, 완전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소수다. 오히려 페스코가 전체 채식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의 채식단체인 ‘베지테리언 리소스 그룹’이 2003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인 가운데 비건은 1.8%, 락토오보는 2.8%, 페스코가 6%였다. 이광조 한국채식인협회 대표는 “영국은 인구 센서스 질문 중에 채식 여부를 묻는 데 비해 한국은 민간에서조차 채식인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며 “유의미한 통계는 2004년 서울대 학생들을 조사한 정도”라고 말했다.

		웰빙, 로하스, 그리고 채식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중에서도 채식주의는 작고 가난한 정신 채식주의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웰빙족이나 로하스족을 연상시킨다. 미국에서 나온 개념인 로하스족은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웰빙과 같지만 여기에 친환경 소비를 추구한다. 로하스는 건강과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는 라이프스타일(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로 △유기농을 고집하고 △DIY를 즐겨 하고 △친환경 제품 등을 사용한다. 하지만 웰빙족이나 로하스족 모두 기업의 마케팅 전략 속에서 유포된 측면이 크다. 웰빙족은 2003년 8월 국내 일간지에 처음 등장해 기업의 마케팅 수단으로 회자됐으며, 로하스족은 2000년 미국의 내추럴마케팅연구소가 창시한 개념이다. 웰빙과 로하스가 붙은 상품들은 일반 상품에 비해 더 비싼 돈이 얹혀 팔린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대표는 “채식주의는 작고 가난한 정신”이라고 말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로하스족이 친환경 소비를 추구할 때 채식주의는 소비 자체를 줄이려고 한다. 로하스가 자본주의의 영토 확장자라면, 채식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자다. 채식주의의 좋은 역할 모델은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 부부다. 이들은 1932년 도시를 떠나 버몬트의 낡은 농가로 이주해 자급자족의 삶을 살다갔다. 채식은 과잉생산·과잉소비 체제에서 소외돼 있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공장식 축산물을 거부하며, 동물에 대한 폭력적 도살과 사육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식품생산 체계를 반대하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