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원/ JES 기자

세계가 깜짝 놀랐다. 과연 저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주인공은 단연 한국 대표팀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승엽(30)은 눈부실 만큼 돋보였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낯선 동양 청년이 영웅으로 우뚝 솟았다. 이승엽의 홈런포는 한국에서 프로야구 리그가 열리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 미국 땅을 뒤흔들어놓았다. 이승엽은 WBC 예선과 본선 라운드 6경기에서 무려 5홈런을 토해냈다.

타점도 10점이나 따라붙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야구를 잘한다는 사나이들이 겨룬 대회에서 300명 가까운 타자 중 홈런 단독 1위, 타점 공동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미국에서는 이승엽이라는 브랜드가 생겼다. 미국 언론은 연일 그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2년 전 그를 스카우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이승엽은 내년에는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무대에 설 것으로 보인다. 2003시즌 뒤 빅리그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그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을까.

“다저스는 왜 그를 잡지 않았나”

잠시 WBC 경기를 되짚어보자. 이승엽은 지난 3월5일 도쿄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A조 최종전에서 1-2로 뒤진 8회 타석에 들어섰다. 상대는 일본팀 최고 왼손투수로 꼽히는 이시이 히로토시(야쿠르트)였다. 그가 높은 슬라이더를 던지자 “딱” 소리와 함께 이승엽의 방망이가 날카롭게 돌아갔다. 타구는 오른쪽 스탠드에 시원하게 꽂혔다. 3-2 역전 2점 홈런. 무대는 미국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으로 옮겨졌다. 이승엽은 13일 1조 첫 경기였던 멕시코전에서 0-0이던 1회 지난해 메이저리그 14승 투수 로드리고 로페스(볼티모어 오리올스)를 만났다. 또다시 굉음이 들렸다. 이승엽의 스윙에 걸린 공은 쏜살같이 오른쪽 담장을 넘어갔다. 또다시 결승 2점 홈런이었다. 하이라이트는 14일 미국전이었다. 이승엽은 0-0이던 1회 미국 선발 돈트렐 윌리스(플로리다)와 마주했다. 시속 150km 중반의 강속구를 예사로 던지는 윌리스는 지난해 22승으로 내셔널리그 다승왕에 오른 특급투수다. 이승엽은 기죽지 않고 초구부터 방망이를 돌렸다. 낮게 깔린 까다로운 공이었지만 더욱 힘찬 파워로 걷어냈다. 쭉 뻗어간 타구는 이번에도 오른쪽 담장을 넘었다. 이승엽의 1점 홈런에 열기가 오른 한국은 미국의 콧대를 누르고 7-3으로 승리했다.

△ 3월 16일 일본전에서 승리하고 기뻐하는 한국 선수들. WBC는 '이승엽의 재발견'을 보여줬다. (사진/ EPA)

이승엽이 일본·멕시코·미국을 상대로 쏘아올린 홈런은 모두 결승 홈런이었고, 진한 감동을 담고 있었다. 기록지에 남는 숫자 외에도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새겼다. 이 홈런 3방으로 이승엽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세계모터쇼에서 자동차 비즈니스맨들을 놀라게 한 첨단 자동차처럼 이승엽의 홈런은 ‘월드마케팅’에 성공했다.

이승엽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인 1999년 54홈런을 터뜨린 뒤부터 조금씩 미국에 소개됐다. 2003년 56홈런으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자 미국 언론은 “이승엽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뿐이었다. 막상 이승엽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자 빅리그 구단들은 그를 외면했다. 한국 야구 수준을 마이너리그 더블A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엽의 56홈런은 과대포장된 것으로 폄훼했다. 심지어 한국 야구장이 작기 때문에 그런 기록이 세워졌다고까지 했다. 이승엽은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LA 다저스와 협상을 했다. 그러나 다저스는 100만달러의 연봉을 제시했고, 메이저리그 엔트리 보장도 하지 않았다. 이승엽의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한국 야구를 무시하는 제안이었다. 결국 이승엽은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약속을 저버렸다는 팬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그는 “메이저리그가 인정해주는 일본 리그에서 성공한 뒤 다시 미국 진출을 시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지바롯데 마린스 유니폼을 입었다.

이승엽의 기록을 짓밟았던 미국이 2년이 지난 뒤 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WBC에서 선보인 폭발력을 보고 미국 언론과 구단 관계자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박찬호(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는 이승엽에 대해 “미국에서도 홈런 30개를 칠 수 있는 파워를 지녔다. WBC를 계기로 이승엽에 대한 빅리그 팀들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스카우트들도 “일본에서의 계약이 올해로 끝나느냐. 그렇다면 이승엽은 내년에 미국에서 뛸 것”이라고 장담했다. LA 지역 언론은 “왜 2년 전에 이승엽을 잡지 않았느냐”며 아우성이다. 미국의 간판타자 마크 테세이라(텍사스 레인저스)는 “이승엽은 충분히 미국에서 30홈런 이상을 때릴 수 있다”고 공언했고, 마이클 바렛(시카고 컵스)은 “이승엽이 왜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이들은 이승엽의 스윙을 직접 본 선수들이다.

매일 한 컵의 땀, 운동하다 구토까지

이승엽은 메이저리그가 자신의 잠재력을 몰라봤다며 원망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홈런을 펑펑 때리던 시절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인정한다. 냉정하게 자신을 재평가했고 뼈를 깎고 피눈물을 쏟으며 스스로를 개조해 얻은 결과가 WBC 홈런 행진이다. 이승엽이 에인절스타디움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를 예전부터 알고 있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저 친구가 이승엽이 맞느냐”고 물었다. 체격이 훨씬 커지고, 스윙도 몸놀림도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일본 진출 첫해인 2004년 타율 0.240에 14홈런 50타점으로 부진했다. 생애 처음으로 2군에 떨어지는 수모도 맛봤다. 메이저리그를 향했던 눈높이에서 볼 때 그의 일본 성적은 너무나 초라했다. 이승엽은 그해 11월 오창훈 관장이 운영하는 대구 세진헬스클럽을 찾았다. 그리고 세 달 동안 지옥훈련을 했다. 이 훈련은 지난 겨울에도 계속됐다. 그간의 훈련 성과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승엽은 처음에 팔 이두근을 키우는 덤벨(아령) 12kg짜리를 10회 정도 간신히 들어올렸다. 스쿼트(역기를 등에 지고 앉았다 일어서기) 역시 100kg을 10회 정도 소화했을 뿐이다. 오 관장은 “처음 이승엽의 힘은 보통 선수 수준에 그쳤다. 어떻게 56홈런을 쳤는지 의심됐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 이승엽은 꾸준한 웨이트트레이닝으로 팔 둘레를 5cm 늘리고, 몸무게를 10kg 늘렸다. 늘어난 몸만큼 파워도 세졌다. (사진/ 연합 이재혁 기자)

지난 겨울 이승엽이 들어올린 무게는 2.5~3배 정도 증가했다. 35kg 덤벨을 15회씩 자유자재로 들어올렸고, 스쿼트 250kg을 쉽게 짊어졌다. 팔 둘레는 37cm에서 42cm로 늘어났다. 오 관장은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팔둘레는 2cm 늘리기도 힘들다. 무게도 처음보다 70% 이상 끌어올리기는 어려운데 이승엽은 250% 이상 증가시켰다”며 놀라워했다. 이승엽은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을 강화시켰다. 2004년 85kg이었던 체중이 지난해 초에는 92kg이 됐다.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단련시킨 덕분이었다. 이승엽은 지난 시즌 타율 0.260에 30홈런 82타점을 기록했다. 팀내 홈런과 타점 1위에 올랐고, 일본시리즈 4경기에서 3홈런을 뿜어내며 우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이승엽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리빌딩을 계속했다. 겨우내 100kg까지 근육을 키운 뒤 유연성 강화훈련을 통해 최적 수준인 95kg으로 다시 감량했다. 오 관장의 연구를 토대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승엽이 감내한 고통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매일 한 컵 분량의 땀을 쏟아냈고, 극한까지 치닫는 웨이트트레이닝으로 구토도 수차례 했다. 또 지방이 아닌 근육을 생성해야 했기에 왕성한 식욕을 억누르고 단백질이 많은 식품 위주로 소식을 했다. 이승엽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사실 한국에서는 야구장을 떠나면 거의 개인 훈련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그는 하와이 우승여행 때도 설 연휴에도 바벨을 놓지 않았다.

왼손 투수에게 뽑아낸 두 개의 홈런

이승엽은 노력형 선수가 아니었다. 특히 웨이트트레이닝과는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일본 투수들에게 철저하게 당한 뒤 이전까지의 자신을 모두 버렸다. 일본 투수들은 제구력이 워낙 뛰어나고 공 끝의 변화도 많다. 이승엽은 한국에서처럼 큰 스윙으로 맞서다가 약점만 들켰다. 이승엽은 일본 투수들의 몸 쪽 높은 공과 포크볼에 번번이 당했다. 이승엽이 내린 결론은 짧고 강한 스윙이다. 테이크백을 최대한 줄여야 일본 투수들의 현란한 공을 따라가 맞힐 수 있었다. 이렇게 작은 폼으로 홈런을 때리기 위해서는 이두근과 하체 근력 강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승엽이 지옥 같은 웨이트트레이닝을 묵묵히 이겨낸 것이다.

△ 일본에서 이승엽은 좌절을 겪으면서 더 강한 선수로 거듭났다. 지바롯데 마린스 선수로 뛰는 이승엽.(사진/ 교도연합)

이승엽은 WBC에서 확실히 다른 타격을 보였다. 짧고 강했다. 당연히 그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스포츠 전문채널 은 “이승엽은 마치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를 연상케 한다. 이승엽은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한 스윙을 선보인다”며 극찬했다. 그가 뽑아낸 홈런은 한결같이 명품이었다. 이시이로부터 터뜨린 대포는 높은 공을 가볍게 툭 받아쳤을 뿐이었다. 설마설마 하는 사이 그대로 담장을 넘어갔다. 로페스에게서 빼앗은 홈런은 낮은 공을 부드럽게 받아친 것이었다. 튼실한 하체 덕에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았다. 역시 직선타구였다. 윌리스를 두드린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힘찬 그의 공을 끝까지 본 뒤 제대로 깎아쳤다. 이 홈런들은 웬만한 메이저리그 톱타자도 때려내기 어려운 공을 받아쳐 만들어냈다. 특히 왼손 타자인 이승엽이 왼손 투수인 이시이와 윌리스에게 위축되지 않고 스윙한 점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에게서 후한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승엽이 WBC에서 쏘아올린 대포는 세계 정복을 위한 신호탄일 뿐이다. 메이저리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이승엽이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안착하려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보내는 올 시즌을 잘 마쳐야 한다. 2할8푼 이상의 타율과 30~40홈런이 필수적이다. 지난해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하면 메이저리그는 또다시 이승엽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엽이 일본에서 또 한 번 실패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 이승엽은 예전에 비해 기술적·정신적으로 몇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부상만 없다면 40홈런도 가능하다는 것이 일본 야구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지난달 일본 미야자키 스프링캠프에서 “이승엽이 날리는 타구는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고 감탄했다. 일본 최고 타자였던 마쓰이는 메이저리그에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이승엽의 스윙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농축된 파워로 생산하는 스윙이 더욱 짧고 날카로워졌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특급 투수를 상대로 통렬한 홈런을 터뜨린 데에 따른 자신감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연봉 손해보고 요미우리 간 까닭

이승엽은 지난 2년간 숱한 유혹을 받아왔다. 삼성에서 “돌아오라”고 손짓을 했고, 지난해 지바롯데가 잔류를 요청했을 때도 흔들렸다. 결국 이승엽은 연봉 5천만엔을 손해보고 요미우리 이적을 결심했다. 일본 최고 명문구단에서 성공해야 메이저리그 진출이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승엽이 도전 대신 만족을, 혁신이 아닌 안주를 선택하려 했다면 여러 가지 대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승엽은 선택의 순간마다 고행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모두 이겨냈다. 그런 이승엽이 꿈을 눈앞에 두고 방심하고 실수할 수 있을까.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