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사이’의 문제로 치부돼 감춰진 아내 성폭행의 심각한 사례들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에 이른 당사자들도 제대로 항거 못해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결혼을 하면 성관계의 의무가 있다?
부부간에는 성폭력이 성립되지 않는다?
부부싸움 뒤 성관계를 하면 화해가 된다?
부부간에 발생하는 강제적 성관계에 대한 대표적 ‘편견’들이다. 이런 편견은 ‘부부 사이의 강간은 폭력이 아니라 조금 난폭한 성관계이다’거나 ‘구타나 흉기 위협을 동반하지 않은 성관계는 충분히 거부할 수 있다’ ‘영 살기 힘들면 이혼하면 될 게 아니냐’는 식의 통념을 낳는다. 이런 탓에 많은 이들이 부부 사이에 발생한 폭력이나 강압에 의한 성관계를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피해자조차 그렇다. 그것이 ‘부부 사이’에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혼 깨면 안된다는 생각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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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폭력으로 상담기관을 찾는 피해자의 30~60%는 배우자로부터 성적 학대와 성폭행에 시달린다고 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상담 모습. (사진/ 박승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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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37)씨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다. 하루 일과를 체크하고, 아내의 외출복 냄새를 맡기도 했다. ㄱ씨는 결혼 초에는 남편의 이런 증상이 ‘애정’이나 ‘소유욕’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 둘을 낳고도 남편의 ‘감시와 집착’은 식을 줄 몰랐다. ㄱ씨가 결혼 전 사귀던 남자에 대해 캐묻고 “아직도 못 잊는 거 아니냐”면서 트집 잡았다. 그런 남편과의 성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아내가 성관계를 기피하는 날이면 남편은 더 강압적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손목을 비트는 정도의 완력을 썼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벽에 밀어붙여 목을 조르며 강제로 성관계를 하기도 했고, 바닥에 눕혀 팔을 뒤로 꺾고 하기도 했다. ㄱ씨는 “‘차라리 멍이 들도록 구타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래야 법적인 보호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ㄱ씨는 올 초 위자료 한푼 없이 도망치듯 이혼했다. ㄱ씨는 “결혼을 깨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참기만 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면서 “그 사람이 남편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 무력하게 당했을까 싶다”고 말했다. ㄱ씨는 자기 모멸감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폭언이나 협박만으로도 극심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지속되면 신체적 위해 못지않은 공포를 느껴 항거불능 상태가 되기도 한다.
전문직 여성인 ㅇ(34)씨는 결혼 7년차이다. 남편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인이다. 그는 결혼 이듬해부터 남편에게 ‘학대’를 당했다. 남 보기에는 멀쩡하고 자상해 보였지만 남편은 콤플렉스가 강한 사람이었다. 특히 분노 조절이 잘 안 됐다. 기분이 조금만 틀어져도 ㅇ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성관계 때에도 절정에 오르면 욕설을 퍼부었다. 남편의 불우한 성장 배경과 ‘욱하는’ 성미를 아는 탓에 그는 남편의 태도를 ‘나쁜 버릇’으로 치부했다. 대신 남편은 친정 식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잘했다.
자신이 겪은 일이 믿어지지도 않는다
아이를 낳으면 낳아지려니 했다. 그러나 늘 긴장된 상태에서 성관계를 해서 그런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은 ㅇ씨가 피곤에 지친 날이나 아픈 날에도 성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성적 집착이 강했다. 어느 날 조심스레 ‘부부상담’을 제안했다. 남편은 펄펄 뛰었다. “상담? 누구 인생 망치려고 해?” “쓰레기 같은 년, 너 같은 딸 낳으면 찢어버리겠다”는, 믿어지지 않는 폭언을 퍼부었다. ㅇ씨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 뒤부터 툭하면 식은땀이 흘렀고 숨이 막혔다. 송곳으로 가슴을 찔러대는 것 같은 통증도 자주 느꼈다. 남편이 소리를 지르는 날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남편은 폭언을 퍼부은 뒤에는 꼭 성관계를 시도했고, ㅇ씨는 넋 나간 사람처럼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산부인과를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차라리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았더니, 의사는 ㅇ씨에게 ‘불안장애’ 판정을 내렸다. ㅇ씨는 지난해 초부터 남편과 별거에 들어갔으나, 남편은 이혼에 응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증상이 ‘성폭행 후유증’과 비슷하다고 판단한 ㅇ씨는 법률상담을 의뢰했다. “명백한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고, 뚜렷한 물증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ㅇ씨는 자신이 겪은 일이 믿어지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 적나라한 부부강간 장면이 나온 영화 <적과의 동침>. 부부강간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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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센터 사업실천 연구모임은 지난 3월에 펴낸 <아내 성폭력>에서 “‘아내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동으로 거주하고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당했을 때에는 두려움과 공포에 찬 기억을 갖고 살아가지만, 배우자에게 당했을 때에는 그 ‘강간범’과 함께 살아가는 셈이다. 부부강간의 또 다른 특징은 가해자가 이런 행동을 통해 ‘관계’를 지속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결혼과 함께 성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동의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조차 ‘부부 문제’로 치부하거나, 심하면 ‘사랑의 한 표현’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혼을 전제로 별거 상태에 들어가서도 성관계 강요나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또 강제적인 성관계를 통해 배우자의 이혼 의지를 꺾으려 하기도 한다. 2000년 4월 남편의 폭력에 맞서 칼로 남편을 살해한 신아무개(당시 35살)씨의 사연을 보자.
남편 살해 사건으로 심각성 드러나
신씨는 구타와 폭력을 일삼던 남편과 이혼소송을 진행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따로 방을 구해 나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혼자 있는데 남편이 들이닥쳤다. 신씨는 부리나케 부엌칼부터 감췄다. 남편이 평소에도 칼로 협박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내가 놔줄 줄 아냐. 법적 이혼은 나와 상관없다”면서 주방용 가위로 신씨를 위협했다. 신씨는 도망치려다 가스레인지 삼발이로 머리를 마구 얻어맞고 머리채를 휘어잡힌 채 방으로 끌려왔다. 남편은 신씨의 옷을 찢어서 벗기고 자신도 옷을 벗었다. 그리고 성학대를 했다. 신씨가 거부하자 “죽이겠다”면서 가위를 휘둘렀다. 이 순간 신씨는 침대 밑에 치워뒀던 칼로 남편을 찔렀다.
이 사건은 ‘아내 성폭행’의 심각성을 일깨운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여성단체들은 “신씨의 행위는 정당방위였다”면서 구명운동을 벌였다. 신씨는 재판 과정에서 “내가 그러지(남편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신씨는 이런 사실이 정상참작돼 감형을 받았고, 형기를 마친 지금 폭력 피해여성을 위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부부강간 피해자의 심리는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에 견줘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내가 선택한 사람’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신연숙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인권국장은 “상담할 때조차도 (배우자에 의한) 성폭행 얘기는 잘 안 하려고 한다”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산 부녀 토막사건에서도 피해자가 1심에서는 얘기를 안 하다 2심에 가서야 성폭행 문제를 얘기했다”고 말했다. 신 국장은 “수치심과 굴욕감, 자괴감의 강도가 크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에 상담을 의뢰했던 피해자들은 “내 몸이 더러운 물을 버리는 시궁창 같았다” “죽을 것 같은 구타보다 더 치욕적이었다” “가계부에 당한 사실을 쓰기조차 두려웠다” “아이들 앞에 내가 죄인 같았다”고 말했다(<여성인권과 아내강간 토론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