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03월22일 제552호
범사에 감사하라, 군국 소년 한승조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그의 식민시대 찬양 발언에 “음메 기죽어” 하던 한국 우익들, 독도 문제로 “음메 기살어”를 외치고 있는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요즘 고려대 명예교수였던 한승조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축복이었다는 요지의 글을 일본 잡지에 기고했다 하여 세상이 떠들썩했다. 한승조가 공동대표 중 한 사람으로 있는 자유시민연대란 ‘시민단체’에서도 청년 회원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한승조의 회원 자격 박탈과 공동대표들의 동반사퇴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워낙 비판 여론이 거세다 보니 수구 진영 내에서도 그를 내쳐야 한다는 비교적 젊은 층의 요구가 있는가 하면, 지만원처럼 “한승조에게 돌 던지지 마라” 하며 나서는 이도 있고, 조갑제처럼 친일보다 친북이 더 나쁘다는 예의 소신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진짜 우익이 탄생할 것인가? 노!

한승조를 내놓고 변호하는 쪽은 우연인지는 몰라도 60을 넘겨 한승조와 함께 늙어가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독도 문제까지 터지고 보니 일본대사관 앞은 일본과의 단교를 주장하며 단지에 화형식을 거행하는 사람들로 그득하다. 뉴 라이트 내에서도 주도권 싸움이 한창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오른 쪽 동네가 시끌시끌한 모양이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게 운동사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속설인데, 지적 불임증에 걸린 우파가 좌파에서 사람을 많이 스카우트하다 보니 물들어서 그렇게 된 건지, 싸우면서 닮아가서 그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분열이 진보의 전유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는 보수단체 회원들. 수구세력은 독도 문제에 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잉 대응하고 있다. (사진/ 김진수 기자)

일부에서는 현재의 사태가 한국의 수구 진영의 분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다. 과연 이 땅에 수구가 분열하면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반대할 뿐 아니라 우리 내부의 일제 잔재와 친일 유산까지도 청산하려는 진짜 우익이 탄생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시청 앞에서 인공기를 불태우던 솜씨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능숙하게 일장기를 불태우는 낯익은 얼굴들에서는 물론이고, 한승조의 친일 망언을 규탄하는 자칭 ‘청년 보수’들의 자못 비장한 어조에서도 우익 탄생을 예감케 하는 빰빠라는 들려오지 않는다.

모름지기 보수나 우익이라면 ‘민족’을 내세우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고, 우익의 호소력도 그리고 문제점도 여기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그런데 한국에는 우익이 없다. 저들은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자기네 관심법으로 보기에 ‘빨갱이’임에 틀림없는 자들이 설쳐댈 때마다 비분강개하며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를 외쳐왔다(박재동 그림판에 보면 “우익이를 살려내라”라는 기막힌 만화가 있음- 삽화로 찾아볼 것). 그 부르심에 호응하여 나서는 자들이 들고 나오는 건 성조기였다. 광복절에 성조기 들고 나온 거야 마땅치는 않아도 그런대로 봐줄 수 있지만 3·1절 날 성조기 들고 나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칭 우익들이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내세워도 민족 문제는 내팽개치다 보니, 좌파나 진보 진영에서 태극기 두르고 나올 수밖에. 1980년대 이후 민족민주운동 진영 내에 이른바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로 나뉘어져 이론 투쟁을 벌여왔는데, PD 계열은 NL 계열이 민족 문제만 중시하고 계급적 원칙을 세우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런 PD 그룹조차도 신자유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국제 스탠더드’에 비춰본다면 엄청나게 민족주의적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어느 사회학자는 “조금의 과장이 허용된다면”이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한반도에는 사회주의자란 없고 있어본 적도 없다”며 한반도의 사회주의자란 “모두 민족주의자였고 또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이다”라고까지 주장한 바 있다.

독도 문제가 터지자 친일 잔재를 비롯한 과거 청산을 온몸으로 저지하던 낯익은 수구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독도 문제는 따로이 심각하게 다뤄야 할 내용이지만, 수구들의 대응에 국한해서 한승조의 말투를 빌려 이야기한다면, 수구들에게는 일본이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 ‘축복’이 될 수 있을까. 60년 전인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가 조선에 5년간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수세에 몰린 우익들에게 기사회생의 기회를 주었다. 해방 직후 우익이 좌익에 비해 정치적으로 열세에 놓인 결정적인 이유는 이념이나 계급 문제라기보다는 민족 문제였다. 적어도 1930년대 이후에는 국외는 몰라도 대중들이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우파보다는 좌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둘러싼 논쟁이 찬탁과 반탁의 대립으로 흐르면서, 민족 문제에서 엄청난 열세에 놓인 우익이 반격에 나서 일거에 불리했던 판세를 팽팽한 대결 구도로 바꿔놓은 것이다.

우익을 일으켜세운 반탁의 추억


△ "식민시대는 축복" 이라고 한 한승조씨. 그는 박정희가 총 맞아죽은 뒤 더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한 독특한 인물이다.

사실 친일 잔재를 비롯한 과거 청산이야말로 ‘국제 스탠더드’에서 본다면 보수우익들이 감당해야 할 주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해 막무가내로 훼방을 일삼다 보니 자칭 우파들의 처지가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승조의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자칭 우파들로서는 그야말로 “음메, 기죽어”의 상황이 된 것인데, 독도 문제가 터지자 이를 “음메, 기살어”의 기회로 삼고자 하고 있다. 친일 잔재 청산을 그토록 아까워하는 자들이 반일을 외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논리적으로 보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반일은 한국 친일파들의 전매품이었다. 친일파가 온전히 살아남은 이승만 시대가 가장 강력한 반일 정책이 시행된 때였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에는 지하에 계신 이순신 장군이 어리둥절해하실 정도로 갑자기 이순신 열기가 불어닥쳤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격 사망한 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연일 벌어진 시위는 지금보다 몇배나 격렬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일은 백범 김구의 반일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범은 반제국주의의 일관된 입장에서 민족의 이익을 중심에 놓고 그 이익에 적대되는 외세가 일본이라면 반일을 하고, 미국이라면 반미를 하고, 소련이라면 반소를 하는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우산 밑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들과 미국의 관계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거세게 반일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반일은 반미 없는 반일이었다. 냉전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한국의 우파들은 때로는 미국을 믿고 일본에 거칠게 대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냉전은 한반도에서만 계속될 뿐 국제 무대에서는 끝이 난 지 오래다. 너무 오래 냉전에 길들여진 탓일까? 여성계의 숙원인 호주제 폐지마저도 북의 책동으로 보는 수구세력은 왜 지금 일본의 극우파가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오는지를 파악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냉전의 종식과 한국 사회의 민주화, 그리고 북의 경제적 침체와 핵무기 개발 의혹이 일본 극우세력에게 어떻게 해서 기회이자 위기가 되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독도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한-일간에는 흥미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에도 지적했지만 새 것이고 헌 것이고 가릴 것 없이 한국의 자칭 우파들이 일본 극우파 따라하기에 몰두했던 것이다. 주체사상 받아쓰기에 여념 없었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룬 뉴 라이트들은 과거 청산 움직임을 ‘자학사관’이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자학사관이란 용어는 바로 악명 높은 후소사 교과서를 만든 자들의 특허품이 아니었던가? 그래 베낄 것이 없어서 일본 극우파의 자학사관이란 용어까지 베껴야 했던가? 일본 문물 수입하느라 정신없었던 개화기에는 그래도 번안소설이란 게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같이 제기되는 자학사관 비판 세력의 형성을 보면서, 한-일간에 우파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우려가 있었다. 독도 문제가 터진 것은 바로 이때였다. 영화 <넘버3>에서 한국 조폭과 일본 야쿠자가 모여 단합대회를 하려다가 독도가 누구 땅이냐고 따지다가 패싸움이 난 것은 이런 상황을 미리 잘 보여준 것이다. 일찍이 김종필이 한-일회담 교섭 과정에서 독도를 두고 ‘그까짓 바위섬, 차라리 폭파시켜버리자’라고 극언을 한 것도 일본이 맹주가 된 대동아공영권의 시대에서 미국이 맹주가 되는 태평양공영권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한-일 우파 연대를 향한 나름의 통찰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승조가 뒤늦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지만, 박정희나 김종필에게 일본은 남이 아니었다. 한승조가 한 말은 실상 박정희의 생각을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나는 한승조의 발언을 처음 접하고는 그의 나이를 따져보았다. 1930년생으로 해방 당시에 열여섯, 그는 요즘 일본에서 책으로까지 나온 ‘군국 소년’에 딱 들어맞는 나이였다. 그 자신이 쓴 <나의 시대, 나의 학문>이란 자서전적인 글에서 한승조는 “군국주의 시대에 가장 군사적인 중학”에 다니면서 “우리는 일본인이며 황국의 신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단단히 교육”받았다고 회고했다. 1930년생인 한승조가 소학교에 입학할 무렵 1917년생인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마치고 황국신민 양성의 사명을 띠고 소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학교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익숙”해진 군국 소년 한승조는 얄궂게도 지금은 미군 비행장이된 평택 비행장에서 지하 격납고를 만드는 중노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자학 사관'을 흉내내던 그들이

일제하에서 처음 징병 대상이 된 1924년생들을 두고 “묻지 마라, 갑자생”이란 말이 있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물어봐도 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만 20세가 되는 한승조 동갑들도 참 험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군국 소년에서 갑자기 좌우 대립의 격랑을 거쳐야 했고, 전쟁이 나자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했고, 운좋게 부역자 처벌을 면하고 미군 부대에 근무했으니 그가 나이들수록 사부로 모신 박정희만큼 숨가쁜 변신은 아니더라도 참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그 뒤 미국 유학을 하고 모교인 고려대 정외과 교수가 되어 그곳에서 정년 퇴직한 한승조, 그는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한승조는 유신 시대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한국적 민주주의 이론을 유신 이전에 가장 먼저 정립한 인물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총 맞아 죽은 뒤에 더 박정희에게 충성을 한 인물이다. 제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다 조상님 모시는 게 아니다. 박정희 같은 자의 제사에는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법이다. 그런데 한승조는 박정희 입장에서 볼 때는 ‘기특하게도’ 아무도 박정희를 거들떠보지 않던 전두환 시절에 박정희를 옹호했다고 한다. 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 주최의 강연회에서 “민정당이 박 정권·유신 체제를 부정, 극복한다고 설쳐대고 있으나 박정권을 비판, 부정한다면 유신 체제에 피나게 투쟁해온 재야 세력이나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을 일이 아닌가. 박 정권과 저항, 투쟁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왜 “박정권을 계승, 발전시키는 가운데 잘못된 일, 미흡한 측면만 개혁”하지 않고 “새 시대가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식의 자세”를 보이느냐고 말했다가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한다.


△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일시위. 당시의 반일시위는 지금보다 몇배나 격렬했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박정희가 죽은 뒤 학원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면서 고려대 내에서도 유신 시절의 어용 교수들의 행각을 조사했는데, 그는 좋은 자리를 노려 권력에 빌붙은 어용 교수가 아니라 소신을 갖고 유신을 지지한 유신 교수로 분류됐다고 한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 과거 어용 교수들은 모두 꼬리를 내리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던 사람들은 모두 민주화운동 열심히 한 것처럼 행세하던 때에 그는 자신의 한국 정치 분석이론에 따라 유신을 옹호하는 대자보를 붙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승조의 제자가 그의 정년 기념 논문집에 서문으로 쓴 글을 보면 “모든 교수들이 학생들 앞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당에 유독 선생님이 보인 당당한 자세가 학생들을 놀라게” 하였고 “학생들은 선생님다운 선생님을 만났다고 존경의 염을 감추지 못했다”고까지 했다. 학생들 입장에서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상황에서 대자보까지 붙이는 그를 보고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하고 기막혀했을 것이다.

언젠가 모 명문 대학의 총장선거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권력을 잡은 군인 아저씨들은 자기들 부족한 점을 치장하느라고 말깨나 하고 글깨나 쓰는 대학 교수들을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모셔갔다. 그러니 명문대의 이른바 잘나가는 과에서는 정년 퇴임을 하는 교수를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과에서 정치권에 불려가지 않고- 불렀는데도 안 갔는지 님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학교를 지킨 어떤 노 교수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총장 선거에 나섰다가 떨어졌다. 패자쪽 주변에서 들리는 말로는 경쟁 후보 진영에서 “얼마나 무능하면 저 나이가 되도록 팔려가지 않았겠느냐”며 흑색선전을 해댄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고 한다.

한승조, 독특한 유신 지지의 소신

그가 무능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유능하고 개성이 강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누구보다 확실히- 그리고 세련되게- 유신과 군사독재를 옹호했으면서도 한자리하지를 않았다. 박정희 덕에 수많은 정치학 교수들이 유정회 의원 감투를 쓰고 유신의 나팔수가 되었지만, 그들 중에 1987년 이전에 박정희를 옹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흔한 ‘멍첨지’(개도 쓴다는 첨지 감투) 같다던 유정회 국회의원 한자리 차지하지 않았던 한승조는 소신을 갖고 박정희를 변호했고 유신을 옹호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때는 김영삼 진영에서 가깝게 자문을 받고 있는 교수 몇 사람 중에 이름을 넣어 발표했는데, 그는 신문윤리위원회에 제소해소 정정보도가 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몇몇 분들은 한승조가 노년에 들어 커밍아웃을 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번 한승조 파동이 자발적인 커밍아웃이라기보다는 등 떠밀려 한 아우팅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해방 뒤 남쪽에 반공우익 국가가 성립된 것은 우익이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좌익의 자살골 때문이었다고 일갈한 한승조, 그가 이번에는 대차게 자살골을 넣었다. 그러나 자살골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정신적 아버지인 박정희에 대한 청산이 막 이루어지려는 상황, 평시에는 우아 떨던 이야기가 대차게 나갈 수밖에 없다.

이번의 자살골에도 감사할까?

돌이켜보면 그는 박정희 학교의 반항아적인 우등생이었다. 공부는 잘하지만, 성격은 삐딱해서 선생님과 잘 어울리지 못한 학생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와 동년배인 미국 정치학 박사의 상당수가 미국에서 배운 이론을 적당히 버무려 한국에 소개하는 데 그칠 때 나름대로 한국 정치 한 주제를 잡고 파고들었다. 그는 유신 2년 전에 한국의 민주정치는 구미 사회의 자유민주주의와는 똑같을 수 없으므로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승조나 박정희가 한국의 현실을 중시한 민족주의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나도 미국 학생과 민족 중흥의 기치를 내건 박정희가 민족주의자인가 아닌가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단서를 달아 박정희가 민족주의자라는 데 동의했다. 박정희는 백범과 같은 저항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일본식 부국강병형 민족주의자였다. 군국 일본의 군인이자 교사였던 박정희나 군국 소년 한승조는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서양식 민족주의가 한국 풍토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박정희의 입장은 사실 1920년대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뒤엎고 군국 일본을 건설한 자들이 보인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속에서 천황제 등 일본적인 것을 찾았던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한승조의 논리는 곧 박정희의 논리였고, 그리고 일본 우익의 논리였다. 그러나 일본 우익은 제 민족을 노래하는데, 한국 ‘우익’은 기껏해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공산주의자는 전향하면 천황폐하의 품에 안기면 되지만,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전향하면 민족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벽을 없애려는 것이 내선일체였다. 내선일체에 걸림돌이 되는 독도는 폭파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논리요, 김종필의 논리였다. 똑같은 논리를 펴지만, 귤이 회수를 경계로 귤이 되고 탱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일본은 애국자들이 망쳤고, 한국은 매국노들이 망쳤다는 어느 일본인의 말은, 친일 청산을 못한 채 살아온 우리들에게 주는 고언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기독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제자가 쓴 ‘한비어천가’에 따르면, 그는 범사에 감사한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왔다고 한다. 전환기의 역사에 살아왔다는 점에 감사하고, 일제의 강점기조차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그것도 35년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에 감사하고, 해방 뒤 밀어닥친 혼란과 전쟁 그리고 독재 등도 민족 성장에 일단 도움이 되었던 점에 감사한다는 한승조. 군국 노인 한승조는 노무현 정부의 출현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번의 자살골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