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을 위한 국민적 동원운동에 과학을 포함시킨 박정희 정권의 한계
▣ 김동광/ 고려대 강사·과학사회학
박정희의 과학기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었을까. 이에 관한 단초는 1973년 1월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날 박정희는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 시대에 들어갔다”면서 “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된다. 이것은 국민학교 아동에서부터 대학생, 사회 성인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가 전부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밝혔다.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은 넓게는 박정희가 내세운 유신이념의 구현을 위한 계획이었고, 좁게는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 성장 정책의 일환으로 70년대에 새롭게 수립된 중화학공업 육성 발전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 확충이 그 목적이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이용
전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개발 계획을 위한 국민적 동원운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 시기의 과학화는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국한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었다. 그것은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는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슬로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경제 건설을 북한과의 체제 경쟁과 결부시키고 북한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통해 체제 안정을 꾀했던 기본적인 구도와 일맥상통한다. 이 구도에서 전국민은 기술을 갖춘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야 했다.

△ 과학화 운동은 경제개발 계획을 위한 국민적 동원 운동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한 통조림 공장 연구실 모습. (사진/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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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경제 성장과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를 강조했다. 이 두 가지 이념은 서로 긴밀히 결부되면서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에서 전국민의 과학화라는 구호는 북한이 내세웠던 ‘전국토의 요새화’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통했다. 박정희는 경제 개발과 체제 경쟁을 패키지로 묶어 ‘조국 근대화’라는 성전을 제창하고, 이 성스러운 과업을 위해 과학기술을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과 기능을 습득해서 조국 근대화와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국민적인 사명이요 과업”이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전국민 과학화 운동이 처음부터 유신이념과 새마을운동과 결부되어 제창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에 따라 과학화는 지배이념의 확산이라는 중대한 목적의식을 띠고 국가의 주도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 국민은 ‘유신과업 완수’를 위해 수동적으로 과학지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아가 박 정권은 과학 대중화를 정신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시키려 했다.
흔히 돌진적 근대화라고 불리는 박정희 정권의 일련의 개발정책은 우리 근대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정치·경제·문화의 다양한 측면에서 독재 정권이 일방적으로 강요한 근대화 과정의 문제점이 지적되었지만, 유독 과학기술에 대해서만은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큰 지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영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에 제창된 전국민 과학화 운동은 과학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과학계몽의 의미, 과학과 사회의 관계 등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형성과정의 거의 모든 측면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처럼 과학화는 국가에 의한 과학의 동원 체제였다. 여기에서 동원되는 대상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과학 자체와 과학기술자들이 국가에 의해 동원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국가적 유신 과업의 일환으로 과학화를 위해 동원되었다. 과학은 조국 근대화를 위한 중공업 육성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 그리고 유신 체제의 공고화라는 다중적 목적을 위해 유효적절하게 동원되었고, 이 과정에서 과학 대중화와 과학 계몽은 국가가 독점하는 일종의 전매품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과학계에서 국가주의 혹은 애국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박정희 정권의 전국민 과학화 운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성스러운 과업을 위해 과학기술을 동원했다. 과학회는 중화학공업의 육성 발전을 위한 인적·물적 기반 확충이 목적이었다. 울산의 정유공장 모습. (사진/ 정부기록사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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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박정희 시대에 수립된 동원 양식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면서 과학 대중화와 과학계몽의 지배적인 접근 방식은 민간 부문에까지 통용된다. 물론 박정희의 과학화 운동은 70년대 이후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을 오로지 경제 성장과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한정시키면서 엘리트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들은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락했다. 정부가 ‘과학 문화’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97년이었다. 또 과학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지나치게 강화되어 과학기술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다양한 가치나 관점이 소통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낳기도 한다.
왜 우리 과학은 애국주의적인가
다원주의 시대에 국가가 독점적으로 과학기술을 관리하고 그 가치를 규정하는 국가주의는 오히려 과학기술의 균형적 발전에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 몇해 전부터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의 근본 원인 중 하나도 과학기술에 제한된 가치만을 부여하려는 국가주의의 편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이후 수립된 ‘과학기술기본법’은 비로소 과학기술을 사회문화 속에서 폭넓게 접근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70년대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 시민사회의 다양한 가치체계와 소통하는 과학을 만들어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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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 박사를 아시나요.”
요즘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개편 논란을 지켜보며 양동열 교수(기계공학)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는 1978년 8월 카이스트의 전신인 ‘카이스’(KAIS·한국과학원) 1호 박사다. 당시 두명이 학위를 받았는데 ‘가나다순’이 앞서 영예를 안았다. 카이스는 산업화를 뒷받침할 고급 과학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국내 최초의 연구 중심 특수대학원으로 1971년에 설립됐다. 하지만 신입생을 뽑은 것은 2년 뒤였다. “3월에 100여명의 학생이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하지만 교수가 충원되지 않고 연구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9월이 돼서야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카이스는 연구 여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우리 산업에 접목할 과학기술을 육성하려고 국가 주도형 과학기술 정책에 따라 과학기술처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공계 일반 대학의 교수진은 상당수가 석사 학위를 마친 상태에서 교수에 임용된 뒤 박사 학위를 취득한 ‘구제(舊制) 박사’였다. 이에 비해 카이스의 교수진은 외국에서 정식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 채워졌다. 교수 1인당 연구용 기기 도입가액도 일반 대학보다 서너배는 많았다. 이런 여건에서 학위를 취득한 까닭에 양 교수는 ‘신제(新制) 박사 1호’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1960년대까지 국내의 과학기술 연구는 없다시피 했다. 과학기술 정책은 경제정책의 보조 수단으로 여겨졌다. 즉, 공업화 정책에 따른 기술인력의 확보나 정부의 기업에 대한 지원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1960년대 경공업 위주의 경제구조에서 과학기술이 끼어들 여지도 많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일찍 유학을 떠난 과학 연구자들이 국내에 복귀하는 일이 드물었다. 설령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들어와도 국내에 필요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1960년대는 과학기술 관련 시스템을 조성하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에 정부출연연구소의 모태인 ‘키스트’(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돼 적정 선진 기술을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량해 산업계에 이식할 수 있도록 했다. 초대 소장을 맡았던 최영섭씨는 1967년 발족한 과학기술처 장관에 1971년 취임해 7년6개월 동안 재직하며 과학 입국의 뼈대를 세웠다. 1968년에는 ‘과학의 날’이 제정되고, 1972년에 과학기술후원회가 과학기술진흥재단으로 확대 개편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 골격이 마련되면서 산업현장과 과학기술의 연계가 모색됐다. 1971년에 마련한 과학기술 정책 기본 방향에는 △과학기술 기반의 조성 강화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기술 풍토 조성 등이 제시됐다. 당시 선박·전자기술·해양개발·기계금속·화학 등 5개 분야가 전략산업 기술연구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1970년대 초반에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1972년 9월 당시 오원철 경제수석은 ‘원자 핵무기 개발계획’을 보고한 뒤, 한국 원자력연구소가 프랑스 생고뱅사에 의뢰해 1974년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계서를 확보한 바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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