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02월02일 제546호
[그때 그사람들] ‘채홍사 박선호’는 영화와 달랐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 관람한 전 동아일보 기자 김재홍의 10·26과 12·12 취재이야기

▣ 김재홍/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전 <동아일보> 기자


<그때 그 사람>은 1978년 문화방송이 주최한 대학가요제에서 심수봉이 불러 히트한 노래다. 구성지다고 하면 구성지고 청승맞다고 하면 청승맞은 것 같은 곡조와 가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신문기자 초년생이었다. 정신없이 뛰던 시절이라서 연예가에 관심 쓸 여가가 없었지만 거리에서 그런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꽤 유행을 탔던 것 같다.

군사재판 녹음테이프를 입수하는 행운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는 실연당한 여인의 회상조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다음해의 10·26 사건을 예언이라도 한 것 같은 가사 내용이다. 10·26 사건 당일 궁정동 비밀 연회장에 함께 있었던 심수봉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10·26을 소재로 한 영화의 제목으로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감상한 느낌은 좀 복합적이다. 큰 맥락에서 보면 정치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당시 국민들이 볼 수 없었던 베일 뒤에서 최고권력자들이 어떤 놀음을 벌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독재권력자들의 겉과 속이 어떻게 다른지 비밀스런 모습들을 드러내는 영화다. 일반 국민들은 26년 전의 사건을 지금 보아도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놀랄 것이다. 영화에 담긴 사건과 상황의 큰 흐름은 사실과 부합된다고 본다. 다큐멘터리로서 문제가 없다.


△ 현장검증에 나선 박선호(왼쪽)와 김재규. (사진/ 보도사진연감)

그러나 사건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성격 묘사는 실제와 좀 거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너무 무거운 주제여서 일부러 가벼운 터치로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또 정치권력에 대한 전반적인 희화화와 패러디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다 해도 주인공에 대한 성격 묘사가 거꾸로 된 듯한 느낌마저 주는 것은 창작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다큐로서 감점이다. 대표적으로 영화 속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한석규 역)은 실제 인물 박선호를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격 묘사는 거의 거꾸로다.

1993년 4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이 신문에 ‘군-어제와 오늘’이라는 다큐멘터리 기획연재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번씩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야심작이었다. 10·26과 12·12를 취재하다가 나는 군사재판 전 과정에 대한 녹음 테이프를 복사해 갖고 있던 사람을 만났다. 그는 10·26 당시 계엄사 법무장교로 카세트테이프는 60여개였다. 그는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실제 한 방송사를 노크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출판하고 인세 중 일부를 떼어주기로 계약했다. 모든 테이프를 손에 넣으면서 쾌재를 불렀으나 그것을 정리하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다.

재판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가장 정밀한 검증 과정이다. 비공개 진술들을 포함한 군사재판의 이 녹음 테이프야말로 10·26 사건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26 당시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는 영화처럼 건들거리고 빈정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의 이력과 군사재판에서의 답변 태도, 최후진술 등이 그 근거다. 그는 예비역 해병대 대령 출신으로 해병대학에서 수석 졸업할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 중 진급이 가장 빨랐던 만큼 성실하고 충직했다.

대통령의 비밀 연회장에서 술과 여자 조달을 맡아 그는 ‘채홍사’로 불렸다. 법정 진술에서 그는 매우 고민했으나 조직과 상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 일을 계속했다고 토로했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더 이상 안 하려고 사표를 냈으나 부장님이 자꾸 자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박정희와 김재규, 시저와 브루투스

또 하나 미흡하게 느껴지는 것은 영화가 지나치게 당일의 사건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 자체는 긴박하게 잘 그렸지만 무언가 긴 이야기를 중간 부분만 끊어낸 것 같은 느낌이다. 정치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인 만큼 그 배경과 원인, 그리고 의미에 대해서 나름대로 짚었으면 싶었다. 이 영화만 보아서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곧 대통령의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이 왜 대통령을 권총으로 쏘았는지가 납득되지 않는다.


△ 실제 박선호는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모습과 달리 성실하고 충직했다.

사실 김재규와 박선호를 비롯한 사건의 주역들이 거사를 행동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시간에 걸쳐 고민하고 결심하는 과정이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에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마치 로마제국의 최고권력자 시저를 그의 양아들이라던 브루투스가 살해한 것처럼 사건 나름대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칼로 찌른 뒤 이렇게 외쳤다.

“나는 시저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시저를 죽였다.”

김재규의 법정 진술들을 종합하면 브루투스의 웅변과 비슷하다. “대통령 각하(박정희)와 자유민주주의는 함께 존립할 수 없다. …한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았다.”

김재규를 어떻게 브루투스에 비견하느냐고 반대한다면 박정희도 시저와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정치사적 의미는 비슷한 사건이었고 관련 인물들의 인연도 매우 유사했다. 실제 김재규의 변호인들은 그를 ‘김 장군’이라고 호칭하면서 브루투스에 비유했었다.

1979년 10월27일 새벽. 나는 하숙방 이불 속에 있었다. 전날 저녁 동료 기자들과 마신 소주 기운에 몸이 좀 무거웠다. 그런데 마루에서 전화 받으라는 소리가 들린다. 회사 데스크였다.

“지금 무엇하고 있어. 빨리 회사로 와.”

“아, 지금 아직 새벽인데요, 무슨 일 났습니까.”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신문인지라 출근이 빨랐지만 그래도 갈 시간은 아니었다.

“이 사람아, 지금 대통령이 유고인데, 방송도 안 듣나. 빨리 나와.”

유고라니, 나는 무슨 일인지 상상도 못하고 신문사로 나갔다. 이른 시간인데도 편집국 간부들이 출근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는 없었고 추측만 오갔다. 그 시각엔 이미 김재규가 국방부에서 육군 헌병대에 체포된 뒤였지만 그런 정황은 일절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대통령 유고’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안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국민들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10·26 사건의 후폭풍으로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려는 군사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자라난 정치군인들의 비밀 사조직 하나회가 후계 정권 찬탈에 나섰다. 이들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했다. 이어 1980년 4월 이른바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초헌법 기구를 조직했다. 뒤에 사법부는 이때부터 전두환·노태우 소장을 비롯한 하나회 집단이 내란에 들어갔다고 판결했다.

하나회, 정규 지휘계통을 진압하다

내란 집단은 군부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5·17 전국계엄 확대 조치를 단행했다. 당시 야당 지도자로 ‘서울의 봄’을 주도한 김대중씨와 그 동료들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했다. 이에 광주 지역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저항 행동에 나섰다. 10·26의 후폭풍이라 할 수 있는 12·12 군사반란과 5·17은 동일한 정치장교 집단, 하나회가 저질렀다.


△ 1979년 10월27일 토요일자 <동아일보> 1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알리고 있다.

1979년 12월12일 오후 6시 반.

겨울날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경복궁에 수도권 부근의 군 실력자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위병장교는 수도경비사 예하 30단장 장세동 대령의 특별지시로 이들을 깍듯이 모셨다. 이들은 모두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의 초대 손님이었다.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과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이 먼저 들어섰다.

다음으로 하나회 장성들이 나타났다. 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이다. 이들은 10월 중순 부산과 마산 시민항쟁을 진압하러 현지에 투입됐다가 10·26 사건 직후 급거 서울로 돌아왔다. 하나회의 핵심들로 그 다음해 광주시민항쟁에 투입돼 살상 진압을 지휘한 장본인들이다.

전두환 소장과 동기생인 노태우 9사단장은 그의 직속 상관이던 1군단장 황영시 중장을 모시고 약간 늦게 왔다. 박준병 20사단장도 뒤따라 왔다. 이들은 경복궁의 30경비단장실에서 반란의 시나리오를 짰다.

12·12 군사반란은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정규 지휘계통을 사조직인 하나회 장교들이 총격전으로 무너트린 사건이다. 정규 지휘계통은 정승화 육참 총장을 위시해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그리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등이었다. 이들을 보안사와 특전사의 하나회 장교들이 유혈 총격전으로 체포한 것이다. 그 하나회의 행동대장들이 공수여단장인 박희도·최세창·장기오 준장과 보안사의 허삼수·허화평 대령, 수도경비사의 장세동·김진영·조홍 대령 등이었다. 이들이 뒤에 5공과 6공 정권의 실세 노릇을 톡톡히 한 것은 물론이다.

박정희 시대엔 독직 부패가 적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고 그 다음날부터 광주시민들의 시위행동이 벌어지자 특전사 소속 하나회 행동대장들은 또다시 그곳으로 투입된다. 그들은 거기서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비극을 연출했다.


△ 1979년 12월 군사재판으로 진행된 1심 선고공판에서 김재규를 비롯한 피고인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깁재규와 박선호는 1980년 5월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내가 미국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첫 학기에 들어가 있던 1995년 초겨울, 한국 뉴스가 연일 미국 신문의 톱을 차지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관한 보도였다. 이를 계기로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가 세미나를 개최했다. 나는 미국 연구자들이 박정희 시대엔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비해 독직 부패가 적었다고 말하는 걸 보고 놀랐다. 또 경제성장에 관한 한 박정희 정권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미화 일변도였다.

나는 해외 연구자들의 역사 왜곡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반론을 폈다.

“한국 국민이 일제 식민통치 종식 이후 15년 이상 교육받은 시점인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알았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서구 국가들과 같은 번영을 열망한 것이다. …한국의 경제 기적은 군인정치인의 독재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박정희 체제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져 32년간의 군사정권을 기록했고 매우 좋지 않은 정치 문화를 남겼다. 비타협적인 저항과 불복종, 그리고 분열적인 문화가 그것이다. 이는 민주화와 공동체 발전에 필수적인 협력과 통합의 토양을 말살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정치 문화가 10·26 사건 이후 세대교체를 통해서도 질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