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02월02일 제546호
[키워드 4 - 건전가요] 너도 나도 일어나 병영국가 가꾸세~

억지로 유포된 희망, 건전가요의 전성시대…공화당 시대에는 대중가요풍, 유신시대에는 군가풍

▣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ymlee@knua.ac.kr

박정희는 노래를 아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박정희만큼 노래와 관련된 일화를 많이 남긴 대통령은 여태껏 없다. 그는 금지곡 지정, 대중가요인 구속을 남발했고 노래 잘못 부른 가수를 군에 징집하기도 한 반면(김민기냐고? 아니다. 조영남이다), 노래를 장려하고 스스로 노래를 지어 전국민에게 가르쳤고 심지어 절명하는 그 순간까지도 노래와 함께 있었다.

‘불건전 가요’ 싹쓸이, 트로트 타격

건전가요란 용어도 박정희 시대에 대중적으로 유포되었다. 물론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이 용어는 있었지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같은, ‘건전’이란 말이 민망할 정도로 살벌한 노래들의 시대였다.

‘건전’ 가요의 진흥은 ‘불건전’ 가요의 싹쓸이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수순이다.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가요정화 조치’를 내린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정화’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과시하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1961년, 서울의 대중가요인들은 그저 위축되는 정도였지만, 지방의 이름 없는 악극단 가수와 코미디언들은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설상가상 1961년 한국방송 TV개국으로 방송국을 중심으로 무언가 건강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일제시대부터 울고 짜고 뽕짝뽕짝하는 노래들이 배척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악극은 급격히 몰락했고, 트로트 가요 전반이 크게 타격받았다. 1960년대 이봉조, 길옥윤 등 이른바 팝 계열 대중가요로의 세대교체는 가요정화 조치로 트로트 계열의 급격한 위축에 힘입은 것이다. 이렇게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대중가요사의 한획을 크게 그었다.


△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마자 ‘가요정화 조치’를 내린다. 1965년 10월27일 삼익악기 공장에서 기타를 조립하고 있다. (사진/ 정부기록사진집 6권)

박정희 시대가 공화당시대와 유신시대로 크게 나뉘듯, 건전가요도 두 시기는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공화당시대는 대중가요풍 건전가요, 유신시대는 군가풍 건전가요의 시대였다.

정부의 부채질과 그에 부응한 방송계, 이에 알아서 긴 대중가요계는 1960년대를 건전가요의 전성시대로 만들었다.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우리 마을 살기 좋은 곳 경치 좋고 인심 좋아(1963, 한명숙 <우리 마을>)

팔도강산 좋을시고 딸을 찾아 백리길… 잘살고 못사는 게 팔자 탓이 아니더라 잘살고 못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더라(1967, 최희준 <팔도강산>)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1969, 패티김 <서울의 찬가>)

이러한 노래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정부의 구체적 지시 여부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직업인이라면, 이런 노래를 지으면 방송 출연에 유리하다는 것쯤은 머리 굴려볼 수 있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이들 노래가 적잖이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방송을 통한 학습효과는 당연히 있었겠지만, 한편 이런 노래들이 유포하는 ‘희망’에 대해 당시의 대중들이 적잖이 ‘동의’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5·16혁명 1주년 기념예술제에서 처음 불린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는 의뢰로 만들어진 노래가 분명하지만, 지지리도 못살았던 대다수 국민들의 절절함이 깃들어 있다. 게다가 곧이은 경제개발 정책은 공화당시대를 희망찬 노래들의 시대로 만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사랑노래더라도 명랑한 노래가 많고, 군인을 노래하더라도 대중가요스럽게 재미있다.

서울의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 서울의 아가씨는 맘 좋고 슬기로워… 남산의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1962, 이시스터즈 <서울의 아가씨>)

뜰 아래 반짝이는 햇살같이 창가에 속삭이는 별빛같이… 비바람이 불어도 꽃은 피듯이 어려움 속에서도 꿈은 있지요(1971, 정훈희 <꽃동네 새 동네>)

신병 훈련 육개월에 작대기 두개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신나는 김일병 (헤이 부라보 김일병)… 신나는 휴가 때면은 서울의 거리는 내 차지 나는야 졸병이지만 그녀는 멋쟁이(1967, 봉봉사중창단 <육군 김일병>)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야 돌아왔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1969,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어떤 노래가 건전가요고 어떤 노래가 보통가요일까? 공화당시대는 이것이 잘 구별되지 않는 때였다. 특히 1960년대 초·중반까지는 “잘살아 보세”의 약발이 먹힌 것으로 보이는데,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개발 드라이브의 부작용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미자와 배호의 서글픈 목소리가 다시 인기 절정을 누리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 대중가요계는 1960년대를 건전가요의 전성시대로 만들었다. 왼쪽부터 전성기 때의 이미자, 김추자, 어니언스.

그러나 유신시대는 다르다. 박정희는 당 중심의 정치를 포기하고 대통령이 이끄는 병영 같은 사회를 요구했다. 이제 국민대중의 동의 절차는 필요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건전가요가 구태여 대중의 인기를 얻을 필요도 없어졌다. 대통령 보기에 훨씬 더 ‘건전한’ 노래를 온 국민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백두산에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에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 무궁화꽃 피고져도 유구한 우리 역사/ 굳세게도 살아왔네 슬기로운 우리 겨레(<나의 조국>)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새마을 노래>)

이 두 곡은 박정희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유신시대 내내 학교와 직장에서 부르게 했으며, 매일 방송이 시작될 때 애국가 다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두 노래를 보고 있으면 박정희가 거쳐온 두개의 직업이 고스란히 보여 웃음이 난다. <나의 조국>은 전형적인 일본 군가풍으로 일본군 출신의 취향을 보여준다. 왜색을 따진다면 이 노래는 선두에 선다. <새마을 노래>는 계몽적 학교 창가풍이다. 그가 사범학교 출신이란 걸 생각하면 이 감수성 역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유신시대의 건전가요는 이런 것들뿐이었다. 세상은 모두 군대식이었다. 학교에서는 거수경례 때 ‘멸공’ 구호를 외쳤고, 체력장의 던지기에서는 공 대신 모조 수류탄을 던졌다. 여학생 체육에서도 사격을 권장했는데, 바로 내가 중학교 때 칼빈소총으로 사격을 배웠던 세대이다. 학생회도 없이 학도호국단 체제로 재편된 학교에서는 군가풍 <학도호국단가>를, 새마을수련원에 가면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네” 같은 노래를 손뼉을 두드리며 불러야 했다(못산다는 것을 인정한 <잘살아 보세>에 비하면 얼마나 억지스러운가). 흥미롭게도 1980년대 5공화국에서는 다시 대중가요풍 건전가요로 바뀐다. 유신시대처럼 강압적일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프로야구와 컬러TV로 대표되는 새로운 대중문화 정책을 폈고 당연히 건전가요도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나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같은 대중가요풍으로 회귀하게 된다.

포크와 록을 하던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유신 체제에서 살아남으려고 성의를 보였건만, 본격적인 긴급조치 시대로 들어서기 시작한 19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이들은 가차 없이 처단당했다. 이 대마초 사건은 1970년대 전·후반기를 가르는 기점을 이룬다(박정희는 정말 대중가요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던 그는 1979년 10월, 왜색의 잔재가 적지 않은 <그때 그 사람>을 들으며 유명을 달리했다. 그때 대학생들은 술집에서 <나의 조국>을 개사하여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0월유신 없었으면 이 나라 망했겠네 길이길이 보전하여 큰딸에게 물려주세”로 부르며 끓어오르는 젊은 피를 노래로 달래고 있었다.


굴욕외교의 희생양 <동백 아가씨>

이미자의 최고 히트곡 <동백 아가씨>는 1965년 왜색가요로 찍혀 방송이 금지되고 1968년 음반 발매가 중단됐으며,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금지곡에서 풀려난다. 과연 <동백 아가씨>는 왜색인가?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라시도미파’의 독특한 단조 5음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 곡이 금지곡이 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도로 금지된다면, 일제시대의 트로트 가요는 모조리 금지돼야 한다. 박정희가 가장 좋아했다는 <황성옛터>도, 반공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쓰여 국민가요가 된 <눈물 젖은 두만강>도 당연히 금지돼야 한다. 심지어 박정희 스스로 지은 <나의 조국>이야말로 왜색 아닌가.

<동백 아가씨>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제스처의 희생양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63년에 발표된 <동백 아가씨>에 금지의 철퇴가 떨어진 시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은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얻어낸 채 일본과 수교를 강행했고, 대학생들은 ‘굴욕적인 한-일 수교 반대’를 외치며 매일 데모를 했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자신들이 민족적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과시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동백 아가씨>가 재수 없게 선택된 것이다.

대중가요는 대중적 파급력이 높지만, 대중가요인은 힘없는 만만한 존재이다. 누르거나 때려도 저항하지 않으며, 특히 학력 등 문화자본이 상대적으로 약한 트로트 계열의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동백 아가씨>는 당시 인기 절정의 대중가요인데다, 선율은 물론이고 전주 부분의 기타 연주까지 일제시대의 엔카 스타일 그대로였다. 대중가요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왜색이라는 근거 논리를 제공한 고급음악인들에게 수십년 동안 분노를 터뜨렸다. 박정희는 노래를 정치에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