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5년02월02일 제546호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그때 그 유족’들은 어디에…

김재규씨 부인 김영희씨가 부하들 자녀 학비지원 뒷바라지… “DJ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아”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10·26 사건의 유족들은 그들의 남편처럼 끈끈한 의리로 20여년의 세파를 견뎌왔다. 유족들은 10·26 직후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김재규 부장의 사촌 남동생은 보안사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김 부장은 물론 그의 부하들도 사형 선고와 함께 재산을 몰수당해 유족들은 생계 위협을 받기도 했다.

‘신학과’선택한 자녀들

김 부장의 부인 김영희씨는 남편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내던진 부하직원 자녀들의 학비를 대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김재규장군명예회복추진위원회’(추진위)에 따르면 당시 학생이었던 자녀들은 김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박선호 과장의 네 자녀 중 큰딸과 큰아들은 자신의 꿈을 접고 신학대에 진학했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큰아들은 치과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신학대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현재 서울 강남의 한 대형교회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다.


△ 김재규 피고의 상고심 확정공판정에 나온 부인 김영희씨와 가족들. 그는 부하직원 자녀들의 학비를 대는 등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사진/ 연합)

10·26 당시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던 박 과장의 큰딸은 이 사건 직후 신학대로 편입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서울대 법대 출신의 ‘긴급조치위반사범’을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그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 유학을 마친 뒤 국내에서 살고 있다.

유족들은 10·26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한 가톨릭계의 도움으로 구명운동에 나설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 부장의 사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 부장 외동딸의 시아버지가 김수환 추기경과 친분이 있어서 가톨릭계의 도움을 이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구명운동은 탄력 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할 정치권 인사들이 동참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강신옥 변호사는 “10·26으로 연금에서 풀려난 DJ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며 “오히려 그의 측근은 ‘대통령을 죽였으니까 당연히 사형시켜야 된다’는 망발을 했다”고 회상했다. 강 변호사는 “당시 DJ와 YS는 대통령이 되려는 꿈에만 부풀어 있었다”며 “잘못된 욕심 때문에 결국 두달여 뒤에 다시 곤욕을 치르게 됐다”고 꼬집었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유족들의 반응은 다소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추진위 관계자는 “유족들은 영화가 제작되지 않기를 바랐다. 영화가 개봉되더라도 볼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영화 제작자들은 철저한 고증 작업을 거쳤지만, 유족들을 접촉하지는 못했다. 추진위는 김 부장 등을 재해석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김재규 재해석한 다큐 준비

한편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위원회)는 지난해 12월20일 분과위원회를 열어 김 부장에 대한 민주화 유공자 인정 여부를 논의했으나, 위원들간의 팽팽한 이견으로 견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날 토론에서는 10명 위원 중 찬성·반대가 각각 5명으로 나뉘어 보류 결정이 내려졌다. 강 변호사는 “10·26이 권력 다툼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논리가 아직도 팽배해 있다”며 “10·26이 없었다면 민주화는 그만큼 더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