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에 봉인된 의문사들… 개별적인 진상규명은 한계, 과거사청산법 등으로 접근돼야
▣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는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 박 전 대통령이 ‘엔카’를 부르고, 여색을 밝히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 등을 이유로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사자(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게 이유다.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거들었다.
그러나 정말 ‘죽은 자의 명예’를 거론해야 할 사람은 정작 다른 곳에 있는 듯싶다. 바로 박정희 정권 18년 치하에서 죽은 사람들과 그 유가족, 동료들이다.
특별감옥, 789명-200명=어디로?
“박정희 정권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상대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을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실천에 옮겼다. 고문하고 때려 죽이고, 찬바람에 얼어죽게 방치하고, 단식하면 강제로 밥을 먹이다 죽이고, 고통을 못 견뎌 자살하도록 몰아가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향하면 약을 주겠다’고 강요하며 죽도록 내버려두고….” 1월28일 서울 동대문의 뒷골목 허름한 다세대주택 2층에 자리잡은 ‘통일광장’. 분단 시대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낸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터에서 만난 임방규(74)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전향 공작’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꼬박 32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상고심 판결에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들을 적용한 원심에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판결로 사형이 확정된 8명에 대해 판결 17시간 만인 4월9일 형을 집행앴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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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인 김영승(71)씨는 유신체제 선포 이후인 1973년 중앙정보부, 법부무 등이 합동전담반을 편성해 대대적인 전향 공작을 전개한 ‘대탄압 시기’에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가슴을 쓸었다. “그때 정부 차원에서 4개의 전향공작조를 운영했는데, 정말 무참히 죽어갔다. 74년에만 대구교도소에서 김태원·윤종하, 대전교도소에서 박학수·배창수·최석기·박융서, 광주교도소에서 박윤영·변치수·이동근·한명원 동지가 죽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76년 광주교도소에서 김규호 동지는 위장병이 심해 아파 죽는다고 했는데도 약을 안 주며 전향을 강요해 결국 자살했고. 서글서글한 부산 사람인 최한석 동지는 심장병이 심했는데 약을 안 주며 전향을 요구해 죽게 만들었다. ….” 수십년씩 옥살이를 함께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비전향 장기수들은 이렇게 자신의 옆방에서, 같은 감옥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애써왔다.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면 억울한 죽음과 반인륜적 전향공작 실태가 밝혀지고, 죽은 자의 명예가 회복되리라 기대하면서.
생존한 장기수들이 이렇게 기억해낸 박정희 정권에서 목숨을 빼앗긴 장기수 이름만도 현재 54명에 이른다.
△1965년 이회복·임주홍·김경섭(대전교도소), 박재복(광주교도소) △69년 손순남·최종천·최한무·하상혁·황대연(대구〃), 김세균(대전〃), 이양섭(광주〃), 윤석만(전주〃) △70년 권오금(전주〃) △71년 김대석(대구〃) △72년 고봉률·이연송·한태갑(대구〃), 한현수(대전〃) △73년 김영호(대구〃), 이영호(광주〃), 김태선·조인국(전주〃)… △77년 김경익·김홍직·백갑기·안준호(청주보안감호소) △78년 박정래(대구〃), 탁해섭(전주〃), 이동훈(청주보안감호소) △79년 손순영(대구〃), 임창규(광주〃), 송순희(청주보안감호소).
여전히 해결안 된 인혁당 사건
생존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나마 자신들이 기억하는 이름은 죽은 사람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추산했다. 임방규씨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61년 8월 정부가 대전교도소로 비전향 장기수를 총집결시킨 뒤 특별감옥에 가뒀는데, 그때 모인 사람이 모두 789명이었다. 그런데 북한으로 송환된 장기수, 전향·비전향 장기수를 포함한 생존자, 석방 뒤 사망자 등을 합쳐봐야 200여명”이라면서 “죽은 사람 중에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모르는 사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 등 죽은 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신정권의 칼날은 특히 비전향 장기수에게 가혹했다. 아직까지 옥중에서 사망한 장기수 수도 정확하지 않은 상태다. 2004년 열린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 촉구대회. (사진/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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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하루빨리 옥중에서 사망한 장기수들의 애달픈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 길은 아직 멀고 험난하다. 현재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 죽음의 원인과 과정이 밝혀진 장기수는 최석기, 박융서, 손운규, 김용성, 변형만씨 등 5명뿐이다. 모두 전향공작 과정에서 죽거나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머지는 칠순을 넘긴 동료 장기수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동료 장기수들은 최근 끈질긴 노력 끝에 이들 가운데 몇몇은 교도소 공동묘지에 유골로 묻혀 있고, 또 일부는 수감 기록을 담은 신분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내 진상 규명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진실은 지난해 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반대로 무산된 과거사청산법이 국회를 통과해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박정희 정권 때 각종 공안 및 시국 사건과 관련돼 사형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2월21일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조총련계 자금을 끌어들여 신문을 창간해 이북 괴뢰집단의 주장에 동조하는 논조를 폈다”는 이유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3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중앙사회당(1961), 통일혁명당(1967), 인민혁명당재건위(1975) 사건 등으로 12명이 처형됐다.
대부분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이 개입한 정권 안보용 조작 사건이라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특히 유신시대 ‘최악의 사법 살인’으로 평가받은 인혁당 사건은 1975년 4월8일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여정남 등 8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겨우 17시간 만에 사형됐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 당시 “민청학련 배후 조종 단체”라는 혐의를 전면 부정하며 무죄를 주장했고,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공판 기록 조작 등을 통해 사형이 확정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의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2001년 12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 및 보상을 신청했다. 함께 신청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지만 그 배후로 지목돼 사형당한 이들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고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는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조사 결과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결론이 났는데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심사 중이니 안심하고 기다리라’고만 말한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지난 2002년 12월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2003년 11월 첫 심리를 열고, 2004년 4월 보충자료를 내라고 한 뒤 감감무소식이다. 유족을 도와온 천주교인권위 김덕진 상임활동가는 “분명 박정희 정권의 조작으로 억울하게 죽었고 그것을 계기로 수많은 민주화운동이 촉발됐는데, 인혁당 관련자들이 법정에서 ‘모든 사건은 조작이며, 인혁당 재건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만한 행위가 없다고 말한다”면서 “법원도 여론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영교씨를 비롯해 신동숙(고 도예종씨 부인), 김진생(고 송상진씨 부인) 등은 요즘도 집회현장과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죽은 남편의 명예회복을 호소하고 있다. 이씨는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조사를 통해 진실이 더 명확히 드러나면 명예가 회복될는지,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당한 조융수 사장의 친동생 조용준씨, 당시 <민족일보> 기사였던 김자동씨도 지난 2001년부터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진실 규명에 발벗고 나섰다. 조용준씨는 “당시 그들은 형을 죽였을 뿐 아니라 신문사 임대료, 102명 기자의 월급 준비금까지 다 강탈하는 강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서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최종길·장준하 의문사 한꺼풀씩 벗겨져
박정희 시대가 남긴 대표적 의문사인 최종길 교수(1973), 장준하 선생(1975) 사망 사건도 의혹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최 교수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중앙정보부가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유족들은 지난 1월26일 국가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했다. ‘시효가 지났다’는 게 이유였다.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추락사’한 장준하 선생 역시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타살 가능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진실은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