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수호용으로 반공·안보 활용… ‘7·4 남북공동성명’의 봄날 뒤 불어온 간첩조작의 ‘북풍’
▣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반공’.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내세운 혁명공약 제1호의 첫 외침이다. 박정희 18년 집권 기간을 통틀어 그의 대북 혹은 통일 정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 한 단어로 모아진다. 그는 이 공약에 바탕해 ‘반공’과 ‘안보’를 ‘민주’와 ‘자유’의 상위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박정희는 그 긴 집권 기간에 단 한시라도 김일성과의 경쟁 의식을 떨쳐버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가 북한 정권을 인정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으며, 사회주의식 통일이나 이들과의 진정한 교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일성과 그 집단이 이끄는 민족반역자 그룹이 한국의 북부를 점령하고 있다.” “북한은 전쟁 준비에 광분해 있는 군사시설로 전락했다. 그곳에는 독재와 테러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통일관은 ‘전 국토의 민주화, 북한 지역에 대한 자유의 선포’라는 표현으로 상징됐다.

△ 박정의 정권은 북한에 개방과 교류를 제안한 최초의 정권이었으나, 이런 평화적 기류도 유신 체제에 접어들면서 사라졌다. 1972년 11월4일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에서 남북 대표가 합의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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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과에 자신감 얻고 잠시 유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정희의 통일관은 조금 유연성을 띠기도 한다. 그간 이뤄놓은 경제적 성과를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1970년대 들어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동독을 비롯해 옛 소련, 폴란드 등과 관계를 개선하는 등 과감하게 ‘동방 정책’을 추진하는 데 주목했다. 그는 1970년 8·15 선언에서 △북한이 남북 적화통일 기도를 포기하면 남북한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한다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하면 유엔의 동시 초청을 반대하지 않는다 △남북이 어느 체제가 더 잘살 수 있느냐를 보여주는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북한에 개방과 교류를 제안한 최초의 정권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1972년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고, 1973년 6월23일 발표한 ‘평화와 통일에 관한 특별 외교선언’에서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제의하는 등 잇따른 평화 공세를 펴기도 했다. 7·4 공동성명 이후에는 휴전선의 상호 비난 방송이 중단되는 등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에 따뜻한 봄 햇볕이 쬐어졌다. 김현철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는 “1970년대 초 7·4 공동성명의 발표 등 일련의 남북한 대화와 화해의 모색 시도는 현재까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과 남북 관계 개선 방향에 대해 남북한간에 사실상 최초로 합의한 매우 극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 1972년 11월3일 평양에서 남한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난 김일성. (사진/ 격동 한반도 새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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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조기 통일에 대해 매우 회의적 시각을 품고 있었다. 그는 통일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측근들에게 종종 “김일성이 살아 있는 한 통일은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불신은 자연스레 대북 평화 공세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남북 화해, 평화 공존 제스처가 순전히 국내 정치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셈이다. 박정희는 1972년 계엄령과 유신헌법을 선포하는 등 유신 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 영구 독재를 거부하는 광범위한 민주화 운동에 부닥친다.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박정희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을 누그러뜨리고 보수층의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통일 문제를 맘껏 이용했다. 즉, 자신의 권력 연장과 강화를 위해 북을 이용한 것이다. 사실 이는 북한의 김일성 정권도 마찬가지로, 남북한은 때로는 체제 대결로, 때로는 위장 화해를 하면서 자신들의 체제 결속이나 지배권력을 강화하는 데만 골몰하는 교묘한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어나갔다.
통일론 제시하면 바로 ‘용공이적’되고…
이런 냉전 의식으로 꽉 찬 그의 생각 때문에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한국 사회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통일 논의는 금기시됐고, 통일론의 부재 현상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는 반공을 국시로 삼아 반공법을 제정(1961년 7월)해 평화통일론·중립화통일론·남북교류론 등의 논의에 제재를 가하고 국법상 승공통일론만을 허용했다. ‘선 건설·후 통일’은 그의 절대적인 지상 과제였다. 박정희는 통일 문제에 주도권을 쥐고 이를 한 차례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는 통일안보를 내세워 정권 연장과 체제 강화를 꾀했을 뿐 아니라 유신헌법에 민족통일에 관한 일체의 사항은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만 논의하도록 선을 그었다.

△ 12월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평양에서 온 박성철 부수상을 만났다. (사진/ 격동 한반도 새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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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일 문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절박한 대중적 과제였다. 재야 운동권에서는 탈안보적·탈정부적 차원의 민중통일론이 끊임없이 분출됐다. 당시 획기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40대의 신예로 등장해 전통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김대중씨였다. 그는 남북교류와 평화통일, 주변 4대국 보장론 등을 주장해 나라 안팎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1972년 3월에는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론’을 처음으로 제시해 수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런 앞선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은 박 정권에 의해 ‘용공이적’으로 몰리고,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되어 살해될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무수한 재야 인사들이 용공 올가미에 덧씌워져 의문사하거나 곤욕을 치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남북이 서로 속셈을 다른 데 두고 위장 평화 공세를 펴다 보니 남북 관계는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걷힐 날이 없었다. 형식적인 대북 화해 제스처마저도 1970년대 중반의 잇단 불미스런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일촉즉발의 벼랑 끝 관계로 치닫고, 반공·반민주화 체제는 더욱 공고화되는 토대를 제공한다. 1974년과 1975년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산화, 1974년 8월15일 박 대통령 저격 미수범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사망, 비무장지대 땅굴 발견 등이 이어지면서 박정희의 김일성 불신은 극에 달한다. 1976년 8월에는 판문점 미군 장병이 북한군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고, 박정희가 살해되기 이전 해인 1978년에는 6·25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팀스피리트 훈련이 실시되면서 마치 이제 남은 것은 전쟁밖에 없다는 긴장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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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날 정도로 ‘북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1973년 8월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김대중씨의 모습. (사진/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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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남북 협상이 깨진 다음해인 1974년부터 유신 체제를 반대하는 반체제 민주화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박정희는 대통령긴급조처 등을 발동하면서 운동권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의 불순한 책동’이 도사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이에 따라 무수한 조작된 간첩단 사건이 발표되고, 국가보안법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다. 1974년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은 대표적인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일컫는다. 당시 박 정권은 민청학련이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재건위 조직과 재일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 등과 함께 북한의 통일전선에 동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며 관련자들을 고문하고, 일부 인사들을 사형하기까지 했다. 박 정권은 유신헌법 등 모든 독재권력 장치 유지의 명분으로 북한의 폭력혁명 노선과 이에 의한 적화통일 위협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100만명 이상의 보수 지지층을 수시로 동원해 서울 시청 앞에서 안보궐기 대회를 여는 등 내부 체제 단속에 나선 모습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전문가 “북의 위협에 대한 실증적 연구 필요"
박정희의 대북 혹은 통일 정책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명징하다. 신종대 경남대 교수는 “북한 요소가 박정희의 체제 경쟁 의식을 부추겨 경제 성장에는 오히려 기여했다는 역설이 존재하지만, 민주화나 통일 논의의 활성화를 틀어막았다는 점에서는 부정적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당시 북한의 위협이 실제로 어느 정도 존재했고, 이런 위협이 박정희의 대북 인식이나 통일 정책에 어떻게 투영됐는지에는 실증적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심스런 판단이다.